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단정한 필체로 적힌 이름을 손가락 끝으로 그으며 에르테가 말갛게 웃었다.
흑마법을 한다던 소문에 잭슨, 전 황태자비, 소이트 상단주가 싸고돌았다는 그 벨리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에르테의 어머니, 전 황후가 벨리타를 고립시키려고 했던 것도 같다. 흘려들어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잭슨이 파텔 후작가와 긴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염려했었다. 워낙 파텔 후작이 유능하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여식을 고립시킬 필요가 있나.
에르테는 벨리타의 인적사항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아마 잭슨과 각별한 사이라고 했으니 벨리타를 흑마법사로 몰아가 불명예스럽게 사형시킨 후, 연관성을 제시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가까운 사이인데도 흑마법을 사용하는 걸 몰랐느냐고. 황태자가 흑마법사를 두둔한다고 평판을 떨어트리려고 했거나 어떻게든 엮어서 함께 사형시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에르테는 문서를 넘기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성공할 수도 있었을 일이다. 소르니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았다면 분명 귀족들 사이에서 의혹이 제기됐겠지. 전 황후가 염두에 두지 못한 건 이기적인 소르니가 직접 나서서 구설수를 잠재웠다는 점이다.
단두대에 오를 잭슨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벨리타의 정보를 대충 다 읽은 에르테가 테이블에 문서를 던져놓았다. 당장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들이 여러 개다. 시시해서 문제지.
생각을 거듭하던 에르테가 체르핀 공작을 보았다. 잭슨을 사소하게 골치 아프게 하면서도 확실히 발목을 붙잡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공작. 황태자비였던 네 여식은 어쩔 예정이야?”
두서없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체르핀 공작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주먹을 꽉 쥔 체르핀 공작이 씹어 뱉듯이 대답했다.
“폐하가 봐주고 있으니 건들 수 없지만, 죽여야지요.”
확실한 세력을 만들려는 듯, 잭슨은 소르니뿐만 아니라 뒷골목 길드장에게도 작위를 내려줬다. 천하고 천박한 용병 따위가 귀족이 되다니.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상냥하게 눈웃음을 짓던 에르테가 쾅,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겨우 아물어 가던 손등의 상처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체르핀 공작이 깜짝 놀라자, 에르테는 격노한 채 마구잡이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이 휘청거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누가 폐하야? 황제는 나야, 나라고! 감히 누구더러 폐하라고 지껄여!”
살의에 번뜩거리는 붉은 눈을 보자, 체르핀 공작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눈을 본 적이 있다.
황위 문제로 늦은 시각에 잭슨과 비밀스러운 논의를 진행하던 중, 황후가 고용한 암살자를 잭슨이 단번에 베어 죽였을 때였다.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에 살기가 어리는 걸 본 순간, 체르핀 공작은 잭슨이 두려웠다.
같은 핏줄이라고 이런 미친 눈깔은 빼다 박았다. 체르핀 공작이 분개한 에르테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에르테는 테이블의 다리를 걷어차고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집어 던졌다. 살벌하게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체르핀 공작은 에르테가 진정 황제가 되어도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그래도 난폭한 것 외에는 정치 분야에서는 무지한 황자니까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파텔 후작도 에르테의 편에 섰지. 귀족들이 속살거리는 대로 넘어가 버리는 멍청한 사람이다.
후, 검은 머리카락을 한숨과 함께 쓸어 올린 에르테가 해사하게 웃었다.
“황제는 나인데 형에게 그런 존칭을 쓰면 무척 서운해, 공작. 그래,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네 딸을 죽이고 싶다고 했던가?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를 발로 밟아 짓뭉갠 뒤, 에르테가 멀쩡하게 남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거만하게 늘어진 채 입을 열었다. 분명 재미있을 거야.
*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오웬을 데리러 문을 벌컥 열었다. 데이비드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으니 오웬이 빠질 수 없다는 게 벨리타의 의견이었다. 데이비드와 오웬이 워낙 잘 지냈어야지.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라 밝아야 하는데 연구실 내부는 어둑하다. 커튼도 잘 걷었는데 어두웠다. 분명 볕이 잘 드는 방인데.
