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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26화 (126/150)

126화.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벨리타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우는 데이비드의 머리를 대충 마저 쓰다듬어 준 벨리타는 곧바로 문서를 확인하고, 릴페트 자작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휘갈겼다. 더는 할 이야기도 없었고, 울음을 달래 줄 사이도 되지 못했으니까.

물론 데이비드라고 벨리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우는 자신을 달래주길 바랐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투박한 말투로 타박해 주길 원했다. 바람과 다르게 벨리타는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괜히 서러운 감정이 느껴져서, 데이비드가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어떤 말을 했지?

옛날에는 단둘이 차를 마시며 종일을 떠들었는데도, 한번 멀어지고 나니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다.

데이비드가 책상에 기대어 서서 한참이나 입을 어물거렸다.

벨리타가 문서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키가 큰 데이비드가 가까이 붙은 탓에 시야에 그늘이 져서, 글을 읽는 데 거슬린다.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위에서 들리는 콧물 먹는 소리, 입이 달싹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신경질적으로 펜을 내려놓은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노려보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할 말을 고르던 데이비드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 뭐해?”

쳐다만 봤는데 귀신이라도 본 양 기겁해서 벨리타는 어이가 없어졌다.

눈을 흐리멍덩하게 뜬 벨리타가 바닥에 주저앉은 데이비드를 흘겨봤다. 데이비드의 얼굴이 창피함에 붉게 물들었다.

“그, 그……. 그게. 그러니까…….”

“그게 뭐.”

“어, 어느 사람이 집무실에 꽃도 두지 않고 일을 합니까?”

벨리타는 데이비드가 미쳤나, 싶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고작 한다는 말이 시비 걸기라니. 부끄러움이 많아서 아닌 척하는 데이비드인 걸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꽃도 두지 않고 뭐하느냐는 타박은 너무하지 않나.

벨리타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자, 데이비드는 고개를 치켜들며 되는 대로 지껄였다.

“정원에 장미가 곱게 피었던데, 그거라도 가져다 두질 않고 뭐합니까? 엘라가 일을 안 하는 거 아닙니까?”

가만히 있는 엘라까지 걸고넘어진다. 벨리타의 어이가 콧구멍 밖으로 튀어나와서 데이비드의 싸다구를 날릴 뻔했다.

벨리타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날씨도 좋고 해도 쨍쨍한데, 등짝을 좀 때리면 먼지가 나오려나. 비 오는 날보다는 많이 나오겠지만.

거만해 보이는 태도로 데이비드를 내려다보던 벨리타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비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욕도 하지 않았고 표정을 구기지도 않았는데도 순간,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하도 등짝을 맞아서 그렇다.

책상을 둘러 데이비드의 옆에 선 벨리타가 쭈그리고 앉았다. 흡사 양아치와 같은 자세였다.

엇비슷해진 눈높이였음에도 데이비드는 벨리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벨리타는 무표정으로 데이비드를 빤히 쳐다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벨리타가 더 무서워서 데이비드는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야. 심심하면 나가서 네 친구랑 땅따먹기나 해. 어디서 시비야, 맞을라고.”

양아치가 맞았다. 벨리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데이비드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툭, 건드렸다.

으레 시비를 걸면 더한 비아냥과 매질로 보답하는 벨리타였기에, 잔뜩 쫄아 있던 데이비드는 되레 안심까지 됐다.

“땅따먹기가 뭡니까.”

“알 게 뭐야. 콱 씨. 나 바쁜 거 안 보이냐?”

긴장이 풀어진 데이비드가 말꼬리를 잡았다. 벨리타는 인상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냈다. 그리 말하면서도 손바닥은 들지 않았다. 주저앉은 데이비드의 팔을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우기까지 한다.

얼결에 연약한 힘에 이끌려 일어난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뭘 보냐며 주먹을 드는 벨리타가 너무도 반가웠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타이밍에 말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데이비드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던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질문에 근본이 없구나.”

“누님만 하겠습니까.”

그건 맞지. 벨리타도 자신의 대화 화제가 이리저리 튀어나간다는 걸 인정하는 편이었다.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비드를 흘겨봤다. 편하게 대해 주니 그새 맞먹으려 드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일부러 더 벨리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고 타박하는 거다. 눈치를 못 챌 수가 없다. 어린아이가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훤히 육안으로도 드러났으니까. 예전처럼 시비를 걸고도 눈치를 살피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책상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은 벨리타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지냈는지 네가 들어도 돼?”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데이비드가 이해한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 연을 끊어 놓고는 근황을 궁금해하는 두꺼운 낯짝을 가볍게 질타하는 것이고, 그나마 잘 지내고는 있지만 꽤 힘들어해서 그 부분까지 들어도 괜찮으냐는 뜻이다.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르다. 데이비드의 입장을 헤아려 주었지만, 서운함은 남아 있는 것처럼.

데이비드가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옹졸한 사람의 마음인지라.

말문이 막혀서 안절부절못하던 데이비드가 돌연 눈물을 터트렸다. 서럽게도 소리 내서 우는 탓에 벨리타도 당황하고 말았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방금까지는 친밀하게 대해 주셨으면서,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십니까…….”

“…….”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폭하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누님도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 제 생각만 하고 몰아붙여서 죄송합니다…….”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벨리타가 입을 달싹거리자 데이비드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서 지레 겁을 먹은 거다.

“저한테는 이제 누님뿐입니다. 가족이라고는 누님밖에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저는 정말…….”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해. 그만 울어. 눈 터지겠다, 인마.”

데이비드는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벨리타가 보기에도 처량해서 다급하게 말을 끊고 데이비드의 손목을 붙잡았다.

