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달밤의 데이트
창문에 밝은 색의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세린은 밝아진 얼굴로 달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곧 리사가 돌아올 시간인 것 같아 마중이라도 가볼 계획이었다.
침실의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제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문 칸을 사이로 마주친 푸른 눈동자가 창문 밖의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세린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제이!”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리사경이 이제 돌아올 시간인 것 같아서요! 마중을 나가고 싶어서...”
“흠...”
제이는 세린의 말에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린의 고개가 갸웃하며 기울어졌고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담겼다.
한순간에 제이의 푸른 눈이 짙어졌고 그는 천천히 세린에게 다가갔다.
“리사가 보고 싶으셨나요.”
“네? 어... 보고 싶었죠... 제이랑 결혼하고 한 번도 대공저에서 만나지 못 했는걸요!”
“그렇다면...”
“끄악!!!”
제이가 느긋하게 말을 하며 세린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어쩌다 넓은 품에 안기게 된 세린이 큰 눈동자를 더 크게 뜨며 제이를 바라보자 그가 나직이 웃었다.
“내일 아침을 함께 하며 만나는 것은 어떤지요.”
“하, 하지만... 곧 돌아온다고 들어서...”
“세린.”
“네?”
“지금은 밤이지요.”
“그, 그렇죠?”
“밤은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
세린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가득 올라왔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제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차마 어떠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했다.
제이는 그런 순진한 세린의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과연 그녀는 무슨 말을 할까.
세린은 조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근사한 그 얼굴에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올려 물었다.
“그럼... 아침도 함께 할 수 있나요?”
“!!!”
세린의 그 물음에 제이는 입안을 소리 없이 깨물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보다도 순식간에 물들여진 욕망이 그의 눈을 짙게 만들었다.
제이는 세린의 부드러운 볼을 잡으며 말했다.
“부부가 되기 전, 제가 당신께 어떤 청혼을 했는지 기억합니까.”
“네? 당연히 기억해요!”
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리는 비를 다 맞아 폭 젖은 모습으로 이야기한 그 고백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매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도 부끄러워서 세린의 볼이 붉어져만 갔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볼을 쓸어주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그러니 저는 언제든 어디서든 아침이든 밤이든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지요.”
“...!!”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이....”
세린의 동그란 눈에 천천히 입을 맞춘 제이는 자연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그리곤 그녀를 안아 올려 부드럽게 침대에 눕혀주었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달빛을 받은 연두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제이는 그녀와 부부라고 불리는 것이 지금 이 순간마저도 믿기 어려웠고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녀와 닿아도, 안아도, 사랑해도 괜찮다는 것이 그의 가슴에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입술에 입을 맞췄고 천천히 그녀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읏!”
“사랑해.”
“제이..”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세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담기자마자 제이는 이성을 고이 내려놓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침대 밑으로 내려가는 옷가지들을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달빛이 내려온 어두운 방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고 너무도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다.
대공저 대문 아래로 덩그러니 서 있는 리사만 빼고 모두 행복한 밤이었다.
리사는 문을 열기도 전, 입구에서부터 분노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마중을 나오려 기다리고 있다던 세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 제이가 수를 쓴 것임을 눈치 챈 탓이었다.
“제이 스페라도......”
이를 악 물어버린 리사를 향해 앞에서 마중해주던 시종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마님과 잠자리에 드셨다고....”
“죽여 버릴 거야!!!!!!”
쩌렁쩌렁 울리는 리사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참으로 서글펐다.
리사는 쿵쾅 소리를 내며 대공저 안으로 들어섰고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한 인영을 발견했다.
“?”
눈을 찌푸리며 제 허리에 손을 올린 리사는 그 인영을 확인했고 이내 놀란 얼굴로 그를 불렀다.
“이엔?”
“..... 잘 지내셨습니까.”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금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이엔의 수려한 자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놀란 리사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오늘부터 황녀전... 아니 대공마님의 호위기사로 임명받아 대공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게 되겠구나?”
리사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엔은 그런 리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약간 붉어진 홍조를 하고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리사님.”
“음?”
“괜찮으시다면...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
리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산책? 이 시간에?
약간 의문이 섞인 리사의 눈동자 속 감정이 무언가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이엔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그런 사이가 되자마자 함께 있는 첫 시간이라고.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리사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엔에게 손을 뻗었다.
이엔은 활짝 펴진 굳은살이 잡힌 작은 손을 바라보다 리사를 바라보았다.
