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북부에서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루스벨라와 데니스가 머무르던 남부의 리스냐는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쨍쨍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리스냐를 찾아온 사람들은 물속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이고, 도련님 내외께서 벌써 수도로 돌아가야 할 날이 오다니.”
지아나가 아쉬움에 푹 절인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 데니스와 루스벨라는 수도에 있는 데벤테르 가의 저택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이미 짐도 다 제 손으로 하녀들과 꼼꼼히 싸 두었건만 지아나는 그들이 조금 더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후작 가에 속한 영지의 하녀장이 원한다고 해서 바뀔 일정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도 서먹한 기가 남아 있는 작은 주인 부부를 보면 옆에 있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리스냐에서의 마지막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지아나의 얼굴이 헤어지는 일에 대한 미련으로 얼룩덜룩했다. 하녀들도 정성을 담아 루스벨라가 떠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오늘 요리사가 준비한 식사도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주방장이 시키지도 않은 빵 반죽을 허전함을 채우고자 주물럭거리는 지아나의 씁쓸함은 되레 커져만 갔다. 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다니는 포션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거렸다. 루스벨라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작은 마님께서 수도로 가시면 잘 버티실 수 있을까.”
이곳은 리스냐. 데니스의 어머니이자 데벤테르 후작 부인의 영역. 이곳의 사용인들이 두 사람을 환대했던 건 상냥했던 후작 부인의 아들 내외인 만큼 살뜰하게 보살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도는 다르지.’
데니스가 아무리 기세등등하던 이복동생인 두 사생아와 그들의 어미인 정부 둘을 쫓았다고 해도, 아버지인 후작이 남아 있었다.
데벤테르 후작은 갑작스럽게 단기간에 변한 데니스의 모습에 크게 놀랐고, 노했다. 적통이 멀쩡해졌으니 후계자의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자신이 아끼던 아들들이 내쫓기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지아나는 데니스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루스벨라였다.
이 혼사를 결정한 것은 데니스였다. 그의 독단적인 결정에 후작은 이때다 싶어 아들에게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대로 처신도 똑바로 하지 못해서 파혼당한 여자를 집안에 들일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아휴. 후작님 성질을 루스벨라 님께서 감당하실 수 있을지…….”
지아나는 답답한 가슴 대신에 빵 반죽을 밀대로 퍽퍽 내리치며 걱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었다.
지아나가 불쌍한 빵 반죽을 괴롭히는 동안 데니스 또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리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채비를 하고 식당에 내려가는 동안 데니스의 정신은 이곳에 아니라 수도의 후작 가문에 가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결혼식이란 참 슬프기도 하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목소리에 고성을 지르는 후작의 얼굴이 섞여들었다.
[네가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네 뜻대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너는 내 아들이니까! 그리고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 바로 너니까! 흠결이 있는 사람을 가문에 들일 수는 없다.]
[그럼 저도 진작에 내버리시지 그러셨습니까.]
[뭐, 뭐야?]
[저는 제가 아파서 숨이 넘어갈 적의 일을 아주 생생히 기억한답니다. 아버지께서는 벌써 잊은 겁니까? 몰래 집무실에 들렀다가 골치 아픈 애물단지가 된 저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민이 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렇게 말했더니 부들거리는 생물학적 아버지는 뭐라 답했더라.
[그래도 난 네 아버지고, 너는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이어받지 못해!]
결국 끝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명심하라는 협박이었다.
후작도 알고 있는 거다. 데니스가 이미 가문을 장악했다는 것을. 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속도로 아주, 빠르게.
“어차피 얼마 못 가실 텐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선의를 베푸는 것이 후작에게도, 데니스에게도 좋을 일이겠지만 그 고약한 양반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를.’
데니스가 정나미가 떨어진 아버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기도는 이것뿐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가 끝난 터라 데니스에게는 정을 둘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데니스.”
“좋은 아침입니다. 루스벨라.”
데니스가 루스벨라를 향해 환히 웃었다.
그늘이 깊을수록 더 빛을 환하게. 그게 데니스의 철칙이었다. 그늘이 깊어져 빛을 삼키지 못하도록. 다시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아픔 따위를 겪는 일이 없도록.
‘당신만큼은 내가 지켜 줄게요.’
나의 소중한 사람. 내가 지켜야 할 나의 은인.
‘설령 걸어야 하는 것이 나의 목숨이 된다 하더라도…….’
이 사람을 지켜야지.
절박하고 비장한 속내와 다르게 얼굴은 수없이 연습한 만큼 활짝 펴져 루스벨라를 맞이했다. 루스벨라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다.
“주방장이 오늘 아침은 특별한 만찬으로 준비했다고 했어요. 천천히 많이 먹고, 게이트를 타러 가요.”
“지금까지 먹은 음식도 훌륭했는데…… 떠나면 이곳에서의 식사가 정말 그리울 거예요.”
“다시 찾아오면 됩니다.”
“다시…….”
확고한 데니스의 말과 다르게 루스벨라의 말은 흐릿해졌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결혼 생활이 지속된다면 그렇겠지.
데니스와 루스벨라의 사이는 로네와 잭슨을 만난 이후 미묘해져 있었다.
루스벨라로서는 접점이 없었던 데니스가 자신이 원한다면 발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헌신적이니 고마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인물들을 더 잡기 쉽게 조치한 것을 상세히 알려 주었지만, 정작 데니스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을 꺼내는 적이 없었다.
‘원래는 결혼 상대가 누가 되었건 간에 일정한 때가 되면 도망치거나, 이혼을 제안할 생각이었는데.’
