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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8)화 (268/292)
  • 268화 

    시아는 라크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성당을 나섰다. 쨍한 햇살이 마치 레베카의 앞날처럼 사방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북적이는 인파 속에 묻혀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시아를 불러세웠다.

    “레이디 켈튼,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대위님.”

    시아는 멈칫했다. 그녀를 불러 세운 건 콘힐 공작가 측의 하객으로 참석한 프리드리히였다.

    프리드리히가 나타나자, 라크시스는 시아를 살짝 당겨 제 품 안에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시아의 손가락에 끼워진 찬란한 약혼반지를 씁쓸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이성으로서 더는 사모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술인으로서의 레이디는 여전히 흠모합니다. 그 정도는 옆에 계신 약혼자께서도 허락하시겠지요?”

    제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여겼는데, 고대 마법사에겐 역시 안 됐던 모양이다.

    레이디 켈튼의 말마따나, 그녀는 한 번 본 자신보단 오래 함께해 온 라크시스 옌을 더 마음에 두고 있었겠지.

    “언젠가 양국의 관계가 나아지면, 공국으로 초대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요.”

    “나의 약혼녀가 원한다면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라크시스의 입에서 나온 약혼녀라는 단어에, 프리드리히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라크시스는 예의 여유롭고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애초에 제게 상대도 되지 않는 사내 아닌가. 게다가 고작 그런 고백으로 자신과 시아의 유대감을 침범할 순 없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레이디의 앞날에 언제나 빛이 가득하길.”

    프리드리히는 묵례를 건네곤 멀어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라크시스는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왈칵 토해 냈다.

    “시아, 이래서 제가 약혼을 서두른 겁니다.”

    “대위님이 별난 거예요. 처음 만난 사이에 대뜸 사랑 고백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절 처음 만났을 때의 라크는 어떻고요? 아직도 기억해요. 절 속여서 요르문과 만나게 하곤, 마력을 측정했던 거 말이에요.”

    “제발, 시아. 그때의 일은 정말 미안해요. 과거의 제가 눈이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흑역사나 다름없는 기억을 끄집어내자 라크시스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시아의 눈치를 봤다. 그가 쩔쩔매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광경이라 시아는 키득거렸다.

    라크시스는 행여 시아가 제 팔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아예 손을 단단히 잡아버렸다.

    “하여간 정말이지, 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라크밖에 없을 거예요.”

    “당신에게 내 마음을 모두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당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 할 겁니다.”

    시아는 붙잡힌 손을 빼냈다. 놀란 라크시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그의 양 뺨을 붙잡고 그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꾹 눌러 붙였다.

    “안심해요. 전 라크만 사랑하니까.”

    “누님! 지금 제 앞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이크. 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라크시스에게 키스를 하는 순간을 요르문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어서 갑시다. 빨리 가지 않으면 녀석이 증기기관차처럼 시끄럽게 쫓아올지도 몰라요.”

    “증기기관차라뇨.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까지…….”

    그러나 시아는 곧 요르문이 증기기관차처럼 쫓아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라크, 자네!”

    “윽, 진짜 증기기관차 같네요.”

    “그렇죠?”

    시아는 귀를 막곤 키득거리며, 달려오는 요르문을 피해 라크시스의 품에 안겼다.

    요르문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주 짓궂게 미소 지은 라크시스가 시아의 입술을 삼키며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시아와 라크시스, 두 사람을 쫓느라 뒤늦게 피로연장에 도착한 요르문은 밤이 새도록 뮐러 저택에서 열린 파티를 즐겼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신부, 장차 하나가 될 두 남녀, 가족과 친구를 동시에 잃을 위기에 놓인 가엾은 마법사까지.

    사방에서 폭죽과 샴페인이 터졌고, 춤과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행복하고도 아름다운 밤은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 * *

    레베카 뮐러의 결혼식은 열화와 같은 성원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제국은 성큼 다가온 레이디 켈튼과 고대 마법사의 약혼식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은 제국에 연달아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들을 단번에 뒤덮을 만큼 파급력이 컸다.

    일각에서는 맨덜랜드 사건이나 스칼렛 포드의 황혼 국교회 사건 등 심각한 사건들이 약혼식으로 인해 조명을 받지 못하게 된 상황을 문제 삼았으나,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약혼식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의 결합도 결합이었지만, 황제까지 나서서 축하를 보냈다는 소식에 흉흉하던 상점가와 제국민의 삭막하던 일상에 다시금 생기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십지는 연일 레이디 켈튼이 어디에서, 무엇을 샀고, 무엇을 먹었으며, 어느 부티크의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가십지에 실린 것들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덩달아 주목받은 미스 레베카 뮐러(시아와 친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덕에 가멜인과 제국인들의 갈등이 잠시 소강상태가 된 건 덤이었다.

    그렇게 시아와 라크시스의 약혼식까지 꼬박 하루가 남은 시점이 되었다.

    “아가씨, 그렇게 좋으셔요?”

    “요크 부인.”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응접실에서 약혼식 관련 카탈로그를 살펴보고 있던 시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요크 부인을 보고 움찔 놀랐다.

