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5화 (5/176)
  • 5화

    해가 짧던 작년 겨울, 윈터는 모처럼 집에 나흘을 머물렀다. 윈터가 다시 수도로 떠나기 전날, 저녁 식사를 하던 바이올렛이 말을 걸었다.

    “머리가 너무 길지 않아요?”

    윈터가 그녀를 마주 보자 바이올렛이 제 머리칼을 부끄러운 듯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조금…… 자를까요? 기분 전환도 할 겸.”

    “마음대로 해.”

    아내는 툭하면 이렇게 시답지 않은 질문을 했다. 제 머리 자르는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윈터는 그딴 문제를 타인에게 일일이 묻지 않았다.

    그의 대답에 모처럼 미소가 감돌던 바이올렛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대화는 끝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머리를 자르지 않았고, 그날 이후 그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윈터는 그날 바이올렛의 표정 변화를 기억했다. 아무래도 제 대답이 언짢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자르지 말라고 했어야 했던 건지, 아니면 자르라고 했어야 했던 건지.

    여자란 참 모를 존재였다.

    잠시 후, 하녀가 약과 물을 가져다주어 윈터는 그것을 먹고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약 기운에 그럭저럭 두통이 가실 즈음, 노크 소리에 잠이 깼다.

    “바이올렛.”

    “들어와.”

    동생인 디에브의 목소리에 윈터가 몽롱한 상태로 대답했다.

    언짢은 기분으로 바이올렛을 찾아왔던 디에브는 웬일로 침실에 들어오라 허락하자 확 언짢음이 풀려 미소를 지었다.

    “계속 잠만 잔다더군요. 이번엔 꾀병이 아니라 정말 몸이 안 좋다고 릭먼이 말하던걸요?”

    “죽겠…… 네요. 아주.”

    “식사는?”

    “절대 못 먹어요.”

    이복형인 윈터에게 온갖 무시를 당하고 그럼에도 돈은 받아먹어야 하니 숙여 주느라 돌아 버리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던 디에브가 지금은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확 짜증이 난 윈터가 말했다.

    “나가서 술이나 좀 가져와요.”

    윈터의 말에 디에브가 실소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가져올 리 없다고 생각하며 드러누워 있는데 디에브가 민트를 띄운 물을 가져다 협탁에 놓았다.

    “술은 안 돼요. 물 마셔요.”

    그가 나지막이 말하고는 침실을 나갔다. 동생이 나가고 나니 윈터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 둘이 이렇게 친했던가?

    하기야, 자신은 파산 직전인 회사를 재건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으니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알 턱이 없었다.

    윈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약 기운이 올라와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한참을 자고 난 후에야 윈터는 약의 힘을 얻으며 수도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바이올렛이 잠에서 깬 후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정말로 미쳐 버렸나 보네.”

    바이올렛이 혼잣말을 하는데 불쑥 들어온 하옐이 말했다.

    “마님께서 전신을 보내셨는데요. 작은 마님께서 머리를 자르셨대요. 너무 잘 어울린다고, 돌아오셔서 꼭 예쁘다고 말해 주시라네요. 아니, 마님은 항상 이렇게 작은 마님을 챙기시는데 작은 마님은 왜 그렇게 파티에 가길 싫어하시는 걸까요?”

    “아…….”

    힘없는 웃음이 나왔다.

    지난 3년간 윈터는 한 번도 캐서린이 여는 파티에 와 준 적이 없었다. 생일 같은 행사는 종종 참여했지만 그마저도 인맥을 늘리는 용도라 다른 사업가들과 이야기하기 바빴다.

    그러니 하옐도, 윈터도 모르는 것이다. 제가 군중 속에서 느끼는 싸늘한 시선과 비난들을.

    하기야, 그 괴롭힘을 알았다고 해도 윈터는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아내의 편을 들어 주진 않았을 것이다. 당신 때문에 투자한 내 돈을 날렸다고, 몇 번이나 바이올렛에게 말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3년이나 지났는데 왜 마음의 아픔은 가시질 않는 건지. 어떻게 이렇게 처음만큼이나 아픈 건지 모를 일이다.

