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2화 (102/109)

102화

*

“아주 볼만하더군요.”

디에고가 떠난 자리, 스텔라가 환히 비추네.황금색 드레스에 보석이 자잘하게 박혀 하나의 별이 따로 없어 보이는 스텔라.

“저는 이 테라스 문이 뚫리는 것은 아닌가, 했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얘는 말을 꼭 이렇게 궁금하게 하더라.쿠키 한입 먹고 빤히 보자 그제야 말을 이어준다.

“각하와 영애가 들어가신 이후로 모든 시선이 이 테라스에만 머물렀는데.”

“아마 나가실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탐색당하실 겁니다.”

라며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준다.

“하아.”

내가 워낙 입맞춤할 때 여유가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문 덜커덩, 소리 나지 않았던가.

‘소음 좀 났다고 그러고 있을 거라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겨울바람이 매서워 문이 흔들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보다, 괜찮으신가요.

얼마 전에 라야 자작 영애를 만나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라야 자작 영애, 내가 그 배에 타게끔 중간 역할을 톡톡히 해준 그 친구.지금은 감옥에 있다.넋이 나간 채로.

- 여, 영애.

저 좀 구해주세요.

무사히, 무사히 돌아오셨잖아요, 네?나는 아직 네가 비오첼라 백작의 마차에서 구해져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 저,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너의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나 보구나.

- 영애, 모른다고 핑계 댈 법한 행동은 아니었어요.

저도 몰랐는데, 그런 분이셨군요.무덤덤한 내 목소리가 예상 밖이었는지 주룩주룩 흘리던 눈물마저 멈춘 자작 영애.

- 모르는 게 많으신 것 같아 한 말씀 드리자면.잘게 흔들리는 동공.

- 그냥 책임지시면 됩니다.

영애, 아주 쉽죠?별다른 기대를 하고 만나러 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건에 얽혀 있으니 한 번쯤은 봐야 한다고 여겼을 뿐.

“예, 많이 힘들어하시더군요.”

스텔라가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맞춰왔다.

“본인이 자초한 결과니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말에 깃든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웃음이 났다.

역시 나랑 생각하는 결이 아주 비슷하구나!

“안 그래도 그리 말씀드리고 돌아왔답니다.

알아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입매가 완벽한 곡선을 그렸다.

저것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있을까 싶어 넋 놓고 봤다, 어휴.

“제국 내 영식들이 영애에게 청혼서를 보냈다길래 연회에서 꽤나 바쁘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어, 음.사실 나도 약간.

기대가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뭘 해보겠다든가 누려보겠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아무튼 여태 참석했던 연회랑은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 정도는 해봤다, 이 말이다.

“한데 틈이 없으신 분이더군요, 각하가.”

스텔라가 비웃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원래 신년 연회에는 참석하신다고.”

괜히 쑥스러워 말을 늘어놓자 스텔라의 눈이 반짝인다.

“언제부터 각하가 연회 일정을 챙기셨을까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와인 잔을 흔드는 게 아주 사람 홀리게 생겼다.

그래도 이쯤 되니 나만 놀림받는 게 억울한데.

“그러는 스텔라도 그간 틈 하나 없게 전하를 보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뱅글뱅글 그녀의 손아귀에서 돌아가던 와인 잔이 돌연 멈췄다.

“…예, 시작한 일은 워낙 깔끔하게 하는 편이라서요.”

변명이 궁색하다, 야~언니 말대로라면 이것저것 시작 안 한 게 없던데!

“그럼요, 그럼요.

전하가 아주 칭찬이 자자하시던데요.”

“…칭찬이요?”

어머, 얘 봐라?항상 나보다 어른 같았던 스텔라가 지금은 마치 디에고 생각에 우왕좌왕하던 얼마 전 나 같잖아!그때 참 풋풋했지.

“전하 곁에 스텔라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진심이었다.선택은 두 사람 몫이지만, 그래도 둘 다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스텔라는 대답 대신 아주 예쁜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좀 더 화사해지신 것 같군요.”

어? 어머머! 그걸 또 어떻게!

“여행이 꽤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아, 여행.

여행 좋았죠.”

괜히 식은땀이 나는 것 같네.

내가 요새 너무 그런 쪽으로만 사고가 흘러가는 바람에.바람 빠진 웃음을 날리며 스텔라가 오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뭐든 좋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어흑, 나도 모르게 자꾸 고개가 수그러들었다.*소란한 연회장을 벗어난 응접실.방금까지 앉아 있던 황제 내외가 자리를 뜨고, 황태자와 디에고만이 남았다.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 그 덕에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차마 안 나올 만큼 시달리고 있던 리안이 한숨을 내뱉었다.그래도 좋은 점이 있기는 했다.

비비안을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점점 늘었으니까.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대공의 말에 황태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곧이어 작게 웃은 그가 그리운 눈으로 디에고를 바라본다.

