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버텨줘서 고마워
헤일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하얀 색의 천장이었고 자연스럽게 돌린 시선 속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이 시야에 담겼다.
익숙한 온기와 익숙한 손에 헤일리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나... 살아있구나.
당신이 또 나를 살렸구나.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시선을 올린 헤일리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트레일을 발견했다.
“헤일리... 곧 의원이 올 거예요.”
제 눈을 바라보며 힘겹게 웃고 있는 그 미소에서부터 그가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헤일리는 천천히 트레일의 손을 잡았다.
“전하... 전 괜찮아요.”
헤일리의 말에 트레일의 눈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이었다.
괜찮지 않아.
당신 괜찮지 않다고.
“정말 하나도 안 아파요.”
헤일리의 손이 천천히 트레일의 볼에 닿았다.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기도 전에 트레일은 고개를 숙여 누워있는 그녀의 품에 기대었다.
말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슬픔이 그를 덮쳤다.
‘말 못해.’
절대로.
트레일은 천천히 헤일리의 손을 붙잡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헤일리.”
“네...”
“우리 결혼할까요...”
“!!!”
헤일리의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커졌다.
트레일은 붉은 눈동자 속에서 작은 웃음기를 담고 헤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웃음기가 너무도 슬퍼보여서 헤일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트레일은 그런 헤일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나랑 살아요.”
“전하....”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의 말을 끝으로 헤일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트레일이 받은 충격을 가늠할 수 없어졌다.
얼마나 놀랐던 것일까.
자신이 그토록 심각했던 것이었을까.
무엇이 당신을 이리도 두렵게 만들었을까.
부드럽게 제 볼을 감싼 트레일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헤일리는 천천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그래요...”
“하...”
“울지 마세요. 왜 울려고 하는 거예요...”
트레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곤 천천히 헤일리의 손을 제 입가에 가져가며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것뿐이었다.
겨우 말이다.
*
세린은 제이의 품에 안겨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지금 막 헤일리가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득 담아두고 있던 걱정을 내려놓은 참이었다.
작은 두 손으로 눈물로 범벅이 된 눈가를 비비며 세린이 말했다.
“으윽... 다행이에요...!”
“쉬이... 울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가 회복된다면 그때 서둘러 가보기로 하죠. 지금 당장 찾아간다면 쉴 수 없을 거예요.”
“.... 제이 말이 맞아요...”
세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참았다.
세린은 그저 헤일리가 빨리 회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제이의 눈이 그런 세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이내 창문 너머의 궁을 바라보며 더욱 걱정스럽게 눈을 일그러트렸다.
그 사람이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었지만... 그녀의 태아도 무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무척 기대하고 행복해하던 트레일의 모습이 떠오르자 제이는 두 눈을 감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말이다.
*
클로라가 가둬진 어두운 지하에는 단 한줄기의 빛도 허락받지 못했다.
무언가가 썩어가는 듯 고약한 냄새도 더는 클로라의 후각을 자극하지 못했다.
이 더럽고 어두운 곳에서 얼마나 버텼는지, 몇 시간을 이리 하염없이 앉아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이대로 말려 죽일 생각인걸까.
지독한 공포가 클로라를 덮쳤다.
뚜벅
“!!!”
누군가의 발소리에 클로라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두운 감옥 밖의 복도에서부터 한 인영의 그림자가 아주 부드럽게 클로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고귀한 자태를 유지하며 클로라의 감옥 맞은편에 자리한 화려한 의자에 부드럽게 앉았다.
클로라의 바짝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이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ㄴ... 넌 누구야...”
“흠..”
새까만 드레스를 입었는지 어두운 배경으로 하여 그녀에게서 보이는 것은 새하얀 피부와 밝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뿐이었다.
동그란 형태로 존재하던 호박색의 눈동자가 곱게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눈매에 맺힌 웃음기가 너무도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공포스러웠다.
덜덜덜 떨기 시작하는 클로라는 맞은편의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위험신호를 받았다.
살기위한 본능으로 뒤로 기어가는 클로라를 향해 재밌는 것을 봤다는 식으로 여인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이런 모습 정말 오랜만이다.”
“.... 누, 누구냐고 넌!!!”
“어머나... 난 예쁜 사람들에게는 내 사랑을 모두 내비치는 편이지만... 넌 예쁘지 않아서...”
스륵
철컹!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여인이 클로라의 감옥 문을 열었다.
그러자 클로라의 시야에 확 들어온 것은 바다를 연상시키게 하는 파란 머리카락이었고 전에 마주 보았던 대공작을 닮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눈가에 매력적으로 잡혀가는 작은 주름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졌으나 클로라가 느끼는 것은 그저 살기뿐이었다.
클로라의 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메리 스페라도'였다.
메리는 고운 손으로 제 오른 볼을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폐하와 전하 분들께서는 웬만해서는 나를 부르는 일이 거의 없으신데... 너도 정말 불쌍하구나.”
