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가벼운 취기는 금세 날아가, 시아는 곧 맨정신으로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라크시스를 두고 떠나간 순간, 라크시스의 표정은 찰나 미묘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시아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잠깐 골리려던 것뿐이고, 이 정도 장난은 라크시스도 종종 하던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평소에 하지도 않던 장난을 치려 해서 그랬던 것일까. 상황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제가 대공 전하와 첫 춤을 추어야 한다고요?”
“그대를 위해 연 무도회이니, 그대가 무도회를 주도해야지. 차탈 말고도 그대가 춤을 추어야 할 상대가 한둘이 아닌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힘주어 대답한 황제 때문에 시아의 만면에 낭패가 어렸다. 첫 춤을 라크가 아닌 다른 사람과 춰야 한다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황제가 시아를 위해 준비한 무도회 날이 되었다.
황실에서 주최한 것이니만큼 준비기간만 장장 한 달이 걸린 무도회는 황녀의 결혼 연회만큼이나 성대하게 열렸다.
그사이 시아는 라크시스와 함께 크고 작은 무도회에 참석했다.
로젠버그의 무도회에 두 사람이 나타난 이후, 켈튼저엔 레이디 켈튼을 자신의 무도회에 초대하는 편지가 날마다 날아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시아의 건강을 생각해 이를 모두 거절해 주었을 라크시스는 황궁에서의 무도회를 대비해야 한다며 춤 연습을 핑계로 몇몇 무도회에 참가 의사를 밝혔다.
그는 더 이상 시아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춤을 추고, 시아가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녀를 데리고 켈튼저로 돌아왔다.
얼핏 보기엔 시아를 지극히 아끼는 태도가 달라지진 않은 것 같으나, 시아는 그가 자신에게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유가 뭘까. 그가 제게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라크시스는 언제나 시아에게 지극으로 정성을 다했다. 다만 집착 아닌 집착 같던 태도가 사라졌을 뿐.
결국 시아는 그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채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쪽에선 무도회를 열어본 적이 없었나 보지?”
황제의 물음에 시아는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여기서 그쪽이란, 칠십 년 후의 미래를 뜻했다.
시아가 건너온 미래에 관심이 많았던 황제는 종종 시아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이런 식으로 미래에 대해 물어보곤 했다.
“…결혼도 안 했는 걸요, 폐하.”
“결혼을 안 했다고?”
황제는 혀를 차며 올가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자 시립해 있던 시녀들 중 황제와 가장 가까이 있던 귀부인이 카펫을 가로질러 시종들이 들고 있던 보석함을 가져왔다.
올가가 열어 보인 보석함에는 자그마치 십이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중심을 장식한 화려한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황실의 컬렉션 중 하나로, 자신이 젊을 적 행사에서 즐겨 착용했던 목걸이를 들어 시아의 목에 이리저리 가져다 대본 황제는 곧 다이아몬드를 내려놓으며 올가를 향해 다시 한번 턱짓을 했다.
“이것 말고 에메랄드로 해보지.”
“예, 폐하.”
시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황실의 보석이 제 목을 왔다 갔다 하는 엄청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런 시아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황제는 딸이 없는 아쉬움을 시아를 꾸미는 데에 풀어내며, 스무 살이 지나도 한참 지나 버린 아가씨를 가볍게 타박했다.
“칠십 년 후의 제국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되질 않는군. 그대 또래의 이곳 숙녀들은 대부분 망아지를 선물 받을 만큼 자란 아이가 있으니 말이야.”
올가가 두 번째로 가져온 보석함에는 사각의 형태로 세공한 에메랄드가 있었다.
화려한 다이아몬드와 달리 우아한 곡선과 작은 보석들로 장식된 에메랄드 목걸이는 시아의 가느다란 목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다.
“에메랄드가 낫군. 머리가 와인 같은 색이라 그런지 마치 만개한 장미와 초여름의 녹음을 보는 기분이구나.”
“과찬이십니다, 폐하.”
시아는 에메랄드를 목에 건 채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무릎을 굽혔다. 날이 갈수록 잘 교육받은 숙녀의 모습을 갖춰나가는 시아에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모양새를 갖춘 것 같으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게.”
“예, 폐하.”
황제의 손짓에 문간에 서 있던 시종들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푸들 해리와 함께 레이디 켈튼과의 알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조지 황자가 뒤따라 뛰어 들어오며 알리나에게 폭 안겼다.
“폐하!”
“조지, 또 밖에서 기다렸느냐? 알현이 끝나면 부른대도.”
“하지만 조지는 폐하가 보고 싶었는걸요? 이것 보세요! 해리도 폐하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
황제는 늦둥이 황자의 애교에 녹아가기 시작했다. 헥헥거리는 푸들과 작게 감탄사를 터트리는 시녀들 속에서 황제의 표정은 결국 풀어져 버렸다.
“아이는 참 귀엽지. 안 그런가, 레이디 켈튼?”
“황자 전하께서 폐하를 닮아 다방면에서 출중하시니 더욱 사랑스러워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폐하.”
