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64화 (163/218)

164화. 반하게 된 계기

그는 항상 다정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성향에 그 다정함을 모르는 이들은 많았다.

깃펜을 꾹 쥐며 필기를 하다가 손에 잉크가 묻은 줄 모르던 자신에게 그는 조용히 물에 적신 손수건을 책상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자주 넘어지는 자신이었지만 넘어진 그 날에는 항상 신전의 제 책상에 연고가 놓여 있었다.

집중을 어려워하던 때에는 달콤한 케이크를 내려놓고 사라졌고 몸이 좋지 않은 날에는 레몬 맛이 나는 영양제가 올려져있었다.

제 책상에 작은 선물과 정을 놓고 빠르게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후부터 앤젤라는 가슴에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그의 따스한 배려와 다정함에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저절로 물결치는 호감과 애정에 앤젤라는 그를 향해 수 없이 손을 뻗었다.

제 손을 잡아준 적은 없었으나 그의 온기가 담긴 시선이 그녀가 뻗은 두 손을 거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은 호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이내 앤젤라의 가슴에 한 명의 남자로 자리잡혀갔다.

‘첫사랑.’

그 다정함에 반해 호감을 가졌고 지속적인 배려에 반해 마음은 깊어졌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도 백금발의 머리카락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제 첫사랑에 대해 생각하던 앤젤라는 달콤하게 웃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대공저 밖에서 신전으로 가고 있을 그의 방향을 집중하며 바라보던 앤젤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날 보러 온 게 아닌 건 알지만...’

오랜만에 그를 만났기에 반가움은 배가 되었고 헤어질 때의 아쉬움은 더욱 배가 되어 불려갔다.

아리엘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즐거워하던 앤젤라가 시무룩해보이자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히 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 꽤 오랜만에 보는 거 아니야? 요즘 어디 바쁜 일이라도 있나보지?’

“아... 아카데미를 입학중이거든요.”

‘아카데미?’

아리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다급히 물었다.

‘아카데미는 입학하는 것과 동시에 졸업할 때까지 밖으로 못나오잖아! 무단으로 아카데미 담이라도 넘은 거 아냐?!’

“네에?? 언니!! 언제 적 아카데미를 말하는 거예요? 요즘은 ‘방학’ 이라고 한 학기의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한 달 동안 돌아올 수 있어요. 지금이 딱 그 방학기간이고요.”

‘정말?? 와... 아카데미도 많이 좋아졌구나.’

새로운 세계에 놀랐다는 듯이 아이처럼 감탄하는 아리엘의 모습에 앤젤라가 나직이 웃었다.

“언니 때의 아카데미는 어땠어요?”

‘음... 말이 아카데미지 거의 감옥 같았지. 밖으로 나올 시간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고... 빨리 밖으로 나가려면 조기졸업을 노리는 것 말고는 없었거든.’

“에에...”

‘진짜 힘든 때였지...’ 아리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담겼다.

오랜만에 회상한 추억이 그녀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앤젤라!!”

“웅??”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앤젤라가 고개를 돌렸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레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기오빠?”

“여기 있었구나! 잘 됐다.”

“응??”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찾으셔. 얼른 가보자.”

“엄마랑 아빠가? 왜??”

“나도 잘은 모르지만 좋은 일이 있으신 것 같아.”

“??”

“가보자!”

영문을 몰라 하는 앤젤라에게 한 손을 뻗은 레기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앤젤라는 순순히 그에게 이끌려 따라 걸어갔고 말이다.

10살이 넘어서면서부터 레기와 에드는 몰라보게 자라나고 있었다.

키도, 몸도, 심지어 생각하는 것마저도 자신보다 더욱 크게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 제 눈에도 보였다.

벌써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레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앤젤라는 제 손을 잡은 조금 더 큰 그의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손도 나보다 큰 것 같아. 내가 작은 건가?’

이유가 어떤 것이든 조금 속이 상했다.

자신도 제 형제들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싶었다.

빠르게 자라나서 데미언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

“엄마 내꺼에여!”

“이젠 미안하지도 않구나. 엄마는 아빠 것이란다.”

“아니에여! 리아꺼!!”

“... 둘 다 그만해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제이와 플로리아의 성난 말장난이었다.

세린은 그런 그들을 제지하며 앤젤라와 레기를 자리에 앉혔다.

에드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그의 옆으로 레기, 앤젤라가 차례로 자리했다.

세린은 쪼르르 모인 세쌍둥이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 우리 가족끼리 놀러가지를 못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너희의 의견은 어떠니?”

“여행이요??”

