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어? 지금 뭐라고……?’
너무 놀란 나머지 찻잔을 쥐고 있던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안에 든 분홍빛 차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럼에도 어떤 반응도 하기 어려웠다.
입술만 달싹이며 리안의 곧은 눈을 마주하지 못한 시선이 하염없이 허공을 맴돈다.
“아직은, 네가 나와 같다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대답은 나중으로 미루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날 좋아한다고? 맞아?혼란스러운데,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무리한 황태자가 찻잔을 입가에 댄다.
그 여유롭고 우아한 동작이 여느 날의 그와 다르지 않았다.
‘…환청? 내가 잘못 들었나 봐.’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슬쩍 고개를 주억거려 보는데, 리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다시금 흔들었다.
“잘못 들은 거 아니니까.
못 들은 걸로 치지는 말고.”
화들짝 놀란 어깨가 들썩였다.호감 정도라고 생각했다.
가끔 남들과 다르게 나를 대하는 것을 볼 때면 혹시나, 하고 여긴 적도 있지만.남매의 정이라, 그리 제 마음과 같을 것이라 바랐다.
‘아, 왜 지금 대공이 생각나는 거야.
지우자.
지금은 아니야.’
이 순간에 그를 떠올리는 내가 너무 파렴치했다.
스스로가 실망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전하…….”
리안의 황금빛 눈동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향한다.
“비비안, 오늘 말하는 게 염치없기는 한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흘린 그가 한 손에 턱을 괴었다.
분명 지금 밤이 내려앉았음에도 황태자는 한낮의 햇살 같다.
“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말이야.”
‘네 생일 가을 아니니……?’
지금은 봄인데?
“생일 선물로 시간을 받아가고 싶은데.
그때까지 답은 유보하도록 하지.”
왜 이러세요? 이런 분 아니셨잖아요.
황태자를 빙자한 다른 사람이라도 온 건가.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이만 가볼게.”
내 옆으로 다가선 그가 홀을 등지고 내 손을 잡아 올린다.
그대로 자신의 입가로 끌고 가 찰나의 순간 입술을 내린 리안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내게 더없이 기쁜 날을 선사해 준 후작 내외에게 감사해야겠군.”
‘누구세요……?’
멍하니 황태자를 올려다보자 그의 시선이 목까지 흘러 내려간다.
“비비안, 언제고 너를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지은 리안이 이내 내게서 돌아섰다.*
“…고백을 받았는데.”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대충 열려 있는 테라스 한 곳을 잡아 곧장 구석으로 내달린 나.
불안과 혼돈에 휩싸인 나머지 어딘가에 홀로 박혀 있고 싶었다.테라스 구석 커튼 너머에 몸을 쑤셔 넣은 채 쪼그렸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나를 좋아한 걸까.
그 시간 동안 괴롭지는 않았나.
내가 쉽게 지껄인 철없는 말들이 바늘이 되어 나를 찔렀다.연애는 왜 안 하냐, 남자 좋아하냐…….
나 너랑 결혼하기 너무 싫다.
이건 정말 이대로 뱉은 건 아니지만 그간 모든 행동이 저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 전하, 남자는 많은데 왜 제 연인은 없을까요?한창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알아가며 주절거린 말…….
- …기왕이면 잘생겼으면 좋겠고, 다정하고.
또 자유로웠으면 좋겠네요.어떤 사람이 좋으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나불대던 입…….
“마, 망명?”
그것밖에 없나.
머리를 올린 덕에 손에 잡히는 머리칼도 없는데 옆통수를 긁어댔다.물밀 듯이 밀려오는 황태자의 다정함이 나를 서럽게 했다.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묻었다.
정말 전혀 몰랐나? 아니, 마음 한구석에서 알았을 거야.
‘내가 무심하게, 얼마나 상처를 입힌 거지.’
그리고 또 어떤 말로 리안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내가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답이란, 어떤 단어를 가져와도 결국 거절밖에 되지 않을 텐데.
‘같은 마음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어쩌면 어느 순간에는 알아주기를 바랐을 텐데.
끝내 알아주지 못하고 외면해서 미안해.탁―
‘응?’
“후작님.”
후작? 그보다 지금 여기 사람 있는데, 모르는 거니?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영애.”
내가 정신없이 들어오느라 사람 있다는 표시를 안 해놨던가? 아, 어쩌지.
여기 이러고 있는 거 들키면 그게 무슨 망신이람.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후작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목소린데.
“아, 그간 비오첼라 백작님과도 왕래가 없었던 터라.”
비오첼라 영애네! 다른 한쪽은 목소리가 젊은데, 후작이라면.
알렌 데이비드인가?데이비드 후작에 대해 찬양하던 비오첼라 영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기억난다.
분명 그전에는 대공이 좋다고 꺅꺅댄 것 같기도 한데.
“예.
종종 저택에 들러주시더니 근래는 통 오시지를 않아서.”
말끝을 늘이는 비오첼라 영애가 서운함을 토로하는 거 같다.
너희 그렇게 자주 만나고 막 저택을 오가는 그런 사이였니?
“그러게 말입니다.
영애가 내어주던 차가 그립네요.”
‘사귀니? 너희?’
따로 사교계 내에서 두 사람의 말은 돌지 않았다.
여기도 비밀 연애였나? 대외적으로는 데이비드 후작가와 비오첼라 백작가 사이에 그 어떤 접점도 없는데.실은 밀접한 관계였다든가.
‘무엇으로? 혼담?’