‘어릴 때는 이리 다정한 면이 있었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디에고가 이제 눈앞의 존재에게 저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반가웠다.

“걱정을 다 해주십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네는 것에 디에고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점점 황제 폐하를 닮아가는구나.”

끝내 소리 내 웃은 리안이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는 오늘 새삼 지금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비안이 자신의 곁을 떠나면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는데.

다시는 이렇게 웃는 순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자신이 생각보다 제국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비비안이 좋아서 그녀가 있는 제국을 아끼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제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면 더는 제국 따위 나 몰라라 하게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났었고.그래서는 안 되니까.그런데 여전히 자신은 제 나라가 애틋했고, 더없이 소중했다.비비안이라는 커다란 존재를 마음에서 떼어낸 후 자리한 공허를 메워줄 만큼.

“대공은 대공령과 비비안 중 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에 서시겠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빤히 황태자를 바라보던 디에고가 제 눈썹을 손으로 쓸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둘 다 지키려고 한다는 게, 정답이지만.”

머리 가득 비비안의 웃는 얼굴을 그린 그가 부드러이 웃었다.

“질문의 의도대로 답을 드리자면 비비안입니다.”

대공령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했지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잘해줄 사람이 있을 터였다.하지만 비비안은 아니었다.비비안에게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필요했고.디에고 자신에게도 비비안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디에고의 답에 리안의 마음이 좀 더 맑아졌다.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도 저리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전하, 제게는 비비안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서 원하는 것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리안이 한참을 허공에 시선을 주다가 디에고와 시선을 맞췄다.

“예, 부디 그녀에게 차이지 않으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황태자비나 대공비나.”

“…….”

어이없음이 헛숨으로 터져 나온 디에고에게 선한 미소를 보인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지하 감옥으로 가보시죠.”

지하 감옥.

근래 호황을 누리는 장소였다.

갖가지 이유로 잡아들인 인간들이 가득 차 자리가 모자랄 지경.황태자와 대공이 질척하고 어두운 길을 따라 그들을 확인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비오첼라 백작과 영식은 아직 희망을 지니고 있더군요.

자신들이 곧 나가서 다시 귀족으로서 살 수 있을 거라고.”

무덤덤하게 죄인들에 대해서 황태자가 읊을 때마다 대공의 조소가 깊어졌다.

“다행이군요.

스스로 지옥 속에서 살기를 택하다니.”

그 둘이 이 좁고 어두운 감옥에서 나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후작은…….”

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래도 참 못나긴 했었다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간청하길래 알겠다고 해두었습니다.”

그 뒤로 인기척만 나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벌벌 떨기 일쑤라고.

“또 정작 죽기는 싫은가 보군.”

디에고가 가볍게 말하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드 후작 또한 쉬이 죽지 못할 예정이었다.비오첼라는 희망 고문으로, 데이비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그렇게 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기를 바랐고.

스스로 끝맺지 못하는 철창 안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던 리안이 우뚝 멈춰 섰다.

“이곳이 다니엘 카터, 그자를 가둬둔 곳이지요.”

빛이 닿지 않는 감옥에서도 가장 안쪽, 어둠에 어둠이 덮인 듯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곳.두 사람이 발을 딛고 나서야 불을 붙여 잠시나마 길을 밝힌다.그들이 들고 온 횃불에 창백한 다니엘 카터의 얼굴 위로 불빛이 일렁였다.

차분하게 황태자와 대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목에는 디에고가 그어놓은 자국이 여태 선명했다.

“…사람이 아니니,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 평온한 어조로 디에고가 읊조리자 다니엘 카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그제야 미약한 감정이 비친다.

“너희는 몰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갖춰져 있었으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답게 길러진 주제에 나를 탓할 자격이 있을 것 같나.”

“여전히 개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군.”

디에고의 눈가가 불쾌함과 한심함으로 찌푸려졌다.

“전하, 저희가 사람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자랐습니까.”

대공의 물음에 황태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자신의 불운만이 세상천지에 다라고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잡아먹힌 다니엘 카터.

“아, 그랬나 봅니다.

사람이란 게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기만 하면 다인 줄 아는 것들을 포함한다면야.”

퍽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디에고가 다시 한번 다니엘 카터에게 무감한 시선을 보냈다.지금 자신이 이 꼴이 된 것은 고아라서도, 노예였기 때문도 아니라 그런 헛된 생각으로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것까지 짓밟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마 저자는 평생 모를 터였다.그 어떤 말을 해도 다니엘 카터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황태자와 대공이 멀어질수록 사라지는 빛을 멀거니 바라보던 다니엘 카터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의 이해를 바란 적도 없었고.어둠이 익숙했다.

어차피 자신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울 뿐이라고 생각한 다니엘 카터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