“.... 뭐?”
“아!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서로 일을 시작하겠지? 반갑다 아가야.”
메리는 밝게 웃으며 한 손을 뻗어 클로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 속에서 눈빛만큼은 섬뜩하게 빛났다.
메리는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고문담당이 된 메리 스페라도란다.”
“!!!!!”
“내가 뭐 누굴 죽인다던지 고문하던 일을 관둔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모시는 주군의 부탁이니 이리 다시 복귀해버렸어. 몰론 잠깐뿐이지만 말이야.”
“고... 고문이라고...?”
“그래, 고문.”
메리의 호박색 눈동자가 천천히 휘었다.
그녀의 손에 클로라의 볼을 감싸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프면 소리 질러도 괜찮단다. 네가 고통스러워할수록 내 주군도 만족해하실거야.”
“...!! 그, 그만둬!! 난 서부제국의 황녀라고!!! 고, 고문이라도 무슨 말도 안...!!”
“저런... 아직 못 들었나보구나.”
메리의 눈이 안타깝다는 듯이 빛났다.
“황후마마께서 오늘 서부제국에 연락을 취한 것은 아니?”
“!!!!”
“네가 가지고 온 독으로 인해서 황제폐하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자 제국의 한 분 뿐인 대공부인이 죽을 뻔 했다는 것과 이 제국의 2황자님의 약혼자가 생사를 오갈 정도로 위태로워졌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서부의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
“......”
클로라의 눈이 정처 없이 떨렸다.
아버지가 날 버릴 일은 없어!
아버지는 날 받아주셨는걸!!
분명히 날....!
“서부제국에는 이제 2황녀란 없다.”
“!!!!!”
“내게 딸이라고는 클로비스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니... 그녀의 처우는 동남북 제국의 선택에 맡기겠다.”
클로라의 거칠게 떨리던 눈동자가 멈췄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음성만이 남았다.
‘넌 여전히 버려진 아이란다.’
버려졌어.
아버지가 날 버렸어...!
당신이 또 날 버렸다고!!
날 받아들였으면 끝까지 날 책임지란 말이야!!!
차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에 클로라가 치를 떨었다.
그 모습에 메리는 가만히 웃으며 거칠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억센 손길에 놀라 “컥!” 소리를 내며 클로라가 멈추자 메리가 입을 열었다.
“우린 아직 할 말이 많아.”
“크윽...!!”
“네가 내 딸을 많은 이들 앞에서 모욕을 줬다지. 우리 며느리도 죽일 뻔하고?”
“!!!!”
“전직이지만 암살 같은 것에 잠시 몸을 담구고 살았던 사람이라 널 심심치 않게 할 거라고 장담해. 기대하라고.”
메리의 눈빛에서부터 방금 전, 제이의 살기가 보였다.
그렇다.
제이는 메리를 누구보다 많이 닮았을 것이었고 누구보다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었다.
전직 암살집단의 리더이자 왕이라 불렸던 메리의 고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
같은 시각, 의원은 헤일리의 손목을 통해 그녀의 상태를 진맥하고 있었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트레일은 꿋꿋이 헤일리의 곁에 서 있었고 헤일리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디 제가 건강해져서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이윽고 의원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그이 미소에는 짙은 안도가 서린 웃음이 담겼다.
“다행입니다.”
헤일리의 얼굴이 화사하게 웃음이 피었다.
그것보라.
자신은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한 것이었다.
즐거운 모습으로 뒤를 돌아 트레일을 바라본 헤일리의 귀로 의원이 말이 들렸다.
“이제 막 아기씨께서 3주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만 불안정한 시기인 것과 동시에 몸을 많이 다치셨으니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며...”
“.... 네?”
“예?”
“방금... 뭐라고...”
“아! 노인네가 나이가 들어 본론부터 이야기를 했군요.”
의원 벤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이십니다.”
“!!!!!!”
헤일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트레일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는 다급히 벤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벤!! 그, 어제 그, 내가 말했던 마력이 없어졌다는데 이, 임신이라고? 아이가 무사 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예? 아....”
벤이 난처하게 눈치를 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잉태가 된지 3주도 안 되었는데 마력이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아기씨께서 태어나셨을 때 가져올 마력의 양이 크다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전하처럼 강하게 태어날 아이라는 뜻이었는데... 지금 독을 마셔버리신 후 태아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
“아기씨에게 둘러진 마력이 체내로 들어간 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로 인해 마력이 모두 소멸 된 것이고요.”
“그렇다는 것은....”
“태아는 무사하십니다. 단지 마력이 없이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실 겁니다.”
트레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깊은 가슴까지 물이 밀려오듯 안도감이 가득히 차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씨앗 같은 작은 생명도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버텨냈다는 생각을 하자 그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너무도 미안해졌다.
아이는 그 치명적인 독에게서 버텨낸 것이었다.
‘버텨줘서 고마워...!’
트레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