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늦은 후회는 사양입니다-27화 (28/166)

27화

보고서를 뒤지던 아슬란의 얼굴이 활자를 읽어 내릴수록 굳어졌다. 쓰여 있는 내용의 항목 하나하나가 경악스러웠다.

시작은 아슬란이 루스벨라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원인이었을 거라 서술되어 있었다.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죄다 모함과 계략과 질투로 인해 빚어진 촌극이었다. 루스벨라가 아니라, 아슬란 그가 익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북부 사교계에서 배척당하게 된 계기는 자작극이었고, 성안에서 하급 사용인들에게까지도 무시를 당하며 포션을 제작한 일을 아무도 몰랐던 것은 그들이 암묵적으로 수도의 이방인을 받아들이기 싫어서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슬란이 마음에 걸렸던 무도회의 일마저 피해자인 줄 알았던 아슈라 영애가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과 입을 맞춰 짠 거짓 소란이었다.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루스벨라의 결백을 말해 준 제보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해 준 말들이었다.

귀족의 이름은 없었고, 그녀를 핍박한 집의 시종들이 많았다. 귀족들의 치부는 그 댁에서 부리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었기에 성씨가 없는 이름만이 칸을 채웠다.

물론, 공작 성의 사람들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슬란은 그것을 보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제가 조사한 것만 해도 그 정도였습니다.”

아마 뒷조사를 더 하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올 겁니다.

“이보다 더 많이?”

축약해서 카테고리를 묶어 설명이 나와서 그렇지, 해당 항목별 사건은 자잘하게 개수가 많았다. 무슨…… 이쯤 되면 루스벨라가 몇 년이나 약혼녀로서 버틴 게 용했다. 성녀의 마음으로 참은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는 북부의 차가운 사람들 속에서 얼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빗속에서 매몰차게 애원하는 손길을 뿌리쳤지. 더는 날 실망하게 하질 말라는 소리나 내뱉으면서.

북부의 봄은 짧다. 아슬란이 루스벨라를 내친 날은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는 눈보다 보기 귀하다고 해서 북부인들은 비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런 비가 잘 내리는 계절인 봄에 태어난 아슬란은 영지민에게 특히 사랑받는 존재였다. 신께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낯간지러운 미신의 덕이 컸다. 드물고 귀한 것은 사랑받으니 사람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아슬란은 영지민에게, 북부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런 축복받을 비가 내리는 날, 겨울에 태어난 루스벨라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비웃음을 사며 쫓겨났다. 북부를 대표하는 그가 놀랍도록 친절히 그녀를 잘라 냈다.

루스벨라의 기억 속에 이제 비가 내리는 날은 악몽으로 평생 남게 될 것이다.

아슬란의 일생은 영롱한 유리구슬 같은 것이었다. 그가 오냐오냐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존경과 신의를 발아래에 깔고 가는 삶은 빛 아래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그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동안 한 소녀의 마음은 무자비하게 짓밟혀 스러졌다.

“나는…… 내가 어떻게 했어야…….”

눈앞이 아찔해진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잔상이 남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슬란이 만든 환상 속 루스벨라가 닫힌 눈꺼풀 사이로도 침입하여 그에게 묻고 있었다.

‘나한테 그렇게까지 잔인했던 이유가 뭐였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았지? 그런데 당신은 나를 외면했지.’

“아니야…… 나는…….”

이것은 아슬란이 만든 환상이고, 실제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 분노에 찬 형상은 그를 해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루스벨라의 모습에 심장이 조각나는 고통을 느꼈다. 그럴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랐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무지도 죄였다. 아슬란은 루스벨라에게 되돌릴 수 없는 뼈아픈 실책을 저질렀다.

그녀는 그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약혼자로서 지켜 주지 못한 마음의 상처에서 흐른 핏물은 얼마나 무거울까?

아슬란이 다시 눈을 떴다. 괴로운 환상이 서린 어둠 대신에 변하지 않는 현실을 마주했다. 조사 결과에 충격받은 이는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시온이 잔뜩 짓눌린 목소리로 고했다.

“주군.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것도 그나마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아무 죄책감 없는 자들이 털어놓은 극히 일부의 이야깁니다. 실제로 지펠론 영애가 이곳에 계셨을 때 겪은 고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했을 거라 봅니다.”

“…….”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오나, 영애께서는…… 학대를 받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 공작 성 전체가 가해자입니다. 아니, 북부 전체가 그분을 적대했다고 보는 게 옳겠죠.

‘가해자라.’

아슬란은 그 말에 고개를 떨궜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죄의 무게가 그의 두 팔과 다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자랑으로 여기고 한 몸이나 다름없이 아끼던 북부는 이다지도 한 사람에게 차가울 수 있는 땅이었다.

뭐가 잘못된 줄도 모르고 걸어온 시간이 후회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쏟아진 물은 바닥에 흘린 물을 닦아서라도 되돌릴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녀에게는 영락없는 가해자겠지.’

“……시온, 보고를 계속해라.”

“더 들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는 말은 죄인인 내게 과분한 것 같다만.”