    “아가씨가 저택에 처음 찾아오셨을 땐 다들 상상도 못 했었지요. 아가씨가 고대 마법사님과 이렇게 미래를 약속할 사이가 될 거라고는요. 짝이 된다면 골방 학자나 다름없는 저희 주인님과 짝이 되실 줄 알았지 뭐예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다과와 함께 폭탄 같은 말들을 내뱉는 요크 부인에 시아는 얼굴이 빨개져 허둥거렸다.

    “그, 요르문은 나와 친척이라고 했…….”

    “호호, 이젠 저희 사용인들 앞에서까지 애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무렴 어떨까요? 아가씨만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사실 고대 마법사님이야말로 결혼을 하셨어야 했지요. 그분 나이를 생각한다면 말이에요.”

    그러나 노련한 부인의 말솜씨는 아무나 당해 낼 수 없는 법이다. 요크 부인은 그 후로도 웃어른 없이 결혼할 시아를 위해 결혼 생활의 경험자로서 한참 동안 조언을 늘어놓았다.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부부의 밤 생활까지. 라크시스가 수사 협조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수위를 넘나들기 시작한 이야기에 시아의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누님 좀 그만 괴롭혀, 요크 부인.”

    “요르문, 왔어?”

    꼬박 이틀을 밤을 새운 요르문이 더벅머리를 문지르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시아는 반색하며 요르문에게 달려갔다.

    “뭐 좀 먹었어? 내가 샌드위치를 해서 올려 보냈는데. 어제부터 한숨도 안 자고 연구실에 있었잖아.”

    “어쩐지 맛있더라니. 누님이 하신 거였어요?”

    “응. 옛날에 오이 샌드위치를 종종 만들었거든.”

    이걸 옛날이라고 해야 하나, 미래의 일이라고 해야 하나. 시아는 코끝을 긁적였다. 오이 샌드위치는 그녀가 어릴 적 양부에게 해주던 유일한 음식이었다.

    “고마워요, 누님.”

    “…응.”

    미래의 양부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이 기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요르문의 모습에 시아는 왠지 모르게 속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게 있구나.

    머지않아 돌아가게 될 미래와 그곳에서 만날 요르문을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요크 부인이 또 누님을 괴롭혔군요?”

    “주인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른 사용인들이 오해를 한답니다. 아가씨께는 여인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알려드린 것뿐인걸요.”

    “그건 남편 될 녀석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괜히 누님 힘들게 하지 말고.”

    “어머나, 듣고 계셨어요?”

    요크 부인은 과장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하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요르문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들리는 걸 어떡해. 그런 얘기는 내 귀에 안 들리게 하라고.”

    요르문 덕분에 시아는 요크 부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앞섶을 다 풀어 헤친 셔츠 차림에 이틀을 꼬박 안 씻은 얼굴로도 요르문의 소년미는 가릴 수 없었다.

    시아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보고, 그의 연구에 진척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 연구는 끝났어? 암호 해독은 잘 됐고?”

    그러나 요르문은 대답 없이 시아를 지나쳐 응접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황한 시아가 그를 쳐다보았으나, 요르문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곤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프레디 뮐러는 미래를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시아는 요크 부인을 물러나게 하고 요르문의 옆에 앉았다.

    그가 접시들을 밀어내고 종이들을 펼친 후 그중 한 장을 시아에게 내밀었다.

    “그가 누님에게 남긴 편지예요.”

    “편지, 라고?”

    요르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는 그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어 급히 쓴 듯 휘갈긴 글씨체와 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시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여정에 들어선 것을 축하하오, 레이디 켈튼. 레베카를 곁에서 지켜준 것도 진심으로 고맙소. 그대 앞으로 편지를 남겨두었으니, 로드 켈튼의 도움을 받아 해독법을 익혀 두시길 바라오.

    당신이 미래에서 가져온 조각에 대한 연구는 이쯤에서 그만둬도 좋소. 대신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길 바라오. 반드시 그것만은 지켜주시오.

    끝으로 약혼을 축하하오, 레이디 시아 켈튼. 마지막 여정이 끝나면 행복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당신의 마지막 편지는 아래 장소에서 찾아보시오.

    52° 12′ 18″ N, 0° 6′ 29″ E.]

    휘갈긴 글씨에 담긴 내용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편지를 읽은 시아는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프레디 뮐러는 정말로 모든 미래를 봤구나.”

    “하지만……! 하…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서야 조각이나 누님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에 담을 순 없으니까요.”

    요르문은 자신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마른세수를 벅벅 해대고 있었다.

    별장에서 발견한 프레디 뮐러의 일지엔 운명에 저항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괴로움과 후회, 체념이 가득 담긴 편지가 있었다. 후에 일지를 발견하게 될 사람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는 뉘앙스의, 그러니까 다가올 종말을 부디 막아달라 부탁하는 편지였다.

    그 말인즉 비행기 사고를 당하기 직전, 카얄의 습격을 피해 급히 도망칠 때만 해도 프레디는 미래엔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자기로 해석한 암호는 완전히 달라. 다가올 미래를 모두 알고 달관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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