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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0)화 (270/292)
  • 270화 

    * * *

    시아와 라크시스, 요르문이 갈리프도흐 의과 대학 병동에 도착했을 때, 달리아는 이미 정신을 차린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미스 벤슨.”

    “…레이디 켈튼.”

    달리아는 그새 십 년이 더 늙어버린 얼굴로 시아를 맞이했다. 텅 빈 눈엔 초점이 없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은 지워져 있었다.

    “절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알다마다요. 레이디가 미래에서 온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달리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침대와 그녀의 손목을 이은 수갑이 쩔렁, 하며 쇳소리를 냈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과 호스에 이어진 마정석들 사이로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수갑과 경찰들을 보자 달리아가 피의자 신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땐 죄송했어요. 레이디를 죽이려고 했던 거나 다른 것들 모두요.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지금도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그때라면 아마도 웨스트스트릿 168번지에서 시아와 라크시스를 공격하던 일이었을 터다. 그러나 그때의 달리아는 스칼렛의 저주에 잠식되어 조종당하던 상태였다.

    “저, 미스 벤슨.”

    “기억은 모두 나요. 돌이켜 보면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스칼렛 그 여자에게 끌려다닌 세월만 벌써 십 년이 넘었네요.”

    달리아는 시아를 보자마자 메마른 회상들을 토해 냈다. 그녀는 마치 제 죄를 고백할 사람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시아는 달리아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여 주었다. 그녀는 이제 맨덜랜드 사태보다 한참 전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레이디. 모든 것이요. 제가 그 여자 밑에서 저지른 모든 짓들을 후회해요.”

    “미스 벤슨. 당신의 의지로 한 일이 아닌 걸 알아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오라버니를 따라 수도에 올라왔던 그때로요. 그때 그 여자들과 어울리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그 성당만 다니지 않았더라도…….”

    허공을 향해 있던 달리아의 눈동자에 불현듯 눈물이 고였다.

    “가족들은 절 잊었겠죠. 죽었다고 생각하겠죠. 당연해요.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버리곤 십 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 없었으니까…….”

    힘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힘도 없는지, 달리아는 멍하니 앉아 이야기하며 눈물방울만 하염없이 떨어트리고 있었다. 시아는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달리아에게 건네며 라크시스에게 속삭였다.

    “라크.”

    “오고 있을 겁니다.”

    라크시스는 진작 연락을 넣어두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는 화답하듯 고개를 주억거리곤, 병상에 걸터앉아 달리아를 마주 보며 토닥였다.

    “미스 벤슨. 제가 어쩌다 당신을 구하게 됐는지 아세요?”

    “운이 좋았던 거죠. 저야말로 레이디와 고대 마법사님을 감시하고, 죽이려 들었는데. 저주는 술자가 죽어야만 풀려요. 하지만 그 여자는 버젓이 살아있죠. 고대 마법사님이 제 저주를 풀어주지 않았다면 전 꼼짝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 거예요.”

    달리아는 바짝 갈라진 목으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저주에 잠식되었던 기억에 대한 공포, 지금껏 저주로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최후, 저주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마구잡이로 떠오른 듯 달리아는 덜덜 떨었다.

    “운이 좋았던 거예요. 레이디가 아니었다면 저도 미라가 됐을 거예요. 보험사정관들도 선장들도 이미 형체조차 남지 않고 말라 바스러졌을 테죠. 전 죽기 싫었어요. 죽기 싫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스칼렛의 지배가 약해졌단 뜻이죠. 잠식이 약해진 걸 알았다면 그 여자는 제게 다시 저주를 걸거나, 저도 미라로 만들어 버렸을 거예요.”

    시아는 달리아를 꽉 안아주었다. 자신의 온기가 달리아의 떨림을 진정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달리아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녀를 한참 동안 안고 토닥여 주었다.

    “그 여자가 저더러 모든 일을 끝내곤 죽으라고 했어요. 전 어찌 됐든 죽을 운명이었던 거죠. 스칼렛의 명령을 따라 죽거나, 그 여자의 명령에 불복해서 죽거나. 지난 세월 동안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수십, 아니, 수백이었어요. 전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예요. 만일 레이디가 아니었다면 저도 그들과 똑같이, 흡…….”

    “미스 벤슨.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가빠진 호흡이 안정을 되찾고 시아의 어깨를 적시던 달리아의 눈물이 멈추자, 시아는 조심스럽게 달리아를 떼어내었다.

    “미스 벤슨. 당신은 제게 운이 좋았다고 했죠.”

    “…네에.”

    시아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아 보이는 부인은 어린아이처럼 공손하게 대답했다. 시아는 레베카를 달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달리아에게 물었다.

    “미스 벤슨이 말한 운이라는 게 사실 누군가가 만든 거라면, 미스 벤슨은 믿겠어요?”

    “네?”

    그때,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달리아.”

    얇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건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였다. 일에 찌들대로 찌들어 거뭇한 눈과 꼴사납게 바짝 깎은 수염에서 오랜 세월 고생한 흔적이 물씬 풍기는 남자는 병상에 앉아있는 달리아를 보자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달리아는 그대로였다. 비록 저와 똑같이 머리가 회색으로 변했고 고생한 흔적을 따라 주름이 팼지만 웃는 모습이 예쁘고 눈매가 동그랗게 접히는, 그가 알고 있던 바로 그 달리아였다.

