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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40화 (40/109)
  • 40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제가 선물한 목걸이를 걸고 맑은 눈을 빛내는 비비안을 보자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네 눈동자를 닮아 그 빛이 사랑스럽던 꽃들 사이에서 달보다 환하게 웃던 모습이 겹쳐지며 마음이 동한다.비록 비비안이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제게 다가와 준 꿈같은 밤, 여태 누르고 있던 것이 뜻하지 않게 그녀에 의해 이루어져 도리어 두려움이 앞섰던 그날 이후.

    ‘…널 만나러 오지 않은 시간들이 의미가 있어야 할 텐데.’

    그때 범람한 욕심이 혹여나 비비안을 두렵게 만들지는 않을까, 추스른 시간이 길었다.닿고 싶은 것을 참던 마음이, 멈추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탈바꿈된 순간이었다.그 뒤로 매일 밤 저를 그리느라 잠 못 이루는 것을 알까.

    “…감사해요.”

    목걸이를 매만지는 비비안의 목이 붉었다.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군.’

    마음을 다잡고자 만나러 오지 않은 시간이 무색하게 몸이 달아올랐다.

    그런 제 상태는 무시하고 다시금 비비안과 목걸이를 번갈아 보았다.분명 조금 화려하다 싶었던 목걸이가 제 주인을 찾아가자 달리 보인다.

    그녀의 색이 더해진 이후 그 빛이 더 은은하고 신비로웠다.살며시 잡고 있던 비비안의 손을 놓고 물었다.

    “생일이 도래하는 밤에는 무얼 했어?”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생각에 잠긴 비비안,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모든 기억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의 형상이 유독 더 짙고 오래 머무른다.

    “피아노……?”

    화들짝 놀란 비비안이 냉큼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또! 또 이렇게 훔쳐본다!”

    당황한 비비안의 얼굴 너머 이제야 시야에 잡히는 피아노.

    저게 이 방에 있었던가.비비안의 것과 같던 여인의 머리 색.

    윈데이너 후작 부인.

    “어머니가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어?”

    놀라워했다가 곤란해했다가,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비비안.

    그리운 기억인 듯싶었다.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로 향하자 불안한 듯 비비안의 시선이 따른다.

    건반을 하나둘 누르자 불신의 음성이 날아왔다.

    “…피아노 칠 줄 아세요?”

    “조금?”

    [조금? 그런데 저 자신만만한 표정 뭔데!]한결같이 내가 제 생각을 본다는 것을 망각하는 그녀 덕분에 숨이 쉬어졌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으니까.피아노 앞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자세를 취하자 비비안의 머리 위로 기대에 찬 반짝임이 흘러나왔다.

    “비비, 너무 기대한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자 단숨에 미간을 구긴다.

    “이쪽 보지 마세요.”

    단호한 음성에 비해 주변이 죄다 꽃과 별과 반짝임으로 가득하다.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

    어릴 적 어머니와 종종 피아노 연주를 하고는 했다.

    바래진 기억 속에서 가장 손에 익은 곡을 찾아냈다.건반 위에 손을 올리자 해묵은 선율과 그리운 이의 모습이 함께 되살아났다.너와 내가 피아노 앞에서 그리는 이가 결국 우리 둘 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그리 빠르지 않지만, 한없이 따듯하고 맑았던 음들이 공간을 메웠다.내가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들려주던 그 마음이 네게도 전해지면 좋겠다.마지막 건반에 닿았던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비비안?”

    “어?”

    단숨에 다가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던 비비안을 막아섰다.

    울고 있었다.

    “…왜? 왜 울어?”

    애처로움이 묻어나는 얼굴이 아팠다.

    “각하가 이걸 어떻게 아세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목이 멘 그녀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이 곡, 정말 생일 전날이면 연주해 주던, 그 곡이에요.”

    “아.”

    꾹꾹 눌러온 그리움이 범람하는 듯 아이처럼 울음을 쏟아낸다.

    “미안.”

    그렇게 품에 안은 비비안이 너무 작아서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쉬이, 괜찮아.”

    천천히 등을 쓸며 토닥이자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어째선지 비비안이 토해낸 그리움에 기대 내가 외면하던 마음도 함께 쓸려간 것만 같았다.온 힘을 다해 울어낸 듯 힘없이 처지는 비비안을 안아 침대에 뉘었다.발개진 눈가를 한 번 쓸고 이불을 덮어 그 위를 도닥 이자 훌쩍임이 잦아든다.