    첫눈에 반한 남자가 끝끝내 자신을 미워하던 3년, 미안함과 첫사랑의 설렘과 원망이 섞인 감정들을 정리하던 3년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바이올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관심 없어.”

    “예?”

    “아내가 뭘 하든. 난 관심 없어.”

    “마음대로 해.”

    남편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윈터 블루밍이라면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아내가 뭘 하든, 무슨 변화가 일어나든 나는 상관없다고. 아무 관심이 없다고.

    그때, 밖에서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작은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그 말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꿈 같은 망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제 몸을 마주하면 다시 그 지옥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잔다고 해.”

    그러자 하옐이 잔소리하듯 대답했다.

    “아무리 그러셔도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물어보셔야죠.”

    “자네가 물어보면 되잖아.”

    하옐은 윈터의 무심함에 질색했지만 별수 없이 로비로 향했다.

    로비에 도착한 그는 팔짱을 끼고 삐뚜름히 서 있는 작은 마님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며 정중히 물었다.

    “작은 마님,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남편은?”

    “주무십니다. 저희 쪽에서 요구한 걸 전부 고수했으니 마음이 풀어지셔서 오래 주무실 겁니다.”

    “계약을 마쳤다고? 우리가 요구한 그대로?”

    작은 마님이 잡아 죽일 듯한 표정으로 묻자 하옐이 난처해하며 되물었다.

    “예.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두 사람은 대화하는 중간에 승강기에 올라탔다. 하옐이 들고 있는 열쇠를 문 옆에 있는 열쇠 구멍에 넣어 12층으로 돌리자 드르륵 소리가 들리며 승강기가 움직였다.

    윈터가 손부터 대뜸 내밀었다.

    “계약서.”

    “이미 회사에 넘겼습니다만…….”

    왜 이런 걸 묻나, 의아해하던 하옐은 곧 아내가 뭘 하든 관심 없다고 말하던 윈터를 떠올렸다. 그와 달리 아내는 남편의 일에도 관심을 보이려 애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옐은 무정한 윈터를 속으로 욕하며 12층에서 먼저 내려 문을 잡았다. 그가 안내하지도 않았는데 작은 마님이 알아서 늘 윈터가 머무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내내 딴생각에 잠겨 자신을 애처롭게 보던 하옐에게서 열쇠를 뺏어 막무가내로 침실에 들어선 후 그가 들어오기 전에 문을 잠가 버렸다.

    스위트룸에 들어선 윈터는 창가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제 몸을 향해 물었다.

    “바이올렛, 당신이지?”

    “윈터, 잠깐…….”

    “이런 어이없는 경우는 또 처음이군.”

    가까이 가던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제 몸에서 나는 시가와 술 냄새가 지독했다.

    “내 몸을 어떻게 쓴 거야.”

    짜증을 내며 가까이 가 팔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현기증을 느껴 비틀거렸다.

    곧 현기증이 사라지더니 바이올렛의 눈에는 윈터가, 윈터의 눈에는 바이올렛이 보였다.

    그것은 몸이 닿는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두 사람 다 몸을 되찾은 타이밍을 통해 방법을 알아차렸다.

    “몸이 닿으면 다시 되돌아오는 모양이군.”

    “그러네요. 우리…… 얘기할 게 많아졌네요.”

    “많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나도 몰라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자기가 계약을 해 놓고 왜 몰라?”

    “계약이요?”

    몸이 바뀐 것에 대한 질문인 줄 알았더니 계약에 관한 것이다. 하기야, 그의 머릿속에는 돈 생각밖에 없으니.

    그래도 처음 남편과 할 이야깃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렛이 여느 때처럼 섭섭함을 감추는데 윈터가 말했다.

    “계약이 이상할 정도로 잘 돼서 묻는 거야. 로월 그 좀팽이를 어떻게 꺾었어?”

    “아.”