    한편 남자를 발견한 달리아의 눈동자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십 년도 훨씬 전의 풋풋하던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고생만 잔뜩 해 초췌해진 중년의 남자만이 문 앞에 서 있었지만 달리아는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라비인 거스 벤슨이었다.

    “…오라버니.”

    속절없이 무너지는 다리를 겨우 붙들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거스는 결국 달리아를 향해 달려들어, 오래전 잃어버렸던 여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달리아!”

    “오라버니! 첫째 오라버니이…….”

    두 사람은 둑이 터진 것처럼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깨어났구나, 정말로 깨어났어…….”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집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오라버니, 죄송해요…….”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흐으, 달리아, 막내야, 아아…….”

    두 사람은 오래전, 달리아가 실종되던 그 날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펑펑 울었다.

    중년에 접어드는 부인이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건 어쩌면 순서대로 겪어야 했던 인생의 과정을 스칼렛에게 모조리 빼앗긴 채, 납치를 당했던 오래전 그날에 멈춰 버린 인생의 나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달리아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목소리로 거스를 부르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시아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레이디 켈튼. 전 당신을 죽이려고 했었는데, 레이디는 제게…….”

    “미스 벤슨. 당신이 사라진 이후 거스 경감님은 오직 당신만을 찾아다녔어요. 경감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도 당신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감사해요, 정말로…….”

    “미스 벤슨, 제가 아까 당신의 운은 누군가 만들어 준 것이라 했던 걸 기억하나요?”

    달리아는 콧물을 들이키며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시아는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미스 벤슨의 운은 미스 벤슨의 오라버니가 만든 거예요. 십 년이 넘도록 여동생을 찾아다니던 거스 경감님의 정성이 당신이 구조되는 기적을 만든 거라고요.”

    남매의 극적인 상봉으로 병동은 잠시 숙연해졌다. 시아는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슬쩍 피해 주었다.

    라크시스 옆에 나란히 서 있으니, 그가 가만히 손깍지를 껴왔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 끝났네요. 거스 경감님이 동생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미스 벤슨이 깨어났으니 수사에 본격적으로 박차가 가해질 겁니다. 저주를 되돌리는 연구도 마찬가지고요.”

    시아는 입꼬리를 잡아당겨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저렇게 힘없이 보여도, 달리아는 한때 스칼렛의 최측근으로 맨덜랜드에서 유령선을 움직였던 사람이었다.

    세뇌당해 저지른 일이라고는 하지만 선처를 받긴 힘들 터였다. 달리아에게 희생당한 피해자들은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나저나… 수사는 그렇다 치는데 저주를 되돌리는 연구라니?

    시아는 그제야 병상 밑에 그려진 거대하고도 정교한 마법진을 발견했다. 희미한 빛이 나고 있어서 몰랐는데, 마법진은 수식을 끊임없이 발동시키며 태엽 장치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달리아와 거스를 관망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혼 국교회의 신도들은 모두 저주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들의 목숨이 저주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저주를 풀어야 하는데…….”

    시아는 라크시스의 뒷말을 눈치챘다.

    “라크, 미스 벤슨에게 걸린 저주를 풀려고 했던 거군요?”

    “이단의 신도들에게 저주를 건 술자는 스칼렛 포드였어요. 그녀가 황혼 국교회의 수장으로 오해받은 것도 그 때문이죠. 지금처럼 여차하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기 위해 카얄이 그런 식으로 이단을 운영했던 모양인데 덕분에 술자인 스칼렛 포드를 붙잡은 지금, 저주를 푸는 방법을 연구하기엔 용이해진 셈이죠.”

    “저주는 술자가 죽어야 풀린다면서요.”

    시아의 의문에 라크시스는 예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술자를 죽이지 않고도 저주를 푸는 방법을 발견하면, 후에 술자가 누군지 모르는 저주 또한 풀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랬다. 스칼렛 포드를 죽이면 제국의 이단 문제는 당장 해결되겠지만, 스칼렛 포드와 그녀의 저주에 잠식당한 희생자를 연구한다면 훗날 제2의 황혼 국교회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저주를 푸는 방법을 연구하자고 멀쩡한 마법사를 범죄자로 만들 순 없죠. 희생자도 마찬가지고요.”

    “라크.”

    “사실 저주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의 마법사도 드물어요. 애초에 우주의 순리를 거스르는 마법이니까요. 그래서 이 기회에 저주를 제대로 연구해 보려 합니다. 오랜만에 논문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얘기를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황혼 국교회 사건을 종결지을 생각만 했던 시아는 그보다 먼 미래를 내다본 라크시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한 감동을 느꼈다.

    시아는 벅차오른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며 할 말을 찾았다. 라크시스는 못내 사랑스러운지 시아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우며 문가를 가리켰다.

    “자, 레이디 켈튼. 당신을 찾아온 손님이 있군요.”

    병실의 살짝 열린 문틈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옷자락이 보였다.

    “절 찾아왔다고요?”

    누가 의학 병동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겠는가. 사교계의 숙녀들은 아닐 테고, 정체불명의 손님에 시아가 의문을 품자 라크시스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청했다.

    “당신을 만나기만을 고대했던 사람이에요. 한번 어울려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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