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엔과 리사의 첫 데이트
똑똑
세린과 제이가 슬프면서도 행복한 저녁을 보낼 무렵, 이엔의 침소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약간의 당황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문을 바라보았고 이내 부드러운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문 바로 옆 기둥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는 리사였다.
높이 올려 묶은 하얀 은발이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허리아래에서 아름답게 찰랑였다.
이엔이 당황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사님? 여기는 갑자기....”
“시간 있냐?”
“시간이요?”
다짜고짜 제 시간의 여부에 대해 물어보는 리사의 푸른 눈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엔은 리사의 어깨 너머의 창문을 바라보며 지금의 시각을 계산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어차피 잠이 오지 않았고 따로 약속도 없으니 시간이야 많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이엔이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럼 나가자.”
“네?”
“성 밖으로 나가자고.”
약간의 즐거움마저 담긴 푸른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엔은 이내 조금 붉어진 볼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성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기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이엔의 긍정에 리사는 한쪽 입 꼬리를 멋지게 올리며 오른 손을 뻗었다.
그 굳은살이 박힌 작은 손을 이엔이 천천히 마주 잡았다.
꼭 잡은 서로의 손을 자연스럽게 움직여 리사가 앞장섰다.
그런 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엔이 조금 의문을 가졌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거지?
그런 이엔의 고민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해결되었다.
리사가 제 로브를 머리 위로 깊게 눌러쓴 후 이엔을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1년에 한 번씩 있는 밤 축제야. 이 시각부터 성인들만 축제를 즐길 수 있다고 하더라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게임도 하자!”
로브 속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이엔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이내 잔뜩 붉어진 볼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리사의 말은... 지금 이 축제에서 함께 연인의 티를 내며 웃고 떠들고 손을 잡고 걸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대공저에서 달밤에 남들의 시선을 피해 걸어 다닐 필요 없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연인처럼 보여도 된다는 소리였다.
이엔의 잔뜩 달아오른 귀를 바라보며 리사가 근사하게 웃고 그의 손을 잡았다.
“좋은 날이니까 놀자고.”
“... 네.”
사랑스런 연인들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게임장이었다.
다양한 게임들이 줄을 선 곳에서 리사의 눈에 띈 것은 술고래 대회였다.
거대한 덩치의 남자들이 줄을 서서 긴 테이블에 앉았다.
“우승하면 상품과 상금이 있나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구나. 상품이 뭔데?”
“1등은 일골드, 2등은 레지주방 식당의 식권이라고 쓰여 있군요.”
“그 식당 유명해. 닭고기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그렇습니까?”
“귀족들도 드문드문 찾을 정도니까.”
“그렇군요....”
이엔의 금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그 틈새의 밝음에서 흥미로움을 느낀 리사가 이내 팔짱을 끼며 근사하게 웃었다.
“좋아.”
“네?”
“밥은 내가 쏘지.”
“.... 네?”
이엔이 멍하니 대답한 것과 동시에 대회의 긴 테이블에 어느 새 리사가 자리했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성인여성의 등장에 대회 참가자의 남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어이 괜히 도전했다가 지리고가지 말고 기회가 될 때 얼른 내려가지 아가씨?”
“흠?”
리사의 푸른 눈이 왁자지껄한 사내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비웃음을 면면에 가득 지으며 말했다.
“지X하네, 넌 나한테 져서 울다가 바지에 지리지나 말아.”
“뭐야?!!!”
“뭐, 내가 내 할 말하겠다는데 불만 있어?”
“대회를 시작합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죠.”
사회자의 중재에 사내가 씩씩 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리사는 코웃음을 치며 제 앞에 내려진 거대한 컵에 담긴 술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술은 무제한입니다. 제일 많이 마시고 오래 버티시는 분이 승자인 단순한 패턴이랍니다!”
사회자의 “시작!” 소리가 들리자마자 리사와 사내들은 컵을 잡고 벌컥벌컥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엔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금 걱정스런 마음을 가졌다.
몰론 리사가 아닌 사내들을 말이다.
언제 한 번 제이가 리사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있었다.
‘제국에서 술로 그 녀석을 이길 자는 없지.’
‘네?’
‘그 녀석 주량이 보통인이 아니야.’
‘리사님의 주량이 어떻게 되시는지...’
‘음....’
제이의 푸른 눈이 이엔을 바라보며 살짝 찌푸려졌다.
‘와인을 15병까지 열어본 적은 있는데... 그게 그 애의 주량은 아니었다. 아예 그 녀석 주량 끝을 본 적이 없어 모르겠군.’
‘!!!’
그 대화가 상상 속에서 끝나자 이엔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지막지한 속도로 컵을 비워내는 리사의 모습에 사내들이 하얗게 질렸다.
3컵, 4컵... 7컵으로 넘어가며 탈락하는 사내들이 많아졌고 결국 10컵에서 리사에게 시비를 걸던 사내마저 나가떨어졌다.
홀로 17번째 술을 마시던 리사가 모두 쓰러진 테이블을 감흥 없이 바라보았고 이내 쾅 소리를 내며 컵을 내려놓았다.