데이비드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푸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벨리타가 혀를 차며 데이비드를 질질 끌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데이비드가 은근슬쩍 벨리타의 옆에 달라붙었다. 징그럽다고 밀어내자 데이비드가 서럽게 울면서 매달린다.

귀찮다고 걷어차기도 요원해져서, 벨리타는 포기하고 품을 내어 줬다.

데이비드는 한참이나 훌쩍거린 끝에 다시금 벨리타에게 근황을 물었다. 벨리타가 데이비드와 멀어진 이후로 일어난 사건들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줬다.

잭슨과 소르니에게 벨리타가 아닌 것을 밝힌 일, 잭슨에게 조슈아의 상단을 받은 일과 소르니가 타린과 애정 전선을 타고 있다는 것, 오웬이 소르니의 양아들이 되었다는 사건까지도.

덧붙여서 오웬과 애인 사이가 되었다는 말을 하자 데이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귀던 사이 아니었습니까?”

“엉?”

“예?”

“어?”

아니었구나. 아닌데도 그렇게 붙어서 바퀴벌레 한 쌍처럼…….

데이비드가 부은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벨리타가 해 준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벨리타의 상태가 꽤나 나아졌다.

오웬의 별장에서 몰아붙인 후, 내심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벨리타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다른 곳에 자신의 전부가 있으면 데이비드도 벨리타와 다름없이 행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했던 벨리타였으니, 전처럼 밝아진 모습이 보기 달갑다. 앞으로 큰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네 얘기도 해 보라며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데이비드는 옆구리가 약한 편이어서, 속절없이 찌르는 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바들바들 떨었다.

과하게 반응하지 말라며 벨리타가 등짝을 내리치자, 데이비드는 악 소리를 냈다.

정겨운 매타작이다. 결코 그리울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옆구리와 등을 동시에 문지르는 우스꽝스러운 꼴로 데이비드는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정말 별게 없어서, 벨리타는 친구 좀 만나라며 핀잔했다. 차츰 일상이 돌아오고 있었다.

*

둔탁한 물체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잇달아서 터져 나온다. 악을 쓰는 비명도 간간이 뒤섞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깨부수고 발에 닿는 대로 걷어찼다. 깨진 유리잔이 손등을 긁어 생채기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어 던졌다.

“왜 안 와……. 왜……. 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왜…….”

난장판이 된 바닥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었다. 붉은 눈이 탁하게 번들거렸다.

먼발치에 우두커니 서 있는 호위 기사, 제르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웠다. 제르미는 덩치가 컸지만, 에르테를 두려워했다.

감았던 눈을 뜨니 어느새 에르테가 제르미의 앞에 다가와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끼쳐 하체가 무너질 뻔했다.

그는 붉은 눈으로 제르미의 검은 눈을 응시하다가 돌연 뺨을 내려쳤다. 매서운 소음이 이어졌다.

손등을 다쳐 피가 흐르는 손으로 몇 번이고 제르미의 뺨을 갈겼다.

제르미는 쉼 없는 손찌검을 버티지 못해 뒤로 주춤 밀려났다. 다시 뺨이 맞아 얼굴이 돌아갔다.

제르미의 얼굴이 엉망으로 부어올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던 에르테가 순식간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이렇게 몸이 약해서 어떡해. 제르미, 체르핀 공작이 왜 안 오는지 넌 알고 있어?”

“……모릅니다.”

“그렇구나. 큰일이네. 난 기다리는 거 질색인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에르테가 등을 돌렸다.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아수라장을 가로질러 창문 앞에 섰다. 그리고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화려한 얼굴에 긴 속눈썹의 그늘이 길게 내려앉았다.

지긋지긋한 숲. 조악하고 허름한 저택. 에르테는 몸을 숨긴 이곳이 진절머리가 났다. 겨우 분노를 진정시켰는데 다시 화가 오른다.

에르테가 욕을 읊조린 순간, 열려 있던 방문 사이로 체르핀 공작이 들어왔다.

“에르테 황자님. 오는 길에 사고가 있어서 늦었습니다.”

마차 사고였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낸 사고였기 때문에, 체르핀 공작은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심기가 불편한 건 뒤로하고, 방을 둘러본 체르핀 공작이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숙였다. 한 시간 늦었다고 박살을 내놓은 침실이 참담했다.

체르핀 공작은 유리 파편이 나뒹구는 바닥에 발이 딛기가 무서워서, 더 걷지 않고 자리에 섰다. 에르테가 환하게 웃으며 공작을 반겼다.

“공작, 너무 늦었잖아. 나 화날 뻔했어.”

이미 냈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린 공작이 제르미를 흘겨봤다. 부어터진 양 볼을 그대로 둔 채 우두커니 서 있다. 안하무인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공작은 에르테의 자질을 의심했다.

잭슨의 최측근이었던 공작은 그와 가족의 연으로 묶이고자 했지만 배신당했다. 그 후, 소르니의 파혼이 공작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게다가 잭슨을 가만두면 쉽게 등을 돌릴지 모르는 자신을 죽일 게 뻔했기에, 공작은 에르테의 세력이 되었다.

창문 앞에 서 있던 에르테가 느긋하게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정보는 찾아왔어?”

문 근처에 서 있던 공작이 서류봉투를 꺼냈다. 주춤거리며 유리조각을 피해 다가와서 공손히 내밀었다. 에르테는 예상보다 훨씬 얇은 서류봉투를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굳게 밀봉한 봉투를 아무렇게나 찢어 버리고 안에 담긴 문서를 꺼냈다. 겨우 두 장을 챙기겠다고 밀봉할 필요가 있었을까.

에르테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서를 확인했다.

간단한 초상화와 인적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제국의 흐름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익히 들었을 주인공이다.

암살도 통하지 않고, 전쟁터에 몰아넣어도 기어코 승리를 이끌고 돌아오는 괴물의 유일한 약점.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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