    “어머니가 종종 연주해 주던 곡인데.”

    가만가만 머리칼을 쓸며 말하자 놀란 토끼 눈을 한 비비안이 당황했다.

    “어떻게 두 분이 같은 곡을 즐겨 연주하셨는지는 모르겠군.”

    이 사랑스러운 우연에 미소 짓자 비비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는다.

    그 작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리 와요.

    나만 안아줬잖아.

    각하도 품이 필요해.”

    끌어당기는 힘이 미약하기 그지없는데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어 도달한 곳은 그녀의 품이었다.

    “고마워요.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정작 누가 선물을 받은 건지 모르겠군.’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던 생일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 아침, 분명 원래대로라면 훨씬 더 기분이 저조해야 마땅한데.내 몸치장하랴, 온갖 것을 물으러 오는 이들에게 이리저리 지시하랴, 새벽부터 부산하게 기나긴 준비의 과정을 인내하고 있음에도 괜히 설렜다.

    ‘이것이 애인이 있는 자의 생일이란 말인가.’

    애인이 제일 먼저 축하도 해주고! 선물도 주고!그럼 이런 자질구레한 불편함 따위는 개의치 않아지는 것일까.

    ‘…대단하다, 사랑.’

    괜스레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자 잔뜩 흥분한 마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 머리랑 눈동자 색이랑도 잘 어울리고.

    오늘 드레스하고도 이것보다 더 어울리는 보석은 없을 것 같아요.

    완벽해요, 완벽!”

    의심스러웠다.

    아침부터 마리에게 자랑하고 싶어 내민 목걸이.

    현란하게 말을 쏟아내고는 있는데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마리? 내 눈을 봐보렴.”

    삐거덕거리며 시선을 돌린 마리가 간신히 나와 눈을 맞춘다.

    “…알고 있었지?”

    눈을 질끈 감은 마리가 자백했다.

    “각하께서 드레스의 색을 여쭈셨어요.

    어울려야지 않겠냐고.”

    ‘그렇게까지……?’

    분홍빛으로 시작되는 드레스는 아래로 갈수록 짙은 보랏빛을 띠었다.

    드레스 하단으로 갈수록 밤하늘의 별을 연상시키듯 하얀 보석이 점점이 반짝인다.그에게 선물받은 목걸이가 화장대 위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 옆에 푸른색의 머리 장식이 놓여 있다.

    ‘기가 막히게 색을 맞췄네.’

    “이리 화려한 목걸이를 할 줄 알고, 그래서 머리 올릴 장식들을 챙겨왔구나.”

    빙긋이 웃은 마리가 자랑스레 푸른 꽃을 형상화한 머리 장식을 들어 보인다.

    “연인의 눈동자 색으로 머리 장식을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마리의 시선이 목걸이로 향했다.

    “여기 푸른 보석도 섞여 있으니까요.”

    연인의 눈동자.

    대공의 눈을 떠올리며 머리 장식을 다시 바라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챙겨줘서 고마워, 마리.”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살펴서 기쁨을 나눠주는 마리가 고마웠다.환하게 미소 지은 후, 능숙하게 손을 놀려 머리를 만지는 모습이 몹시 전투적이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아가씨의 날인걸요.

    이날을 위해 제가 로아를 붙잡고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몰라요.”

    로아라면 제법 긴 머리를 지닌 하녀였다.열정 가득한 눈을 한 그녀의 손이 안 보일 지경이다.

    손가락이 저렇게까지 자유분방할 수 있는 건가.신중하게 머리 장식을 꽂은 마리가 손을 털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마리가 혼신의 힘을 다한 역작이 내 뒤통수에 달려 있다 생각하니 힘이 나네.평소 연회와 다르게 벽의 꽃 노릇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생일 연회는 올해도 여전했다.

    “…참 한결같다.”

    귀족 사회 분위기에 걸맞지 않기로는 던컨 공작가와 우열을 다투기 힘든 윈데이너 후작가.그 외딴 섬 같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많이들 참석해 주셨다.

    ‘뭐, 관계 개선까지는 어려워도 충분히 즐길 만한 연회기는 하지.’

    “역시 부유하시네요, 영애.”