벨리타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내부를 살펴봤다. 어두웠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방 주인이 어두워서 그런 것 같다. 어둠의 자식이야, 뭐야.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펜을 빠르게 휘갈기고 있는 오웬에게 다가갔다. 관리하지 않아 덥수룩한 보라색 머리와 제대로 잠그지 않은 셔츠, 벨리타가 선물한 안경까지 끼고 있다. 잘 쓰고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오웬의 뒤에 선 벨리타가 어깨너머로 오웬이 적은 글을 읽어 봤다. 마법을 여러 종류 할 수 있게 된 벨리타였지만 오웬이 적은 술식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딸이 고3 때 한창 매달렸던 수학을 본 기분이다.
먹고 하라며 과일을 주면 막 들어오지 말라고 화를 내던 딸.
그때는 예민한 시기이니, 섭섭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조금 더 챙겨 줄걸. 더 맛있는 걸 챙겨 주고 더 좋은 옷을 입혀 줄걸. 더 좋은 학원을 보내 줬어야 했는데.
그리움이 남는다. 아직 괴롭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천천히, 바위가 돌멩이로 깎여 나가듯 고통은 갈려 흩어질 거다.
그러니 괜찮다. 언젠간 추억으로 남을 기억이다. 벨리타가 오웬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드레스가 더러워져도 괜찮았다. 오웬이 마법으로 깨끗하게 해 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사각거리는 펜의 소리.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잉크가 휘저어지는 소리와 오웬의 숨소리.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
사랑하는 사람이 내는 소음이 감미롭다.
아, 무겁고 단 향이다. 훅 끼쳐오는 내음에 벨리타가 눈을 떴다.
“뭐해? 이러고 앉아서. 어디 아파?”
오웬이 몸을 숙이고 벨리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경 잘 어울린다. 단정한 얼굴이라서 그런지 둥그런 안경이 무척 사랑스럽게 어울렸다.
벨리타가 오웬의 안경다리에 손을 얹었다. 오웬이 걱정하며 벨리타의 어깨를 고쳐 쥐었다. 빠르게 상태를 훑어보는 시선이 바쁘다. 벨리타가 환하게 웃었다.
“안경 잘 어울린다. 너무 예뻐.”
“내가 언제는 안 예뻤나. 너 어디 아파?”
예쁘다는 칭찬도 당연하게 받아넘긴다. 너무 칭찬을 자주 해 줘서 이제는 감흥도 없나. 좀 더 수줍어하는 맛이 있어야지.
벨리타가 불만스러운 낯으로 오웬의 뺨을 잡아당겼다. 오웬의 볼이 늘어난다. 늘어난 만큼 발음도 질질 샜다.
“으드 으프느그.”
“나 안 아픈데? 갑자기 왜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하게 대답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웬이 갑자기 과한 걱정을 한다는 듯이.
오웬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볼을 잡아당기는 벨리타의 손을 앙, 무는 시늉을 했다.
벨리타가 까르륵 웃으며 황급히 손을 뗐다. 오웬은 가끔 벨리타가 힘겨워하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불안해하곤 한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겠지.
“머리 좀 봐. 이게 뭐야. 좀 빗고 그러지.”
덥수룩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겨 주며 타박했다. 벨리타가 빗겨 주는 대로 머리가 차분하게 정돈된다. 가만히 벨리타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던 오웬이 장난스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빗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안 씻어도 마법으로 순식간에 깔끔해진다? 효율 최고지? 머리 냄새 맡아 볼래?”
“으악, 더러워. 저리 가!”
“왜애. 머리 냄새 맡아 보라니까? 여기, 여기.”
오웬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깨끗하기는 한데 씻지 않았다고 하니 냄새는 물론이요, 만졌던 손도 씻고 싶어졌다. 벨리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웬이 꿋꿋하게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꿍, 벨리타의 주먹이 정수리를 내리쳤다. 오웬이 벨리타의 품으로 고꾸라진다.
“억……. 폭력 반대…….”
“세상 어떤 애인이 정수리를 들이대냐! 주둥이도 아니고!”
반사적으로 오웬을 끌어안은 벨리타가 성질을 내며 소리쳤다. 입 냄새를 맡으라고 들이대도 화가 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정수리에 뽀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볍게 오웬의 등을 두드렸다. 가만히 안겨 있던 오웬이 고개를 들고 벨리타와 눈높이를 맞췄다.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낸 오웬이 해맑게 묻는다.
