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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1화 (101/109)

101화

*평화로웠다.

너무 침실에만 박혀 있었던 것 같아 정원에 나가봤지만 추웠다.겨울이니 당연했다.

“어후.

춥다, 추워.

마리, 들어가자.”

역시 집이 최고였고, 그중 침실은 더 최고였다.

“아가씨, 대공령은 어떠셨어요?”

“추워, 엄청.

그런데 되게 따듯했어.”

대공저만 나서도 얼굴이 다 얼어버리는 것 같았지만 분명 따듯했다.

수도에 와서 대공령을 떠올릴 때면 그 따스함이 스며들곤 한다.

“오― 좀 더 조사해 둬야겠네요.”

“조사?”

“언제 대공령으로 내려가게 될지 모르니까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마리가 음흉하게 웃었다.

“왜, 왜?”

“글쎄요.

그냥 그래야 될 거 같은 기분이네요.”

호호호, 웃으며 그녀가 디저트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혼자가 되어 대공령에서 보낸 나날을 되새겨봤다.

웅장하게 아름다운 풍경이 많은 곳, 대공만큼이나 중심이 잘 잡혀 있어 마치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안정감이 있는 영지였다.그래서인지 영지민들의 얼굴에 여유가 비치는 것도 참 좋았고.맛있는 것도 많고, 사용인들은 무뚝뚝함 속에 세심한 친절이 있어 더 귀여운 사람들이었다.그리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것.

- …비비안.귓가에 디에고의 긁는 듯한 그때 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화르륵 피어나는 열기와 간지러움에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와, 어떡하지.그러나 한 번 떠오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기억하는 것만으로 오소소, 떨렸다.

“…야했어.”

평소에도 참 야살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진짜 야한 사람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온몸으로 드러내던 밤.다른 사람 같던 눈동자, 지독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 처음 보는 표정.정신없는 와중에 모든 것이 낯설고 자극적이었다.내내 짜릿한 손길과 기분 좋은 나른함에 젖어 내 생애 가장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했던 그날의 새벽.디에고와 만난 이후로 사랑받는 기분을 항상 만끽해 왔지만 그땐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마치 사랑 안에 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자꾸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쯤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시간이 참 빨랐다.

뭐 했다고 또 신년 연회가 열리는 날이 돌아온 거지?

- 이번에 저 가면 신년 연회 때나 뵙겠네요.라고 말하고 돌아왔는데, 어제까지도 디에고가 수도에 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나랑 놀기만 하더니 일이 잔뜩 밀렸었던 게 분명하다.

“신년 연회, 이렇게까지 기다려본 적 없는데…….”

연인 만나기 힘들다.

얼굴 보기 힘들구나, 디에고! 우선 수도랑 대공령이랑 너무 멀었다.마음먹고 아예 오래 머무를 일정으로나 움직일 수 있으니.슈베른 왕국에서부터 대공령까지 내내 붙어 있어서,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그리움을 몰랐다.

“하아―”

“왜요, 아가씨?”

오랜만에 연회 준비로 치장을 돕던 마리가 손은 쉬지 않고 물어봐 준다.

“마리, 연애는 쉽지 않구나.”

지금 약간 얼굴 구긴 것 같은데, 너.

“각하가 못 오셔서 그러세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이 안 났다, 흥이.

혹시 몰라 푸른색 드레스로 준비했더니 더 힘이 빠지는 것 같아.오늘도 연회 내내 춤 한 번 추기 어렵겠구나!치장이 끝나고 소파로 자리를 옮겨 한껏 늘어져 있는데, 열어둔 문 사이로 헐레벌떡 달려온 하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지금 막 대공 각하가 도착하셨다고!”

“뭐? 어디를 도착해?!”

“여기요! 지금 정원 지나고 계신대요!”

맙소사!벌떡 일어나서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었다.탁탁탁―

“아가씨?!”

저택 복도를 지나 뛰쳐나가는 내 뒤에서 마리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안 들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저택을 나가자 바람이 훅 불어온다.

“…춥네.”

로브 하나 입지 않은 몸이 덜덜 떨려오자 살짝 멈칫하게 된다.

“모르겠다.”

냅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 돌아가서 로브 껴입고 하기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저기 있다.’

여전히, 아니 왜인지 전보다 더 훤칠해 보이는 디에고가 걸어오고 있었다.퍽―

“어? …비비안?”

내가 있는 힘껏 그대로 디에고 품으로 돌진한 것은 맞는데 소리가 무슨.멧돼지가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 같았는데.

“보고 싶었어.”

그의 제복 위를 얼굴로 비비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데리러 왔어.”

제 위에 둘러져 있던 로브를 걷어 내 어깨 위로 덮은 그가 날 들어 안았다.

“잘 지냈어, 비비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애정 가득한 얼굴로 내게 돌아왔다.*

“디에고 브라이트 대공 각하, 비비안 윈데이너 후작 영애 도착하셨습니다.”

이렇게 다른 누군가랑 같이 이름이 불리다니.

“들어갈까.”

내 옆에 굳건히 선 디에고의 손에 내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다정한 눈빛에 고갯짓을 하자 내 걸음에 맞춰 그가 발을 내디뎠다.문이 열리고 언제 와도 커다랗고 화려한 연회장이 우리를 맞이했다.한 명, 한 명이 다 색색의 불빛처럼 느껴질 만큼 치장한 귀족들.그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번뜩였다.

“난리가 났군.”

고개를 틀어 디에고를 올려다보자 슬쩍 상체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인다.

