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위기
황성의 복도를 걸어가던 테오는 복도에서 마주친 제 동생의 모습에 그를 나직이 불렀다.
“로레인.”
“형님.”
“세린에게 가는 길이더냐.”
“네, 형님도 가시는 길인가 보군요.”
“아버지께서 먼저 맞이하러 나가셨다더구나. 이리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어.”
“얼른 가죠. 뭔가 잔뜩 사왔다는 말을 들어서 좀 불안합니다.”
“놀러가서는 또 아이들과 우리들 생각을 하느라 바빴나 보구나. 하여간...”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아이지 않습니까.”
나직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로레인의 미소가 아름답게 빛났다.
테오는 그런 로레인의 기색이 전보다 밝아졌다는 생각을 가지며 그를 향해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 제가요?”
“그래. 평소보다 더 진솔 된 감정인 듯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진솔 되었다니요?”
“네 진짜 미소를 내가 구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
“가족으로 지낸 세월을 무시하면 곤란하지.”
“하하하.”
로레인의 입가에 슬픈 듯 조금 기쁜 미소가 담겼다.
기쁘다고 해야 할까.
기쁘다기보다는 이제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아리엘이 보여준 친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제 자신이 사랑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한 그는 더 이상 쓸 때 없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덕분이었고 저를 안아주었던 아리엘의 온기를 너무도 오랜만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직이 웃는 로레인을 피식 웃으며 바라본 테오는 천천히 보폭을 넓혀 걸으며 말했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구나. 가자.”
“네.”
현실에 직시하기 시작하는 로레인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제 어머니와 앤젤라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이 제게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
황성의 복도에 쌓여가는 수많은 선물들을 보며 테오와 로레인의 입술이 꾹 닫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세린이 맑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테오오빠! 레인오빠!”
“.... 이게 다 선물인 것이냐.”
“사다보니 조금 많아진 거 있죠? 하하하.”
“우리 생각 말고 즐겁게 놀다 오라고 보냈더니 우리 생각만 잔뜩 하고 온 모양이구나.”
“이해해주세요! 생각이 자꾸 나고 보고 싶었던 걸 어떡해요.”
세린의 귀여운 투정을 애틋하게 바라본 테오가 이내 다정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조심스럽고 익숙한 손길에 세린의 미소가 따뜻해졌다.
로레인은 그런 세린을 향해 말했다.
“아이들은 네 선물을 엄청 좋아하는 것 같구나.”
“하하하 좋아해 보인다니 다행이에요.”
로레인의 시야에 담긴 세쌍둥이들의 해맑은 선물 개봉식은 보는 이들도 즐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폭죽이 터지듯이 날아다니는 포장지들과 그 사이로 밝게 웃음을 터트리는 세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에드윅.
그런 가족들의 모습이 로레인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아빠! 이건 뭐예요?”
“이건 솜사탕이라고 하는 음식이란다. 구름처럼 생겼지?”
“네! 구름 같아요!”
앤젤라의 손에는 어느덧 곱게 포장되어있는 솜사탕이 들려있었다.
분홍빛이 도는 솜사탕의 모습이 마치 앤젤라의 머리카락과 비슷해보며 제이는 저절로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레기는 그런 솜사탕과 앤젤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환히 웃으며 외쳤다.
“앤젤라랑 닮았어!”
“웅?”
“앤젤라 머리카락이랑 닮았어. 몽실몽실해!”
“몽실?”
레기의 다정한 외침에 앤젤라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며 이내 제 손에 들린 솜사탕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이게 나랑 닮았다고?’ 라는 감정이 만연한 기색이라서 제이는 결국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빠?”
“비록 앤젤라를 닮았지만 맛은 좋을 것이란다. 먹어보겠니?”
“웅! 앤젤라 먹어 볼래요!”
“오빠들이랑 나눠 먹거라.”
“네!”
제이는 부드럽게 포장을 뜯은 솜사탕을 앤젤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사리 마냥 작은 손으로 솜사탕 막대를 꼭 쥔 앤젤라는 도도도 레기와 에드를 향해 달려가 한 뭉치 떼어 그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한 입 맛을 본 레기와 에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에드는 연두색 눈동자를 가득 빛내며 외쳤다.
“맛있어! 케이크보다 달아!”
레기도 그의 말에 수긍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앤젤라도 이내 제 손의 솜사탕을 한 입 맛을 보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엄마 엄마! 없어졌어요!”
“음? 뭐가 없어졌니?”
“솜사탕이 어! 입에서 막 없어졌어요!”
“뭐? 아하하하!”
앤젤라의 귀여운 표현에 세린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이리 생각하는 것 마저 순수하고 귀여운지.
작은 선물 하나에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서 세린의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그런 가족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테오와 로레인, 에드윅의 손에도 무언가 하나씩 쥐여지기 시작했다.
“....?”
에드윅의 손에 쥐여진 것은 곱게 휘어진 하얀 꽃잎의 꽃 한 송이였다.
꽃 주위에는 꽃이 시들지 않게 하려고 했는지 연두색 빛이 일렁이며 꽃을 보호하고 있었다.
세린이 그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얀 바다라고 불리던 꽃밭 중에 한 송이에요. 원래 가지고 오면 안 되는 꽃이지만 한 송이만큼은 허락을 해줬어요.”