“응. 바다를 보러 갈 것이란다. 엄마도 바다는 딱 한 번밖에 안 가봤는데 엄청 예쁘고 신기한 냄새가 났어.”

“우와....!”

“어때? 우리 여행이나 다녀올까?”

“좋아요!!”

“리아도 죠아여 죠아여!”

아이들의 밝아진 웃음에 세린의 입가에 담긴 미소도 짙어졌다.

세린은 벌서부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인 삼촌에게 반지를 부탁드려야겠다. 만약 반지를 받으면 여행을 다니면서 절대 푸르면 안 돼.”

“왜요??”

“우리 머리카락이랑 눈이 사람들 눈에 띄면 여행을 즐겁게 다녀올 수 없어지거든.”

“안 벗을게요. 얼른 같이 여행 가고 싶어요!”

“하하하 그래그래, 레인 삼촌이 반지를 주면 그 다음 날에 바로 출발하자! 바다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해.”

“네에!!”

앤젤라와 레기, 에드의 힘찬 대답에 세린과 제이의 웃음이 짙어졌다.

플로리아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선물해주고 싶었고 성 밖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에 이리 여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세린은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번 여행에 참여하게 될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말이다.

*

“네? 저도 함께 말입니까?”

“응!”

당황을 가득 머금은 금빛 눈동자가 난처하게 빛났다.

이엔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제 볼을 긁으며 세린을 향해 물었다.

“가족 여행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제가 함께라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이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엔도 우리 가족이잖아.”

“하지만...”

“이엔도 대공성에 들어오고 난 후부터 밖으로 나가지 못했잖아. 밖의 세상이 궁금하지 않아? 어떻게 바뀌었고 뭐가 생겼을지.”

“.....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뿐입니다. 간절히 원한 것은 아니었고...”

“우리랑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 불편하다면 말리지는 않지만...”

세린이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엔의 눈에 혼란이 섞이자 세린은 어르듯이 이엔을 향해 말했다.

“아이들은 이엔을 너무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나도 이엔이 와준다면 든든해서...”

시무룩한 어조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슬픈 목소리에 이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린을 향해 외쳤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여행에 함께 가겠습니다.”

“와아 정말 고마워 이엔!!”

세린의 눈가에 담긴 미소가 짙어졌다.

“분명 이엔도 즐거울 거야!”

세린의 계획은 이엔의 휴식이자 그의 안정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만약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이엔은 대공성에 혼자 남을 것이었고 혼자 남게 된다면 분명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쉽게 외로움을 느끼는 그를 알기에 걱정이 되었다.

리사가 분명 무척이나 그리울 것이었고 조용한 성의 분위기 속에서 잊힌 나쁜 기억들이 올라올지도 몰랐다.

그가 그런 외로움과 슬픔을 겪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와 함께 여행을 가고자 제의를 한 것이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과 애교에 분명 다른 생각에 몰두할 시간도 없을 것이었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도 마음도 몸도 모두 풀어버리고 즐겁게 돌아왔으면 싶었다.

세린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이엔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다는 처음이었고 이렇게 즐기러 가는 여행은 처음이었기에 무엇이 필요할지 알 수 없던 탓이었다.

‘뭘 준비해서 가야 하지?’

텅 비어있는 제 가방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이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일단... 갈아입을 옷이랑... 옷이랑... 옷이랑...’

그리고?

“.. 검..?”

잠깐의 침묵 끝에는 엉뚱한 결과물이 튀어나왔다.

이엔은 그 생각을 끝내자마자 제 방에 있는 별의 별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깃펜, 종이, 잉크, 검집, 단검, 곡선으로 휘어진 칼날, 돈주머니, 도끼 등등... 점점 테이블을 차지하는 수많은 무기들의 행진에 이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가져가도 되는 걸까?”

여행에 무기를 들고 가기 좀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 알겠는가.

항시 밖에서는 위험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고 리사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제 몸에 일부 무기를 조금씩 숨겨놓으며 이엔은 순탄한 여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도시락도 싸가야 할까?’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날카로운 검들과 무기들을 챙기는 모습과는 다른 깜찍한 생각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볼을 볼과 밝게 빛나는 눈동자를 볼 때,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첫 여행에 설레어 하는 것 같았다.

짐을 싸던 이엔이 이내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바다까지 가려면 마차를 오래 타야 할 거야. 마차에서 심심하시지 않게 작은 쿠키라도 싸 달라고 주방장님께 말씀드려야겠다.’

레기와 에드, 앤젤라, 플로리아가 마차에서 힘들고 지칠 것 까지 고려하는 이엔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모 못지않게 깊었다.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위한 준비가 끝났고 여행을 가는 당일 날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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