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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1)화 (271/292)
  • 271화 

    * * *

    병실의 문을 닫고 복도로 나가자, 문 바로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당신이 레이디 켈튼이죠? 만나서 반가워요. 난……”

    시아는 상대가 소개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의술사의 길을 걷는 자가 그녀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파리스 맨틀러 교수님.”

    시아를 찾아온 손님은 해부학의 어머니이자 히포레스 훈장의 첫 수훈자요, 제국 의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겨지는 위대한 의사, 파리스 맨틀러였다.

    “날 아나요? 아, 학장님에게 말씀 들었어요. 레이디도 의학에 관심이 많으시다면서요?”

    실제로 만난 파리스 맨틀러는 칠십 년 후의 의술원 원장실에 그려진 초상화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나 온화하고도 강직한 인상만큼은 해부학의 어머니라는 수식어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이 일을 계속하고 있네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제 덕분이라는 건…….”

    “시신 거래 때문에 경찰에 붙잡혔거든요. 슈나이더 경감이라고, 그 유명한 작가 있잖아요? 그분이 절 직접 잡으러 오셨더라고요.”

    시아는 당황했다.

    이 대단하신 분이 어째서 자신에게 찾아와 돌연 양심 고백을 하는가? 게다가 경찰에게 잡혔었다니, 그렇다면 미래의 의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시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수년간 암기했던 의술 지식이 머리에 남아있나 확인해 보았다. 지식이 온전한 걸 보니 의술원이 사라지거나 의학이 퇴보한 건 아닌데…….

    “할 말이 없었죠. 해부학에 필요한 시신은 턱없이 부족했고, 저는 숨이 끊어진 몸뚱이는 무엇이든 사들였어요. 하지만 해부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해부하는 시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리가 없잖아요.”

    “…교수님.”

    “비겁하죠. 전 현실을 모른 체하면서 계속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제자들도 아마 다 알았을 거예요. 스승이 구해 온 시신이 어떤 시신인지를.”

    파리스의 고해성사는 시아가 과거를 누비며 의술인으로서 느꼈던 죄책감과도 같았다.

    의술의 발전이 비윤리적 행위와 숱한 희생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것은 그러한 희생과 거리가 먼 미래에서 온 스물여덟 의술사에게 성찰의 지점을 남겼다.

    “감옥에 갇히고 나니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난 해부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뿐인데. 하지만 제가 지은 죄를 잊을 순 없었어요. 두개골이 함몰되었는데 숨이 붙어있던 시신, 사실 시신도 아니었던 존재가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그래,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도굴꾼들의 시대를 몸소 경험해 보았던 시아는 마도 시대의 의학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발전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메이슨 비렌체가 재키 레이븐으로 위장하고 시신을 매장했을까.

    시체가 아니었던 것을 시체로 만들어 파는 자와 그것을 방조하는 자. 그들은 모두 살인범이나 다름없었다.

    “죗값을 치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학장님께서 이틀 만에 절 감옥에서 꺼내주시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생각으로 절 꺼내주시나, 그 많은 재산을 쓸데가 없어서 이런 데 퍼부으시나, 별생각을 다 했는데요.”

    학장님이라는 말에 시아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마도 시대의 갈리프도흐 학장은 라크시스였잖아.

    문득 오래전,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라크시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귀족이니 딱히 징역까진 아닐 테고. 기껏해야 구속일 테니 보석금을 내면 되겠죠.’

    ‘저 돈 많아요. 벌금이래도 뭐…….’

    ‘치유사도 없는 시대에 의학마저 엉망이면 곤란한 건 당신이잖아요.’

    ‘우린 광룡의 봉인이라는 한배를 탔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협조하려는 것뿐인데. 안 되나요?’

    그땐 아직 이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시아의 눈빛이 충격과 놀람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그 당시 슈나이더 경사는 시체 도굴꾼과 내통한 파리스 교수를 수사할 거라며 예고했었지. 그렇다면 파리스 교수가 실제로 슈나이더에게 붙잡혔고, 라크시스가 자신을 위해 파리스 교수를 빼내 주었단 말인가?

    그러나 자신은 지금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시아는 숨을 삼키며 파리스를 바라보았다.

    “학장님께서 해부학을 멈추지 말라시더군요. 레이디 켈튼, 그래요. 당신의 부탁이라 하셨어요. 레이디가 학장님께 제가 있어야 미래의 의학도 발전할 거라 하셨다면서요. 그러면서 학장님은 의학과에 지원을 약속하셨어요. 대신 경찰에 협조해 달라 부탁하셨죠.”

    파리스는 감옥에서 돌아온 이후 부검의가 되었다. 물론 초반엔 말만 부검의였지, 시신을 연구하는 사람에 더욱 가까웠고 사인을 잘못 알아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경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로 시체 도굴꾼이 많이 줄었어요. 그들이 가져온 시신을 해부하고 사인을 알아낸 후에 경찰에 신고했더니, 시신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사라진 거죠. 사실 제가 하는 행동은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가 않은데 말이죠.”

