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67)화 (267/292)
  • 267화 

    “오, 미스 허슬러!”

    거대한 덩치의 부하 경찰이 순경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돌아오다, 시아를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헨리 던로와 한때 동료였던 메이덜린 경찰서의 해밀턴 경장이었다. 덩치에 비해 순한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듯했다.

    “해밀턴 경장님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야 잘 지냈죠. 경감님 덕분에요.”

    시아는 뜻밖의 소동 덕에 오랜만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을 반가워하다, 문득 정보의 괴리를 느꼈다.

    “그런데 두 분은 메이덜린에서 근무하시잖아요. 설마 이 사건 때문에 메이덜린 서에서 아르카나까지 출동하신 거예요?”

    “어라, 고대 마법사님께 못 들으셨습니까? 저 이제 모르간 광역 경찰청으로 옮겼습니다.”

    “정말요?”

    “재키 레이븐을 잡고 경찰 생활이 많이 폈죠. 해밀턴 경장도 마찬가지고요. 이게 다 명탐정 덕분입니다.”

    슈나이더는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메이덜린 서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단 눈 밑 그늘도 줄고, 뱃살도 좀 줄어든 걸 보니 일에 찌든 생활도 좀 나아졌나 보다.

    다만 재키 레이븐을 언급할 때 아주 약간 슬퍼 보였던 건, 믿었던 동료에 대한 배신감과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이번 암시장에서 탐정님 활약이 아주 대단하던데요. 전 스칼렛 포드가 살아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미 사망 신고가 된 여인이었잖습니까? 거기다가 전국을 누비며 대담하게 강령술까지 하고…….”

    “어머, 거기! 결혼식장에서 궐련 피우시면 안 돼요!”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궐련과 성냥을 꺼내든 슈나이더에게 에밀리가 재깍 잔소리를 했다.

    슈나이더는 민망한 듯 얼른 궐련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시아의 귓가에 슬쩍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스칼렛 포드 이야기를 다음 소설의 소재로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시아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결국 시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윽, 그런 건 알아서 해요. 지금까지 멋대로 써왔으면서.”

    “아니, 제가 먼저 쓰자고 한 것도 아닌데요. 고대 마법사님이 제게… 크흠, 뭐, 덕분에 은퇴하고도 먹고 살길이 생겼으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슈나이더는 어느새 시아의 곁에 다가와 있는 라크시스를 발견하곤 말꼬리를 돌렸다.

    레이디 켈튼에게 고대 마법사의 반협박으로 앨런 어셔 연작을 쓰기 시작했다고 곧이곧대로 고했다간, 라크시스 옌에게 언제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는 일이다.

    두리번거리던 슈나이더는 화제를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스칼렛 포드는 언제쯤 깨어나는 겁니까?”

    “글쎄요, 생각보다 회복이 더디네요.”

    시계탑에서의 사건 그 후, 놀랍게도 데이먼 포드와 스칼렛 포드는 살아남았다.

    물론 치명상을 입어 현재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으나, 시계탑 사건을 비롯하여 암시장 및 맨덜랜드 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두 사람이 모두 살아있다는 건 수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회복이 빠르잖습니까. 스칼렛 포드는 황혼 국교회 전체를 쥐락펴락하던 고위 마법사인데도요?”

    “그게…….”

    시계탑에서 체포한 스칼렛 포드는 현재 라크시스와 교대 경찰의 감시하에 보안 마법이 걸린 병동의 격리실에서 건강을 회복 중에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저주를 사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위에서는 어서 조사에 착수하라고 닦달입니다. 그러니 스칼렛 포드가 눈을 뜨면 곧장 알려주시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실눈이라도 뜨는 순간 곧바로 연락 주십시오. 그럼 이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해밀턴 경장, 가지.”

    그러나 해밀턴은 우물쭈물하며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경감님, 그런데 그 두 사람, 정말로 연행해도 괜찮은 거 맞죠?”

    “얀마, 이미 애들 시켜서 서로 데려가 놓고 뭘 그런 걸 물어보나? 그리고 그렇게 다 봐주면서 경찰은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콘힐가에 블레어가 사람들인데요…….”

    거물들을 체포했다가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중범죄도 아니고, 체스터나 막스 모두 금방 풀려나겠지만 체면이 깎인 제국의 귀족들이 얼마나 이를 갈고 사는지 아는 해밀턴은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당당했다.

    “모르간 경찰이면 모르간 경찰답게 수도 치안을 책임져야지. 해밀턴 경장, 잔말 말고 마차에 시동이나 걸게.”

    그러면서 라크시스를 뒤돌아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게 아닌가. 시아는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경감님이 믿는 구석이 라크시스였냐고!’

    “미스 허슬러께선 저쪽 신부나 좀 위로해 주시죠. 안타까워서, 원…….”

    슈나이더는 시아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남기고 결국 사라졌다.

    시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졸지에 경찰과 결탁한 신세가 된 라크시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내저었다.

    레베카는 부케를 대충 내려놓은 채, 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밀레이나와 에밀리를 비롯해 수많은 신부 측 하객에게 둘러싸여 위로를 받고 있었는데, 인파가 어느 정도 사라지자 그제야 그녀가 제대로 보였다.

    시아는 레베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레베카.”

    속상해서 펑펑 울고 있을 줄 알았던 레베카는 뜻밖에 멀쩡했다. 그러나 멀쩡해 보이는 건 겉모습뿐.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에밀리가 가져온 물도 마시지 않은 그대로였다.

    “레이디, 그거 아세요? 막스 도련님이 그동안 왜 제게 자꾸 편지를 보내셨는지요.”

    레베카는 넋이 나간 얼굴로 웃는 듯 우는 듯 중얼거렸다.