“아니야, 그렇지 않네. 내 배로 낳은 아이라 더욱 눈길이 가는 게지. 그대도 어서 짝을 찾아 이 기쁨을 누려보아야 할 텐데. 계속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군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시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삼켰다. 여기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그녀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라크시스가 문득 떠올라 괜히 속이 쓰렸다.
황제는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아에게 말했다.
“레이디 켈튼. 준비가 끝나면 올가를 따라가게. 연회장 안내를 도와줄 테니.”
* * *
대리석이 깔린 황궁의 복도 위로 높은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소리의 주인공은 황제의 시녀 올가 웰링턴과 황제가 총애하는 숙녀 레이디 켈튼이었다.
시아는 경박하게 발을 놀리지 않으면서도 올가의 어마무시한 속도를 따라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레이디 웰링턴.”
“대공 전하께서도 레이디 켈튼과의 춤을 반기시진 않으십니다.”
“역시 그렇겠죠?”
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코끝을 긁었다. 그러다 손가락 끝에 분이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얼른 그만두었다.
이러다 또 혼날라.
황제의 알현실에서 나온 시아는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손님방에서 간단한 치장을 받았다. 그리고 해가 넘어갈 즈음에 시작될 무도회를 위해 연회장과 만찬장의 구조를 익히기 위해 올가를 따라 황궁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안주인이 가장 높은 신분의 신사분들과 차례로 춤을 추는 건 관습이자 예법이니까요.”
“…제가 감히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진 모르겠지만요.”
“이제 와서 발을 뺄 순 없으니, 최선을 다해 보세요. 레이디 켈튼.”
올가는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올가의 모습이 제법 익숙해졌기에 시아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올가 웰링턴은 황제의 앞에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간극이 매우 큰 편이었다. 정확히는 사교계의 레이디 웰링턴과 차탈의 심복인 올가와의 간극이라고 해야겠지만.
올가는 시아가 자신을 쫓아오느라 허덕이는 것 같아 보이자 말없이 속도를 늦춰주었다. 그러곤 시아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프리드실 공국의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이 제국을 방문한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시아의 눈이 조용히 커졌다.
프리드리히라면 얼마 전 로젠버그의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췄던 신사였다. 하지만 다무스 출신 귀족이라는 발자크 로스도 제국을 누비고 다니는 판에, 공국의 대위가 무도회에 나타났기로서니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맨덜랜드 사태 이후 제국에서 서대륙인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니까요. 서대륙에서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겁니다. 외유가 목적이라곤 하나, 할켄타인 3세 공의 후계가 제국을 방문했으니, 외교적인 의도가 아예 없다곤 할 수도 없겠지요.”
“할켄타인 3세 공의 후계요?”
“설마 모르셨나요?”
몰랐다. 알았을 리가 있나.
그저 장교로만 알았던 신사가 공국의 후계라는 사실에 시아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어째 시간여행을 하면서 그녀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올가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프리드리히 할켄타인이 레이디에게 호감을 비치는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그가 공국으로 돌아가 제국에서 대접을 잘 받았노라고 말해 주길 바라야겠지요.”
시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황제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만들어 준 무대가 왠지 그리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지 않을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간단한 다과회와 티 타임이 끝나고 정찬까지 마무리되자, 마침내 대망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속속들이 도착한 마차로 황궁 앞뜰이 채워지고, 금을 입힌 화려한 조명이 드넓은 홀 안을 환하게 비췄다.
황궁의 샹들리에 빛이 연회장에 가득 모인 신사와 숙녀의 머리 위로 산산이 부서져 보석 같은 점을 남긴다.
감미로운 오케스트라 연주와 기대감에 부푼 대화 소리를 두꺼운 문 하나로 막아둔 홀 바깥에선 오늘의 주인공이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었다.
“라크.”
시종들이 문 앞에서 황제의 신호를 기다리는 가운데, 시아와 라크시스는 입장을 위해 나란히 서 있었다.
“오늘은 당신과 함께 입장할 수 있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첫 춤은 라크와 추지 못하는걸요.”
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라크시스의 에스코트는 대공과 함께 입장하라는 황제의 말에 시아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어 겨우 얻어낸 것이었다.
황제의 앞에만 서면 심장이 콩알만 해지는 시아였으나, 요 근래의 라크시스를 떠올리고 나니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낸 것이다.
황제가 흔쾌히 허락해 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아는 저와 팔짱을 끼고 있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이 기회를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 남자는 알고나 있을까.
라크시스는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쉬운가요?”
아쉽냐고? 당연히 아쉽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면서도 첫 번째 춤은 대공과 춰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젠 첫 춤이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저도 아는걸요.”
시아는 또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두 볼이 봉긋 부풀어 올랐다.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라크시스는 평소처럼 그녀에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대신 신사의 미소를 얼굴 위로 덧그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라크는 괜찮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요. 제가 대공과 첫 춤을 추는 것이요.”
때마침 연회장 안에서 신호가 왔다. 시종들은 시아와 라크시스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눈부신 샹들리에 빛이 쏟아짐과 동시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전 괜찮습니다. 당신이 대공과 첫 춤을 춘다고 해서 오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라크시스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먼저 걸음을 뗐다. 그녀를 보았다간 실수를 해버릴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