그것보다 지금은 데니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궁금했다. 자신에게 대가 없는 사랑을 화수분처럼 베풀고 있으니 고도의 사기꾼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데니스.”
“네.”
“당신 정체가 뭔지 이제 말해 줄 수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내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지라도 알고 싶어요.
루스벨라는 마지막 한 입을 남겨 두고 데니스에게 질문했다. 수도로 간다면, 그들은 법적인 부부로 인정받기 위한 결혼 서약서를 쓰게 된다.
그걸 쓰게 되면 정식으로 그녀는 데벤테르 소후작 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지펠론의 성을 버리고, 완전히 후작 가문의 사람으로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결혼 서약을 앞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니까.’
성이 바뀐다는 일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수도에 올라가기 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꼭 받고 싶었다.
데니스는 조금 난처한 빛을 띠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에 대해 의심하시고 계시는군요.”
의심당하는 사람치고는 몹시 평온한 반응이었다. 데니스의 이런 점이 루스벨라는 신기하고, 또 이상했다.
루스벨라가 갑자기 울며불며 화를 내더라도 데니스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줄 것 같았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당신은 마치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여유로운데,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당신이란 사람이 내게 얼마나 극진한지만 알고 있지요.”
“잘 아시는군요. 그것만 아셔도 충분하긴 하지만요.”
“충분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과 동등한 처지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나만 당신에 대해 모른다는 건 불공평해요.
불만에 찬 포크와 나이프가 쨍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야기해 줘요. 어떻게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죠? 당신과 내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우린 정말 결혼식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어요.”
루스벨라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 단어를 발음했다.
“페이.”
그녀가 윈체스터 공작 성에서 쫓겨난 이후 밤에만 만날 수 있었던 신기루 같은 소녀의 이름이었다.
당시 루스벨라는 우울과 절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페이가 떠난 뒤에야 그 아이가 자신이 만든 환상이나 전설 속 요정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측만 했다.
‘페이도 금발에 붉은 눈을 가졌어.’
동일인이라기엔 성장 속도가 도저히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데니스가 훤칠한 키와 허우대를 지녔기에 그 가설은 접어뒀다. 하지만 친척 중에 페이가 있고, 그 아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페이라는 아이 알아요? 키는 나보다 작고, 몹시 사랑스럽게 생긴 여자아이인데.”
눈칫밥을 빌어먹으며 산 세월이 길다 보니 루스벨라는 다른 사람의 작은 변화를 잡아내는 버릇이 있었다. 데니스는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살짝, 아주 살짝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저건 무슨 뜻일까?’
내가 알아맞혔다는 뜻일까, 아니면 곤란함에 애써 짓는 미소인 걸까?
“누군가요, 그 아이는? 그런 아이는 모릅니다. 그 아이가 소중한 사람이었나요?”
김이 새는 답변이었다. 데니스는 페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체했다.
“어머니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가면 오는 것도 있어야죠. 힌트 좀 주세요. 페이와 당신이 정말 아무 관계도 없는 거 맞아요?”
루스벨라는 끈질기게 데니스에게 매달렸다. 무언가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관계도 없진 않습니다.”
역시!
루스벨라는 이제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횃불을 켠 원시인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요. 난 누군가와 ‘약속’을 했거든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목이라도 걸었어요?”
루스벨라가 처음으로 데니스에게 농담을 던졌다. 다소 과격한 내용이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곧 후작이 될 사람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니. 금언 마법이라도 걸었다는 것인가.
“비슷하네요. 그만한 대가를 걸었습니다.”
장난으로 던진 말에 사람이 죽는다더니. 대답하는 데니스는 섬뜩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평온해 보였다.
“……진짜 당신 뭐예요? 사람은 맞죠?”
“당연히 저는 사람이죠. 베면 피가 나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인간이랍니다.”
데니스는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루스벨라는 일부러 그가 자신 앞에서는 일관되게 상냥한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푸른 수염의 집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니죠?”
“맹세컨대 전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반대죠. 당신이 나를 해친다고 해도 난 당신의 칼날이 날 찌를 때까지 아무렇지 않을 겁니다.”
“살벌한 말은 그만둬요. 내가 당신을 왜 해쳐요?”
“없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도 않을 거고요.”
너무 알쏭달쏭했다. 가장 어려웠던 교양인 고대 사람들의 시구를 해석하는 일만큼이나 데니스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데니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면서 루스벨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은 말해 줄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 제가 당신께 털어놓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거예요.”
“그거 믿어도 되는 건가요?”
“난 당신에게 절대 거짓은 털어놓지 않아요. 아까 물어본 것처럼 목이라도 걸까요?”
장난이었을 뿐인데. 정말 목을 걸 리가 없는데.
한없이 고통에 차 있는 얼굴을 보았다. 아주, 짧게.
“하지 마세요.”
그와 마주하면서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딱딱하게 굳고 성난 대답이 들려왔다.
“……데니스?”
“절대 그러지 마세요. 당신이…… 희생되거나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가 심장께를 붙들었다. 표정은 누가 올가미라도 걸어 목을 죄는 것 같이 일그러졌다. 반짝이는 물방울을 눈가에서 얼핏 발견한 거 같았다.
“제발. 약속해 줘요.”
루스벨라는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그가 숨이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할게요.”
“고마워요.”
그는 대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 한 것일까.
또 새롭게 추가된 궁금증을 물어볼 새도 없이 게이트를 타러 갈 시간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