나보다는 그녀에게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라며 아슬란이 속히 보고를 이으라는 손짓을 했다.

“……주군께서 꼭 그분의 결백을 밝힐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미 거짓이 포진한 상태입니다, 주군. 검게 오염되어 있는 하수를 깨끗하게 정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사람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주군께서 그분의 무고함을 주장하시다가 오히려 해를 입을까 저어됩니다.”

시온은 주군인 아슬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슬란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의 발언은 수하로서는 완벽하였으나 인간으로는 옳지 못했다.

“네가 무엇을 우려하는 것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루스벨라가 아슬란의 약혼녀일 적에 그녀를 괴롭힌 자들은 북부 전체의 귀족들이었다. 아슬란이 몰랐을 뿐, 그 귀족들은 루스벨라를 괴롭힌 공범이라는 이유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데 북부의 수장인 아슬란이 전 약혼녀에 대한 무례를 책망하고 처벌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가 없으니 모두가 손해를 봐야 했다. 그들이 행동해도 된다는 이유의 근거를 준 공작가가 그동안의 태도를 정정한다고 해서 쉽게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잘못한 게 없다고 뻗대고, 공작 가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면 모를까.’

아슬란은 시온이 걱정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사과하기 싫은 북부 귀족들의 반발은 곧 윈체스터 공작 가에 대한 외면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윈체스터 가문은 산하에 둔 가신들이 가장 많기에, 그리고 공작 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장 노릇을 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노리고 다른 가문이 세력을 모아 북부의 새로운 패자로 나설 기회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민심이고, 지역별 수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 지역 유지인 귀족 가문의 지지를 얻어 내는 것이었으니까.

유구한 역사의 공작 가문인 만큼 타격을 입어도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깎여 나간 위신과 명예, 실질적인 영향력을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니 시온으로서는 말리고 싶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잘못한 일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슬란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외면할 자신이 없었다.

“주군!”

“그래. 실리적인 부분을 따진다면야 윈체스터 공작가가 그녀에게 허리를 굽힐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어린 나이에 공작이란 무거운 작위를 받으며 다짐한 것이 있었다.”

“……압니다.”

이성과 철칙, 그리고 정의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의 삶을 걸어간다.

그것이 아슬란 윈체스터의 자존심이자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의 좌우명이었다.

“내가 평생 지키겠다 결심한 삶의 기준을 어기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는 피해를 끼친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겠다.

“주군…….”

“그녀는 나 때문에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다. 용서를 구하기에도 어려운 처지야. 그런데 내가 이제 와서 내 과오를 인정하고 되돌리는 일이 어렵다고 해서 관둔다면, 그건 정말 비겁하고 멍청한 짓이지.”

“주군의 뜻이 그렇다면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고맙군, 시온. 네가 당분간 더 수고해 줘야겠다.”

“맡겨만 주십시오. 주군을 위해서라면 무슨 명이건 따르겠습니다.”

“우선 공작 성의 사람들이 어째서 아무도 루스벨라의 무고를 주장하지 않았는지 낱낱이 파헤쳐서 알아봐 줘.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는 데 가담한 귀족들에게 은밀히 소문을 퍼뜨려라.”

“어떤 내용으로 할까요?”

아슬란은 잠시 고민하다 수첩의 종이를 하나 떼어 만년필로 답변을 휘갈겨 주었다.

“이렇게 전해도 괜찮겠습니까? 주군의 평판이 좋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상관없다. 어차피 진실을 털어놓으면 겪어야 하는 절차야.”

그 종이 위로 쓰여 있는 글씨는 이러했다.

‘윈체스터 공작 가의 가주이자 북부의 수장인 아슬란 윈체스터가 전 약혼녀에게 관심이 없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관심이 있던 쪽은 윈체스터 공작이었고,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약혼녀에게 냉랭하게 굴었다. 한시적인 약혼 관계라 상정했던 그였기에 계획에서 어긋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아주 땅을 치며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시온은 참 길고 자세하게도 적은, 곧 자신이 퍼뜨려야 할 주군에 대한 소문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이걸 사람들이 믿을까요?”

“이 소문을 접하는 사람들 전부가 믿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중화시키고, 초점을 내게로 돌리는 거면 충분하다.”

“그래도 이건…… 주군의 품위가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래 봤자 그녀에게 가는 피해 보다 내게 오는 게 더 피해가 적을 거다.”

난 그걸 노리고 있어.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란 판에 기껏 평판 좀 손상된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아슬란이 자신의 두 손으로 손깍지를 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유로운 말과 달리 깍지를 풀었다 다시 끼는 손에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시온이 물었다.

“선대 공작 부인께서 이 결정을 지지하실까요?”

그 말에 아슬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머니와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야. 시온, 너는 내가 준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 줘.”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주군의 뜻대로 되어 가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명령은 부탁이 아닙니다. 주군께서 명하시는걸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죠.”

“좋게 말하는 거지. 너만 믿으마.”

“예.”

시온이 곧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아슬란은 시온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다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추적거리는 빗줄기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이 풀릴 수 있을까.’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에 빗소리만 남아 휑한 마음을 두드렸다.

찬란한 줄만 알았던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