“귀한 아이로구나.”
“땅 밑의 마력을 품은 꽃이라고 하니 진귀한 것이겠죠? 아빠도 제게는 너무 소중한 가족이니까... 특별한 것을 드리고 싶었어요.”
“네가 준 모든 것들은 내게 특별한데...”
“매일 그렇게 말씀하시니 선물 고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 고맙구나.”
세린의 투정어린 말을 웃음을 지으며 들은 에드윅은 제 손에 잡힌 아름다운 꽃 한 송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특별하고 특별한 선물이었다.
막내딸이 제게 주고 싶다고 했던 특별한 선물은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그의 가슴을 옅게 고동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여전히 사랑스런 딸이었다.
테오와 로레인, 테리, 오스카, 트레일과 헤일리, 클로비스, 이엔과 리사, 아인, 메리 등 가족들의 선물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어마어마한 양에 한 번, 그리고 선물의 세심함에 한 번 더 놀란 가족들은 즐거워하는 세린의 표정에 결국 함께 웃음을 지어버렸다.
그 선물들의 행진에 막 달려 나온 클로비스도 기겁을 했지만 말이다.
*
그 날 밤.
앤젤라와 레기, 에드가 한 침대에 누워 속삭이기 시작했다.
“에드, 앤젤라, 내일은 우리 집으로 돌아간대.”
“벌써...?”
“웅. 엄마랑 아빠가 와서 이제 집으로 가야한다고 했어.”
“핏....”
앤젤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시무룩해졌다.
삼촌들과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너무도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점은 에드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이랑 할아버지랑 조금 더 놀고 싶은데...”
“다음에 또 보러오면 되지! 우리가 막 가기 싫다고 하면 엄마랑 아빠가 속상해.”
“힝....”
“앤젤라, 에드. 다음에 또 놀러 오자.”
시무룩해진 동생들의 이불을 곱게 덮어주며 레기가 맑게 웃었다.
앤젤라와 에드는 조금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오자.”
“웅웅. 다음에도 삼촌이랑 어, 할아버지랑 재밌게 놀 거야.”
“아이 착하네.”
동생들의 수긍에 레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다정한 쌍둥이들의 모습이 달빛에 아름답게 빛났다.
이윽고 레기와 에드는 늦은 잠에 들었고 앤젤라는 두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제 시선에 항상 닿아있는 여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늘 있던 자리와 늘 제 곁에 있던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자 당황한 앤젤라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빈 허공에 외치듯 작은 메아리로 돌아오는 제 목소리에 앤젤라는 다시 나직이 속삭였다.
“언니??”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물씬 걱정스런 마음이 일렁이자 앤젤라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작은 발이 천천히 방문 밖을 향했다.
어두운 황성의 복도에는 옅은 빛을 가진 조명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창문 밖은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다.
“어디 갔지...?”
길이라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어린 마음에 앤젤라는 텅 빈 복도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무서움과 불안함에 못 이겨 두 손으로 제 잠옷 치마를 꾹 잡았고 말이다.
그런 앤젤라의 불안정한 작은 손아귀에는 무의식적인 마력들이 천천히 세어나가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들이 그녀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같은 시각 아리엘은 에드윅의 침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와인을 홀로 기울이며 창가에 앉아 달을 유심히 바라보는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눈과 가슴에 담아가기 위함이었다.
‘내일이면 떠나니까.’
아주 잠시만.
당신의 얼굴을 아주 잠시만 보고 가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달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의 그 아름다운 모습은 너무도 짙은 고독을 껴안고 있었다.
모순적인 그 모습이 아리엘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마치 저 모습을 제가 만든 것만 같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 미안해요.’
당연히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았다.
아리엘은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더 하고팠던 말을 삼키며 이내 뒤를 돌았다.
더 바라보고 있다가는 제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기운 없는 모습으로 아리엘은 앤젤라를 향해 이동했다.
.
‘꼬마야.’
“웅?”
‘이리오렴.’
앤젤라를 향해 하나의 영혼이 다가갔다.
어린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과 의도가 명백하게 악했다.
‘네가 필요해.’
“누... 구세요...?”
‘네가 필요해!’
“웅??! 꺅!!!!”
영혼의 손이 앤젤라의 무의식적인 마력을 수거하며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덜렁 한 팔이 잡힌 채 허공에 들린 앤젤라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으아앙!! 엄마아아!!!”
“앤젤라??!!”
고통스런 앤젤라의 비명에 한 사람이 반응했다.
멀리 복도의 끝에서 맨 허공에 들린 앤젤라를 봐버린 사람은 바로 세린이었다.
그림자처럼 짙은 무언가에 팔이 잡혀 몸이 덜렁 들려진 앤젤라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앤젤라!!”
다급히 앤젤라의 곁으로 달려간 세린은 제 품에 서둘러 작은 딸을 껴안았고 동시에 앤젤라의 마력으로 실체를 얻은 영혼이 무자비하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린의 눈이 앤젤라를 향해 뻗어지고 있는 인영의 손을 발견하였고 이내 그녀의 두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손대지마!!!”
그녀와 앤젤라의 주위로 연두색 빛의 마력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