“얼마든지 내어 드릴 수 있지요.
차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와! 이거 계속 들으면 안 되는 대화 같은데!’
보이지는 않지만 수줍음을 가장한 영애의 대담한 발언에 데이비드 후작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어후, 뭘 기대해!’
다행히 테라스에서 난잡한 행위를 이어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후작의 신경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으니.표정이 보이지 않아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화하는 내내 말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이제 백작님께서 전해주시라 한 것을 볼까요?”
“아, 드려야지요.”
부산한 움직임과 함께 종이가 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다음에 저택으로 찾아뵙도록 하지요.”
후작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지만, 명백한 축객령이었다.잠시간의 정적 이후, 그를 모를 리 없는 비오첼라 영애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찻잎으로 준비하고 기다리지요.
그럼 편히 쉬세요, 후작님.”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끝맺음을 뒤로하고 테라스의 문이 닫혔다.
‘나는 이제 어쩐다.
슬슬 찾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은데.’
“벨리타 상단이라.
들어봤나?”
지금 벨리타 상단이라고 했니?
“최근 비오첼라 백작과 교류가 잦은 자입니다.
왕국 출신의 평민 상단주로 상당한 부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후작 혼자 남은 줄 알았는데, 그 외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늘었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여태 몰랐지?”
비오첼라 영애와 대화할 때랑은 판이하게 다른 어조와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어딘가 음산하고 축축했다.
“왜 내게 먼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인지 모르겠어.
안 그래?”
비오첼라 백작이 왜 후작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거지.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지 그가 백작의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이런 돈놀이밖에 없는 주제에.
근래엔 그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더니 이런 수를 구해왔을 줄이야.”
가관이다.불쌍한 처지의 젊은 후작.
서글서글한 눈매와 자칫 소심해 보일 정도로 순하다던 그가 지금 차지게 남 욕을 하고 있었다.
‘비오첼라의 뒤를 봐주는 게 너였어?’
머리가 복잡해진다.
비오첼라를 잡는다고 일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
이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탁―
‘아……? 다, 다리가…….’
저려오던 다리가 눈치 없이 바닥을 차자 소리가 나고 말았다.
테라스에 서늘한 침묵이 감돈다.
“주인―”
다른 이의 말이 마저 이어지지 않고 끊기자 한 발, 한 발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진다.
‘아, 돈 많아서 테라스 크게 낸 거 정말 다행이다.’
타 저택에 비해 남다른 크기를 자랑하는 덕에 후작이 내게 다가오는 길이 멀었다.비록 소리가 날까 봐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테라스 하나에 홀을 향해 난 문이 두 개나 되니 나갈 구멍은 있었는데.
‘차라리 처음에 냅다 뛰쳐나갈 걸 그랬나.’
이제 정말 가까운지 후작의 그림자 끝이 시야에 잡혔다.벌컥―
“사람이 있었나.”
‘이 목소리.’
멈춰 선 듯한 후작.
새롭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가 내 앞을 막아선다.
“각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오신지 몰랐군요.”
“방금 왔으니 신경 쓰지 말게.
그보다 내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데.”
몸이 안 좋다고 말하는 것치곤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먼저 차지한 사람이 있는 테라스에 느닷없이 쳐들어온 대공이 소파에 앉았다.후작이 주먹을 말아쥐는 것이 그림자를 통해 확실하게 보였다.
“…이만 나가보려던 참이니, 각하께서 쓰시면 되겠군요.”
쟤, 이 악물었다.
자존심이 말도 못 하게 상했는지 후작의 목소리가 잘게 떨린 것 같다.
“혼자 있고 싶으니 후작의 사람도 치워주면 더 고맙겠군.”
잠시 멈춰 서 있던 후작이 이내 몸을 돌려 반대쪽 문으로 향했다.테라스 손잡이에 손을 올린 후작이 고개를 비틀어 웃는다.
“각하, 무엇 때문에 급히 달려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편안한 휴식 되시기를.”
탁―
“하아.”
긴장이 풀려 잔뜩 모으고 있던 무릎을 풀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다리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흐트러진 매무새의 대공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
“말해두겠는데 제가 벌인 일 아니에요.”
‘억울하다.
나도 왜 자꾸 이렇게 온갖 일에 휘말리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몸을 숙여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바닥이 차.”
소파에 나를 내려놓은 대공이 옆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안 보이길래 찾아다녔어.
정원에 서서 비비안한테서 뭐가 흘러나오지는 않을까, 하고 보던 중에.”
‘그런 방법이 다 있네.’
반쯤 감긴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죽음, 같은 단어 떠올리지 마.”
“네? 뭐 그런 게 보였어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죽겠다, 죽겠어.’
라고 생각만 해도 그런 단어가 보인다고?
‘죽음’
이라니, 단어를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엄숙해서 더 섬뜩했다.
“미안해요.
나라도 경악했겠다.”
절로 미간에 주름이 졌다.
몹쓸 짓을 했네! 잘못했네, 내가!
“왜, 여기 혼자 숨어 있었어?”
황태자에게 고백받고 정신이 혼미해서 구석으로 도망쳐 왔다고 어떻게 말해?
‘나는 못 한다.’
“사람들 피해서 좀 쉬려고 했는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드디어 웃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몸도, 마음도 풀어져 노곤하다.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인데…….’
“아! 방금 걔, 후작! 비오첼라 백작의 뒷배 같아요.”
무언가를 가늠하듯 생각에 잠긴 대공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우리 비비안은 뭘 잘 찾아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