    스텔라의 말마따나 말이다.

    “예, 1년에 한 번뿐인 데다 그것마저 부득이하게 취소될 때도 있으니 남들 수 번 할 정도의 공은 들이는 편이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치장한 언니는 만개한 꽃 한 송이 같기도, 다가가면 태워버릴 불꽃 같기도 했다.

    “꽃인가요, 불인가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묻자 스텔라가 특유의 진한 미소를 선보인다.

    “둘 다죠.”

    ‘언니가 오늘 여기서 미모 일등이야.’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슬며시 엄지를 치켜들고자 했으나 스텔라의 손이 내리누른다.

    “그보다 주인공이신데 제 곁에만 계셔도 괜찮겠어요?”

    내가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할 만한 인사는 얼추 다 왔다.

    남은 건 제국의 아이들뿐.필히 참석이 예정되어 있는 두 거물.

    ‘황태자랑 대공.’

    “예.

    상대하기 까다로운 두 사람이 오기 전까지 체력을 아껴야 해서요.”

    알 만하다는 듯 고갯짓을 한 스텔라가 내 목 언저리에 시선을 준다.

    “잘 어울리시네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아하니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니, 내 주변은 뭐 이렇게 비밀이 없어?’

    레사인가.

    레사는 대체 뭘, 어디까지 들쑤시고 다니는 거지? 대공하고 나하고 비밀 연애하는 것도 얘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영애가 오늘 받을 또 다른 선물이 무엇인지도 알지요.”

    ‘또 다른 선물?’

    그 말에 의아함을 담아 미간을 좁힌 나는 그녀에게 은근하게 답을 종용해 봤다.이내 한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이던 스텔라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목을 가리키다 방향을 틀어 귓불을 툭, 건드렸다.그와 동시에 연회장에 소란이 일었다.

    각기 흩어져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한데 모이고 경의를 표하는 대상.눈부신 제국의 작은 태양.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태자에게 향하려던 내 걸음보다 그가 빨랐다.

    “그대의 특별한 날을 축하하네, 영애.”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모두가 보는 앞이라 형식적인 말을 나누었지만 서로를 향한 시선엔 그보다 다정다감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반가움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황태자를 상석으로 이끌었다.

    그가 이 번잡한 귀족 무리의 시선과 관심을 조금이라도 덜 받을 수 있도록.미묘하게 시선이 차단되는 위치에 자리한 황태자가 대외용 미소를 지웠다.

    “비비안, 생일 축하해.”

    곧바로 소년 같은 얼굴로 격의 없이 축하를 건네는 리안을 보자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전하,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십니다.”

    옅게 미소 지은 그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를 꺼내 들었다.

    딱 봐도 나 고급이에요, 라고 외치는 것 같은 그런 상자였다.

    “실은 오늘 착용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진하고 옅은 각각의 분홍 보석들이 나뭇가지에 피어난 꽃송이들처럼 가득한 귀걸이였다.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귀걸이와 리안을 번갈아 바라보기를 반복하자 끝내 그가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는다.

    “꽤 마음에 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뻐도 너무 예뻤다.

    “작년에 준비한 것보다 더 취향에 가까운 것 같아 다행이네.”

    얘는 이런 감각에, 저 얼굴을 가지고 어떻게 연애 한 번을 안 할 수가 있지? 내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다.어쨌든 선물이 마음에 쏙 들었던 나는 양쪽 손에 하나씩 들고 귀에 가져다 댔다.

    ‘모름지기 선물을 받았음 보여줘야지.’

    “예쁜가요?”

    “음, 어디 보자.”

    팔짱을 끼고 짐짓 감정사처럼 진지하게 나를 보던 리안의 입매가 끝내 허물어졌다.

    한없이 환한 빛이 켜지듯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응.

    아주 예뻐.”

    배시시 웃으며 귀걸이를 도로 내려놓자 황태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이미 차고 넘치는데, 뭐가 더 있다고?

    “폐하가 더는 네게 황태자비 자리를 강요하지 않으실 거야.”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제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리듯 단정한 얼굴의 리안에게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은 황태자로서가 아니란 걸 그대가 알아줬으면 좋겠군.”

    황태자로서가 아니면 대체 뭘 말하는 거지?제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음이 전해지는지 리안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대를 좋아해, 비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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