“리사님...?”
“잡아.”
“!!!!”
이엔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리사는 그 눈동자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였고 이내 그를 향해 물었다.
“원래 연인들은 다 손 잡고 걸어가는 거 아니야?”
“아, 아니... 그...”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리사의 태평한 어조에 두 귀를 붉게 물들인 이엔은 천천히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잡힌 작은 손에 그의 귀가 더욱 붉게 타올랐고 리사는 그런 이엔의 손을 꼭 잡으며 그를 이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리사는 연인이란 무엇인지 연애란 무엇인지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누구에게 배우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바로 이 제국의 3황자이자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1기사단의 단장 트레일에게서 말이다.
리사는 트레일에게 오늘 아침 막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물어본 참이었다.
그녀의 그 말에 식겁하며 트레일이 외쳤다.
“뭐어?!!! 경이 연애??!!!!”
“뭘 그리 놀라고 그러십니까. 체통을 지키십시오.”
“야! 아니... 경!! 체통이 문제야?! 지금 연애라고 했어?”
“예. 전하께서는 지금 헤일리 공녀님과 그런 사이가 아니십니까.”
“아, 아니 뭐... 그렇지만...”
“그렇다면 연애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죠?”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
트레일의 대답에 리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도 모르냐... 이 무능한 존재야.’
라고 쏘아대는 듯한 그 눈빛에 트레일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 잘 들어. 내가 친히 연애에 대해 섬세하게 이야기해 줄 테니까!”
“네.”
어디 들어나 보자.
리사의 눈이 그를 담자마다 트레일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먼저 손이지.”
“손이요?”
“그래. 손!”
“전 개가 아닙니다만.”
“누가 경 손을 달래?! 나도 경 같은 강아지는 필요 없거든?!”
버럭 외친 트레일은 이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흠흠! 일단 연애의 출발에 제일 좋은 것은 손을 잡는 것이지.”
“..... 흠.”
“손을 마주 잡고 온기를 느껴가면서 간단히 산책을 하듯이 걸어가는 거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야.”
“이런저런 이야기요.”
“오늘 했던 일이라던지, 즐거웠거나 슬펐거나 화난 이야기 같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들 말이야.”
리사는 트레일의 말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산책을 하면서 일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첫 번째라...
(현재)
기억이 거기까지 미치자 리사는 이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마주 잡은 손을 관찰했다.
부끄러워하는 이엔의 모습이 생각보다 귀여웠고 제 손을 부드럽게 쥔 그 큰 손이 생각 이상으로 잡기 좋았다.
‘아... 일상 이야기.’
그러다 산책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 급히 이엔을 바라보았다.
“오늘 2기사단들에게 기합을 줬어.”
“기합이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훈련에 집중하지 못해서도 있고 내 기분이 나빠서 훈련장 장애물 넘는 걸 100회 더 시켰어.”
“저런....”
“난 걔네 앞에서 앉아서 쉬었어.”
“.....”
이엔의 얼굴이 살짝 파리해졌다.
리사는 그런 그의 표정변화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눈가를 찌푸렸다.
이게 아닌가?
하지만 일상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보라고 하지 않았나?
리사의 고민이 잠깐 깊어질 무렵 이엔은 리사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전... 오늘 전하의... 아니. 대공마님의 호위기사로 임명받았고, 대공저에서 정말 좋은 방도 받았습니다. 마님의 방과 조금 떨어져 있지만 최대한 가까이 배치된 방이라더군요.”
“호위기사라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좋은 방이라니 다행이네.”
“그리고... 리사님을 기다렸습니다.”
“!!!”
“마중을 해드리고 싶었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이엔의 볼에 붉은 홍조가 올라왔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가득이었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듯 보이는 미소가 그의 입가를 장식했다.
리사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작은 고동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이엔의 그 미소만을 바라보았다.
이엔은 제게 집중하는 리사의 시선에 당황스러운 눈으로 시선을 내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기에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제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엔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리사는 그런 그의 볼에 손을 올리고 그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이엔의 눈이 커졌다.
“리사님..?!”
“고개 들어.”
“.....”
“나랑 있을 때 눈 내리거나 고개 숙이면 죽인다.”
“.....”
“그리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
달빛을 받은 리사의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담겼다.
이엔의 시선에 정확하게 박힌 그 미소가 그의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고 이엔은 오늘도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리사의 마음도 소리 없는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