“뭣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그리곤 이엔을 바라보며 로브 속에서 근사하게 웃었다.
깔끔한 우승이었다.
우습게도 목표는 2등 상품이어서 리사는 일등 상품을 대신해 식권을 받아왔다.
그리곤 밝은 얼굴로 이엔을 향해 말했다.
“밥 먹자. 내가 쏜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점점 깊어지는 밤 속에서 축제는 물이 올랐다.
수도의 중앙에 위치한 공터 앞에서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성들과 근사하게 옷을 입은 남성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흐르자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사는 그런 연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들고 있던 닭 꼬치를 한입에 털어 쓰레기통에 버린 후 이엔의 손을 마주잡았다.
우걱우걱 먹던 고기를 다 삼킨 후 당황하는 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추자!!”
“네??”
“춤추자!”
“저, 저는 춤을 출 줄 모르는데....”
“못 춰도 괜찮아. 내 발을 따라오기만 해.”
“어어어...!”
사랑스런 연인들의 댄스홀로 들어선 리사는 이엔과 한 손을 마주잡고 이내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또 다른 한 손으로 이엔의 허리를 잡아주며 몸을 움직이는 리사의 발에 맞춰 이엔은 자연스럽게 스탭을 밟았다.
어쩌다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그리고 남은 손을 마주 잡아버린 이엔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묘한데..’
뭔가 역할이 바뀐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다 이내 로브 속에서 밝게 웃는 리사의 모습에 두 귀를 천천히 붉혔다.
이제 연인이 된지 1년이 된 사이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자주 마주할 틈도 많이 없었기에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 이엔에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저 미소를 언제나 바라볼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밝게 빛나는 초승달 밑으로 두 연인이 다정히 웃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여인들은 검은색 머리 아래로 밝게 빛나는 수려한 이목구비의 이엔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로브를 깊게 눌러쓴 한 여인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기색에 아쉬움을 담은 눈으로 그들을 관찰했다.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다정한 연인들이었다.
댄스가 끝나자마자 리사는 이엔의 손을 잡고 천천히 축제를 즐기며 산책했다.
하늘 위에 떠있는 달 모양의 등불도 예뻤고 주변에서 피어나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귀여웠다.
이엔도 즐거워하는 리사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며 다정히 웃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쉬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들렸다.
“자정이 넘은 3시가 되면 등불이 5분 동안 꺼진다고 했어.”
“5분이요?”
“응, 5분 동안 꺼지면 모두 그 자리에서 멈춰야 하고 각자의 연인들에게 집중해야 한다더라고.”
“아....”
리사의 덤덤한 말에 이엔의 귀가 잔뜩 붉어졌다.
그 말은 즉슨...
그 5분의 시간에 대해 깨달은 이엔은 쑥스러움에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이내 자조적으로 웃었다.
리사가 이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녀와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도 너무 즐거워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발걸음이 풍성한 꽃들로 장식된 거리에 도착했다.
이엔은 그 아름다운 거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밝게 웃으며 물었다.
“걸어 가볼까요?”
“응, 그런데 음식물 반입이 된다.”
“...? 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갈래?”
“제가 사오겠습니다.”
“싫어. 내가 사올 거야!! 여기서 딱 기다려!!”
리사가 버럭 외치며 이엔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이엔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말이다.
이엔에게서 빠르게 멀어진 리사는 이내 제과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서둘러 산 후 다급히 그에게 돌아가려 움직였다.
자기가 나오자고 한 것인데 그에게 이런 자잘한 심부름을 시키기 싫었다.
그때였다.
리사의 발 앞에 누군가가 바로섰다.
“야.”
“...?”
리사의 푸른 눈이 천천히 그 몸집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 술고래 대회에서 저한테 욕먹던 그 사내였다.
사내는 제 무리들과 함께 리사의 주변을 감싸며 이내 피식 비소를 지었다.
“아까 대회에서 날 그렇게 무시하던데...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보지?”
“.... 바지에는 안 지렸나보네?”
“시, 시끄러!!! 네년이 지금 그런 말이 나올 상황이야?!”
사내의 외침에 리사는 아이스크림을 든 손으로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로브에 숨겨진 리사의 푸른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지금 무릎 꿇고 빈다면 한 번은 넘어가주지.”
사내의 말에 결국 리사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나 지금 바쁜데.”
“뭐?”
“내 애인이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야.”
“네가 지금 그 말을 할 때냐고 내가 말했지!!”
사내의 억센 손이 리사의 멱살을 잡아챘고 그녀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하나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 기세에 약간 삐뚤어진 로브 밖으로 리사의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달빛에 비춰졌다.
사내의 눈이 빛났다.
“너, 얼굴은 쓸 만하네?”
“진짜 XX, X-(심한 욕).”
“...!”
고운 입술 사이로 나오는 심한 욕설의 행진에 사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런 사내의 손을 휙 잡은 리사가 그의 팔을 꺾었다.
우드득!
“끄아악!!”
“내가 바쁘다고 했지.”
사내들은 의도치 않은 지옥행에 탑승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