“그럼 입 들이대면 냄새 맡아 줘?”
“너 진짜 무드도 없어서 짜증 난다. 뽀뽀해 달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흐응. 오웬이 콧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뽀뽀해 줘.”
이 말 하려고 큰 그림 그린 거냐. 벌써 입술로 마중을 나온 오웬을 쥐어박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벨리타가 주먹을 내려놓았다.
오웬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흔들며 교태를 부렸다. 예뻐서 봐준다, 진짜.
오웬의 얼굴에 유독 약한 벨리타가 오웬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쪽,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오웬이 만족한다는 듯 말갛게 미소 지었다.
“우리 자기 화끈해서 멋져.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왔어?”
“데이비드가 왔거든. 같이 저녁 먹자고 하려고 왔지.”
“데이비드가?”
그렇구나. 중얼거린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나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힘도 들이지 않고 번쩍 벨리타를 들어 올린다.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선 벨리타가 치맛자락을 털어내고 앞장선 오웬을 따라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데이비드와의 식사는 평화로웠다. 어색하지 않았고 대화도 잘 통했으며, 앞으로의 계획도 논의했다.
데이비드는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영지에서 지낼 거라고 했다. 결혼은 정세가 안정되고 난 후에 생각해 보겠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오웬은 데이비드에게 대놓고 처남이라고 불렀다. 데이비드는 체념했다.
고용인을 늘리겠다는 벨리타의 계획을 들은 데이비드는 너무 성급하게 일을 벌이는 게 아니냐며 의견을 내놓았다.
벨리타는 완고하게 이미 큰 상단인데 그만큼의 인력은 있어야 한다며 반박했다.
오웬은 조용히 관망하며 식사를 즐겼다.
“내일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같이…… 가실 생각은 없으시겠죠.”
“여기 있어야지. 상단도 다 여기 있고 가게도 열 건데.”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데이비드가 입을 달싹거렸다. 몇 번이고 주저하며 할 말을 고르자, 벨리타가 뒈지기 싫으면 빨리 말하라고 독촉했다. 데이비드가 겨우 말을 꺼냈다.
“편지…… 하십시오. 누님이 사고를 너무 많이 치셔서 전서구로는 부족합니다.”
“아씨, 그 주둥아리를 확 그냥.”
누님이랑 편지하고 싶어용, 하고 착하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벨리타가 숟가락을 들고 데이비드의 입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데이비드가 질색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도 벨리타의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기에, 벨리타가 냉큼 고개를 끄덕거리곤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수줍게 기뻐하는 데이비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열심히 놀려 줬다. 오웬과 벨리타의 놀리는 목소리가 하모니처럼 식당을 채웠다.
*
데이비드가 떠나고, 벨리타의 전속 세무사, 전문 경영인이 고용되었다. 비서의 능률도 좋아져서 벨리타가 할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릴페트 자작과의 거래도 잘 진행되고 있다.
일에 치여서 온종일 일만 했던 벨리타는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슬렁거리며 상단을 드나들고, 인테리어 시공을 하는 건물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벨리타가 할 일이라곤 최종 서류를 훑어보고 도장이나 찍는 것뿐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상단에 기웃거리다가 케린이 쫓아내서 길바닥에 서 있는 벨리타를 거두어 간 건 소르니였다. 남작 영애가 연 티파티가 근처라면서 배나 채우러 가자고 마차에 짐짝처럼 실어 버렸다.
그래서 벨리타는 한참 어린 핏덩이들과 하하 호호 웃으면서 차를 홀짝거리게 됐다.
외견으로만 보면 벨리타는 그들과 동년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어느 가문의 영식이 잘생겼다고 떠들고, 이름도 모르는 영애가 파티에서 그 영식과 춤을 췄다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영식의 전 애인이 나타나서 깽판을 쳤다는 치정극은 없는 거야? 벨리타가 조용히 마들렌을 입에 물었다.
모임의 주최자인 마리제가 벨리타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벨리타 영애께서 와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워낙 비밀스러운 분이시니까요.”
뭐지? 초대도 하지 않은 자리에 왔다고 시비 거는 건가?
마들렌을 전투적으로 베어 문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소르니의 눈도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