    파리스는 머뭇거리면서도 시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죄를 직면하고 뉘우치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일로 전 마땅한 길이 있으면 조금 멀고 귀찮더라도 그 길로 가기로 결심했어요. 떳떳해지니 논문을 발표할 때도 덜 조마조마하고요.”

    파리스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주름을 접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파리스는 부검의가 주목받고 의학 교수인 그녀가 주목받으면서, 사람을 고치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데 마법사가 아니라서 치유사가 될 수 없었던 이들의 의학과 지원이 늘었다고 했다.

    “레이디 켈튼,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내게 전환점을 준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제가 길러낼 제자들에게도, 우리가 의술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에도 말이죠.”

    시아는 파리스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자신이 바꿔 버린 과거의 결과가 얼마나 커다란 나비효과를 불러왔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파리스는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인사였다.

    마도 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시작한 이래, 제게 악수를 청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지라 시아는 떨리는 심정으로 파리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깨끗하기만 한 시아의 손과 다르게 파리스의 손은 자잘한 주름과 상처, 온기로 가득했다.

    “나중에 내 오피스에 한번 놀러 와요. 레이디라면 내가 새로 시작한 연구를 분명 흥미로워할 테니까.”

    “…고마워요, 교수님.”

    파리스는 제 손을 마주 잡은 젊은 의술사를 향해 진심으로 대답했다.

    “저야말로 고맙죠. 레이디 켈튼.”

    * * *

    파리스 교수가 떠나가고,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익숙한 기척에 시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요?”

    깜짝 손님과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이자, 해부학의 어머니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한 신사. 거기다가 생면부지인 시아의 이야기를 파리스 교수에게 전달해 프리드리히로 하여금 레이디 켈튼을 알게 한 사람.

    이 모든 일의 장본인을 발견한 시아는 피식 웃으며 라크시스를 맞이했다.

    “범인은 라크였군요?”

    “범인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리스 교수님이 절 어떻게 알고 대위님께 제 이야기를 했나 했는데, 이런 일이 있었던 거였네요.”

    “아하.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시아가 왜 자신보고 범인이라고 하나 했더니. 또다시 그녀의 입에서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나오자 라크시스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시아를 뒤에서 슬며시 끌어안았다.

    “내 앞에서 대위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물론 그 책임이 내게 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 안에서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곤 그의 미간에 생긴 주름을 꾹 눌러 펴주었다.

    “라크는 질투심 같은 건 없을 것 같이 생겼는데 말이에요. 은근히 티를 낸다니까.”

    “제가 질투심이 없다고 누가 그럽니까.”

    “그냥요. 다른 숙녀들이 라크에게 매달리면 매달렸지, 라크가 제게 이렇게 절절맬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거든요. 능글맞아서는, 매일 절 놀리기나 했었지.”

    “놀렸던 건 당신 반응이 사랑스러워서…….”

    시아는 라크시스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아요. 나도 이제 아는걸요. 제가 당신 눈에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자신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던가. 스물여덟 인생, 나름 굴곡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은 이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아는 까치발을 들어 라크시스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얼굴이 붉어진 라크시스가 화제를 돌렸다.

    “…보석으로 석방된 후에 파리스 교수는 줄곧 당신을 만나고 싶어 했었어요. 당신이 칠십 년 후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지만.”

    “그래서 오래전에 받았어야 했던 인사를 지금 받게 된 거군요?”

    “그런 셈이죠.”

    라크시스는 살짝 힘주어 시아를 끌어안았다가, 복도에 사람이 오가기 시작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나저나 타이밍이 맞으면 만나게 해주려 했는데, 아쉽게도 어렵게 됐군요.”

    “누굴 만나게 해주려 했는데요?”

    라크시스는 여느 때처럼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큼지막하게 붙은 우표 위엔 도장이 무려 네 개나 겹겹이 찍혀 있었다.

    “당신에게 온 편지예요.”

    편지라고?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도장이 이렇게나 많이 찍혀선 단단히 밀봉이 된 것을 보니, 편지는 제국 밖에서 날아온 듯했다.

    대체 마도 시대에, 그것도 해외에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시아는 무려 넉 장에 달하는 두툼한 편지를 읽으면서 어느새 손을 떨고 있었다.

    “릴리가,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시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라크시스에게 반문했다. 라크시스의 입가에 만족스럽고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만약 라크시스가 시아를 놀라게 하는 것을 오늘의 목표로 삼았다면, 그는 꽤나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제가 예전에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는데, 기억나요?”

    “그랬던 것 같긴 한데, 설마 그 사람이 릴리 알펜이었어요?”

    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릴리 알펜은 재키 레이븐에게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피해자이자, 문명의 절정으로 알려진 마도 시대의 어두운 이면에서 그 당시 제국의 발전을 위해 희생당해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시아가 만일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3517년 겨울 중에서도 하필 그 시기에 메이덜린의 경찰서 근처를 지나가다 릴리 알펜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릴리 알펜은 재키 레이븐에게 살해당한 피해자이자 아르카나 뒷골목의 창관에서 몸을 팔던 창녀로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릴리 알펜이 의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릴리 알펜은 시아가 시간 여행으로 인해 달라져 버린 과거로 괴로워할 때, 여정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해주었던 동력원과도 같았다.

    시간 여행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이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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