    윈터의 반응에 바이올렛의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살면서 성취감을 느낄 일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 윈터의 이 말로 마법에 걸려 몸이 두둥실 뜨는 듯이 가벼워진다.

    그녀가 ‘결코 뽐내지 않는다’는 가풍을 가진 로렌스가의 사람답게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었어요. 그보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짐작 가는 거 있어요?”

    “없어.”

    “당신은 이방인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거울을 살피며 제 몸을 반가워하던 윈터가 행동을 멈추고 바이올렛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색 눈동자는 라크라운드에서 빈곤의 상징이었다. 회색 눈동자는 오래전 이곳으로 이주해 온 이방인의 것이었고, 그 이방인들은 대부분 빈곤했기 때문이었다.

    “이방인은 누구나 주술 하나쯤은 사용할 줄 알 것 같은 모양이지?”

    윈터가 경멸 섞인 눈으로 바이올렛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드물지 않게 있지. 당신처럼 예의 바르게 이방인을 차별하는 사람들.”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제 가문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아는데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당신은 카닉 일족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한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래, 그래. 내가 주술사 가문의 후손인 걸로 하고.”

    윈터가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 정말로 몸이 두둥실 떴다. 윈터가 그녀를 휙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가뿐히 남편의 팔에 들린 바이올렛이 기겁을 해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내가 그 몸을 끌고 여기까지 와 봐서 아는데, 당신은 더 이상 못 서 있어.”

    “서 있을 수 있어요!”

    “없어.”

    윈터가 단호하게 말한 후 그녀를 제 침대에 데려가 눕혔다. 그리고 구두를 마음대로 벗겨 쓰레기통에 처넣고 말했다.

    “당신은 무슨 슬리퍼 하나가 없어?”

    “침실에 있는데요. 그리고 내 구두를 왜…….”

    “외출할 때 신는 슬리퍼 말이야.”

    “야외에서 슬리퍼를 신어요?”

    바이올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반응이나 대답과 상관없이 바이올렛의 몸을 끌고 다닌 윈터는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윈터가 베개를 바이올렛의 등 뒤에 받쳐 두고도 부족한 표정을 짓더니 바이올렛의 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말이야.”

    “……이거라뇨?”

    “당신 몸. 여기까지 끌고 오다가 죽는 줄 알았어. 제일 무거운 짐이 몸이더군.”

    윈터는 정말이지, 오로지 계약서를 확인하겠다는 집착 하나만으로 몸살에 죽어 가는 몸을 끌고 수도에 왔다.

    어렸을 때 하인 일을 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하던 때도 이렇게 괴롭진 않았다. 머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은 정말 머리를 잘라 던져 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윈터의 강철 같은 몸을 사용하던 바이올렛 역시 그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하지만 오늘 바이올렛의 몸은 괜찮은 축이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아주 좋은걸요? 약이라도 먹었어요?”

    “릭먼이 주더군.”

    “정말요? 웬일로…….”

    “돈을 얹어 줬지.”

    “아아.”

    바이올렛은 바로 납득했다.

    그가 자를 시기를 놓친 검은 곱슬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목욕을 하고 회사에 갈 테니까 당신은 이제 누워 있어.”

    “전 충분히 잤고, 이제 아침이에요.”

    “그 몸으로 뭘 하게.”

    윈터는 정말 바이올렛의 몸에 질려 버린 듯했다. 그는 일어나려 하는 바이올렛을 반강제로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은 후 밖에서 대기하던 하옐에게 말했다.

    “씻을 테니까 의사 불러 놔. 가는 길에 여자들 외출할 때 신는 슬리퍼도 사 오고. 나오면 바로 회사로 가지.”

    “네, 대표님. 와, 근데 어제는 진짜 대단하셨어요! 시가는 언제 공부하신 거예요? 로월 그 자식이 찍소리도 못 하던데요?”

    “의사.”

    “아,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 괴상한 예절 연습이 끝났는지 윈터는 평소의 그로 되돌아왔다. 하옐은 안심하며 의사를 찾으러 달려 나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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