    “클리포드 백작이 사교 클럽에서 절 두고 내기하는 걸 들었대요. 저 같은 검둥이들은 제국인 남자가 조금만 잘해줘도 금방 넘어올 거라며, 뮐러가의 재산은 곧 모두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 했대요.”

    아…….

    시아는 그제야 방금 전의 소란이 무엇에 기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막스 블레어는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블레어 가문의 비밀도, 형의 비밀도, 레베카의 약혼자가 숨겨온 비밀도.

    주먹을 휘두른 걸 잘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주먹을 휘둘러서라도 체스터에게 분노를 표하고 싶었던 막스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제가 만만하게 보였나 봐요. 그저 사랑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레베카.”

    “제가 모자랄 게 뭐가 있겠어요. 재산도 있고, 회사도 있고. 사실 대모님 밑에서 일을 배우는 게 꽤 재미있었거든요. 제 손으로 아버지가 남겨주신 것들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시아는 치마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막스의 편지를 꺼내 레베카에게 도로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진 레베카의 선언은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결혼 같은 건 그만두려고요.”

    “레베카!”

    대녀의 결혼 포기 선언 소식에 밀레이나가 비명처럼 레베카를 불렀다. 그러나 레베카는 단호했다.

    “아예 안 한다는 건 아녜요. 오늘처럼 나이에 쫓기고 의무감에 쫓겨 아무것도 모른 채 저런 멍청이와 섣불리 결혼하는 걸 그만두겠다는 거죠.”

    레베카는 시아를 돌아보았다. 새신부의 설렘도, 긴장도, 걱정도 화장과 함께 모두 지워낸 얼굴은 창백했으나 이상하게 그녀의 눈동자에만은 이채가 감돌았다.

    “참 신기하죠? 저만 막스 도련님을 첫사랑이라 생각한 줄 알았는데, 막스 도련님에게도 제가 첫사랑이었대요.”

    “레베카, 어쩌면 막스 블레어는…….”

    시아는 방금 전 막스 블레어에 대해 알아낸 것들을 말하지 못했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막스는 리암 블레어의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레베카는 시아가 차마 건네지 못하고 있던 편지를 스스로 되찾아오며, 설핏 미소 지었다.

    “리암 블레어와 블레어가는 용서할 수 없지만, 막스 도련님은 거기서 빼주려고요.”

    핏기없는 그녀의 얼굴이 왜인지 행복해 보이기도,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성당 복도에 길게 나 있는 창문을 타고, 때마침 구름이 개어 맑은 하늘에서 따스한 햇볕이 레베카에게 닿았다.

    뎅― 뎅― 뎅―

    정오를 알리는 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정대로 식이 진행되었다면 부부가 된 레베카와 체스터는 이 종소리를 들으며 성당을 나섰을 것이다. 흩날리는 꽃가루와 환호 속에 새하얀 마차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어 피로연장으로 갔겠지.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레베카, 아니, 아가씨. 그럼 막스 도련님과 결혼하실 거예요?”

    “글쎄.”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긴 레베카는 시아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인연이란 건… 제게도 찾아오는 거겠죠?”

    “그럼요. 레베카와 제가 만난 것도 인연인걸요.”

    베일 너머로 비친 레베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호선을 그리며 기쁘게 접혔다.

    “고마워요.”

    레베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부가 움직이자 하객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길을 만들었다.

    결혼식이 엉망이 되었으니 신부가 이대로 퇴장해 버려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신랑이 걷어주어야 할 베일을 스스로 걷고, 부케에서 한 송이 꽃을 뽑아 귓가에 꽂은 채 하객들에게 목청 높여 외쳤다.

    “결혼식은 이대로 끝나 버렸지만, 저를 위해 모여주신 분들께는 부족함 없이 대접하고 싶네요. 레이디, 피로연에 와주실 거죠? 신랑이 없다고 흠 잡히면 어쩌나.”

    침묵이 감돌던 성당 안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경찰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앞뒤 상황을 알게 된 신랑 측 하객들도 아낌없이 박수를 치며 레베카를 응원했다. 콘힐 공작가의 사람들은 진작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뭣들 해요! 다들 뮐러 저택으로 가자구요! 신부가 준비한 피로연 파티를 즐겨야지요!”

    에밀리는 신이 나서 소리치며 하객들을 성당 밖으로 안내했다. 하객을 위해 준비해 둔 마차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탄성이 구름처럼 떠다니는 성당 안, 레베카는 제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밀레이나에게 결국 사과했다.

    “…대모님. 죄송해요.”

    그간 밀레이나가 대녀의 결혼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가. 결혼식이 파투 난 것과 별개로, 결혼을 안 하겠다며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니 밀레이나의 속은 지금쯤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레베카는 밀레이나가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성당 복도의 마룻바닥 무늬만 하염없이 보고 있는데, 노부인의 주름진 손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주인공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어서 마차에 타거라. 결혼 케이크도 나와 함께 자르자꾸나.”

    “…대모님.”

    “잘했다, 레베카. 잘했어.”

    레베카는 결국 기쁨의 눈물을 터뜨리며 밀레이나와 함께 성당 밖으로 향했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시아는 한숨을 돌리며 라크시스에게 폭 기댔다.

    “아, 다행이에요. 결혼식이 파투 난 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미스 뮐러에겐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콘힐 공작부인이 되면 아무래도 지금처럼 일을 하기 힘들 테니까요.”

    레베카의 앞날을 걱정하는 라크시스는 의외로 진지했다. 그가 레베카에게서 의술사인 자신을 겹쳐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아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도 갈까요?”

    “그럽시다, 나의 피앙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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