“그대와 나의 만남이 꽤나 충격적인가 본데, 다들.

그러니 웃어줘, 비비안.”

“…….”

“저들이 감히 그 무엇으로도 너를 상처 입힐 수 없게.”

그리고 스치듯 내 귓가에 입술을 내렸다 고개를 드는 디에고 덕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지, 지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매와 입꼬리를 휘는 그가 얄미울 정도로 요사스럽다.일련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의 모습을 주시하던 연회장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심지어 그가 웃으니까, 여기저기서 참지 못한 탄성과 웅성임이 터져 나오기를 한참.

“아니, 언제 두 분이.”

“그럼 황태자 전하는 어떻게 되시는 건가.”

“허허, 이것 참.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각하가 저리 웃으실 줄도 아는 분이었나.”

특히 영애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내가 알지, 무표정으로 있어도 사람 마음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외모인데.

웃으면 아예 영혼을 바치고 싶지.안다, 알아.그래도 그런 걸 나만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 보니까, 반성해야지.어휴, 못된 생각! 못된 생각!웃음이 비집고 나왔다.원래라면 내게 향하는 시선에서 이미 한 번 위축되고, 날아오는 칼날들에 헤집어지면서 귀를 틀어막았을 텐데.지금은 그 어떤 말을 들어도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그냥 디에고를 향한 끈적한 눈빛과 욕망 서린 말들이 무척 짜증 나기는 하는데.괜히 더 그의 곁에 바짝 붙었더니 디에고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왜? 쉬고 싶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디에고가 손을 얽어온다.

“가자.

내가 쉬고 싶어.”

성큼성큼 테라스로 향하는 내내 집요한 시선들이 따라왔다.탁―문이 닫히고 커튼을 쳐 시야를 차단한 그가 눈을 감고 내 입술을 머금었다.윗입술, 아랫입술을 할짝이던 디에고가 더 고개를 틀어 깊숙이 들어온다.

밀어붙이는 힘에 내가 뒤로 밀려나자 커다란 손이 뒤통수와 허리를 받쳤다.덜컹―결국 등에 문 위로 드리운 커튼의 감촉이 전해졌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는지 갈급한 입맞춤이 연이었다.

“…숨, 못 쉬겠어.”

간신히 입술을 떼고 속삭이자 그가 공간을 내어준다.이어 나른한 눈을 깜빡이던 디에고가 나를 껴안았다.

“나는 이제 숨이 쉬어지는데.”

나직이 말을 내뱉은 그가 장난스레 내 귓바퀴를 물었다 놓았다.이런 몽글한 감정이 이어질수록 그가 없었던 시간의 설움과 또 떠나고 난 뒤의 쓸쓸함이 같이 커져갔다.

“대공령에는 언제 돌아가세요?”

디에고가 대공령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 없던 시절이 스쳤다.

지금은 여기 있어도 언제 떠날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지는데 말이다.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은데.”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가슴팍에 파묻은 얼굴을 끄덕였다.오래오래 있다가 가라.

나 외롭지 않게.소파로 이동해서도 우린 한 몸 같았다.

한자리만 있어도 충분하네.

허, 참.이젠 습관처럼 그의 허벅지에 얹어진 채 대화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또 어떤 놈이 들러붙지는 않았나, 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럴 리가 있나요.”

공식적으로 확정한 적은 없었기에 내가 예비 황태자비를 안 한다 한들 딱히 공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정황상, 분위기상, 황제의 의중이.그랬던 것이라서.그럼에도 황가의 배려로 더는 그 자리에 윈데이너 후작 영애가 거론되지 않을 것임을 귀족들에게 일러주었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제국을 휘감았다.처음엔 긴가민가 눈치를 보던 사교계가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다.눈을 맞추고 있던 디에고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왜 그렇게 웃니, 너.

“청혼서가 도착했다고 들었어.”

세상에 비밀은 없다.

오늘 여기서 보란 듯이 디에고와 함께했으니 그마저도 이제 끊기겠구나.

“그대에게.

그것도 꽤 많이.”

그래, 디에고 브라이트 대공이 보내온 것만 없다 뿐이지.

“제 대답도 이미 알고 계시고요?”

새침하게 쳐다보자 그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제가 그걸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요.”

아이고.

의미 없다, 이런 이야기.나는 벌떡 일어나 디에고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로 맞닿은 부분 없이.

얼마나 너밖에 안 보이는지.

네가 대공령에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자, 봐라.

“어때요? 뭐가 보여요?”

푸스스 허물어진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낮게 진동하는 웃음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빨개.”

갈증 섞인 탁한 음성에 소름이 돋았다.생각이 빨갛다는 건 대체 뭐지? 내가 모르는 내 무의식이 발현되기라도 한 건가.

“그게 뭐야.”

“잡아먹고 싶어.”

그가 말하는 바의 의미가 열기에 푹 잠긴 푸른 눈동자를 통해 전해졌다.간신히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 사이를 헤집었다.

나른한지 내 어깨에 머리를 부비던 디에고의 귀가 움찔한다.

“같이 살자.”

“풋.”

“왜 웃어? 싫어?”

“그거 결혼하자는 거예요?”

망설이듯 대답을 하지 않던 디에고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찾았다.

곧이어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양 얼굴을 감싸 쥔 채 가볍게 입을 맞춘다.

“결혼이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어줘.”

금방이라도 내 전부를 흔들 것 같은 미소로 디에고가 말했다.

“너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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