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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9)화 (249/292)

249화 

시아는 바짝 긴장하며 밀레이나와 레베카의 반응을 살폈다. 라크시스가 맨덜랜드에서 사용했던 마법을 쓴 건지 두 사람은 라크시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검은 머리에 묘하게 라크시스 옌을 닮은 미모의 신사를 보고,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라크시스 옌 말고 또 있었냐며 그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레이디 로젠버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시아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

시아는 그제야 레이디 로젠버그가 알버트 조지 랑케라는 수상한 신사의 반협박을 받아 그를 자신의 에스코트로 데려왔음을 알아차렸다.

프리드리히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듯 보였다. 알버트, 그러니까 라크시스는 프리드리히를 가볍게 지나치며 예의 능청스러운 태도로 시아에게 인사했다.

“숙녀분의 에스코트를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켈튼.”

“라크, 여기서 뭐 해요? 이번에도 마법을 쓴 거예요?”

그러나 라크시스는 시아의 속닥거림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게 시아의 댄스 카드를 확인했다.

“이런, 댄스 카드가 거의 차버렸군요. 허락하신다면 첫 춤곡의 칸에 제 이름을 적어도 되겠습니까?”

시아는 그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시아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나오자마자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펜을 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치밀함을 좀 보라지.

그는 시아의 첫 춤을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짧은 순간에 레이디 로젠버그를 구워삶고(구워삶았다기보단 마법을 이용한 반협박에 가까웠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에스코트의 자리까지 차지해 냈다.

시아는 결국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 * *

손바닥을 맞대었다 떨어져서는 숙녀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돈다. 우유를 부어 밤새 광을 낸 마룻바닥 위로 드레스 자락이 꽃처럼 피어나며 원을 그렸다.

상기된 뺨과 들뜬 숨.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파트너를 마주한 여인들은 샤프롱 없는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레이디 로드리치가 아주 짓궂은 짓을 했어요. 첫 춤곡이 끝날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니.”

시아의 손을 다시금 붙잡은 라크시스는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잡아당기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았다. 경쾌한 굽 소리와는 다르게 라크시스의 발끝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건 당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남자의 손에 맡겨두란 뜻과도 같죠.”

“그런 거예요? 전 몰랐어요.”

라크시스는 웃고 있었으나,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시아가 미안해하자 더더욱 속이 꼬여만 갔다.

그녀는 이런 제 기분을 알까. 사교계에서 숙녀가 신사에게 에스코트받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

다른 이들이 손을 잡든 허리를 잡든 구애를 하든 언제나 무덤덤했던 자신이 시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렇게나 예민해진다는 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쾌했다.

철벽같던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만 같아서.

그녀의 앞에서라면 바보가 되어도 상관없으나, 그녀가 자신을 유치하다 여기는 건 싫었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멀어졌던 스텝이 다시 모인다. 구두와 구두가 맞닿을 때마다 라크시스의 마음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제멋대로 튀는 감정이 신기하면서도 감당이 되질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맞잡은 이 손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으니 중증은 중증인가보다.

라크시스는 딱 한 번만, 조금 유치해져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레이디 로드리치가 심술을 부리거든 말려주십시오.”

그러자 시아의 눈꺼풀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깜빡였다. 이윽고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알겠어요. 에스코트는 꼭 라크에게 받고 싶다고 말해 볼게요.”

라크시스는 숨을 멈췄다. 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오로지 라크시스 자신만이 있었기에.

라크시스는 잠시 유치해져 봐야겠다고 용기를 낸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렇게 알버트 조지 랑케와 레이디 켈튼의 첫 춤이 끝나가고 있었다.

* * *

밀레이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작게 자른 케이크를 집어 먹다 말고 짓궂게 웃었다.

“정원 구경은 잘했나? 옌 경.”

“다섯 바퀴는 돈 것 같더군요. 시종이 절 불쌍히 여겨주어 다행이었지 뭡니까.”

첫 춤이 끝나고 티 룸에서 막간의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 여인에게 라크시스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문 닫힌 무도회장에 들어오기 위해 어지간히 고생했는지, 라크시스는 약간 지친 듯 보였다.

그러나 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흐트러진 건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시종에게 사정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버트 조지 랑케가 되어 시아와 막 첫 춤을 추고 돌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젠 알겠지? 자네가 얼마나 둔감하게 굴었는가 말이야.”

“그럼요. 레이디의 가르침을 아주 잘 받았습니다.”

밀레이나는 라크시스에게 차가운 커피가 든 잔을 건네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레이디 로젠버그가 아주 괜찮은 신사를 소개시켜 주었지 뭔가. 레이디 켈튼의 에스코트로도 부족함이 없더군.”

“그렇습니까?”

라크시스는 소파에 앉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시아는 말없이 차를 홀짝이며 라크시스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옌 경도 이제 긴장하셔야 될걸요. 레이디 켈튼의 손가락은 아직 비어있으니까요.”

그 와중에 레베카가 라크시스를 슬쩍 도발했다.

라크시스는 그런 레베카를 가볍게 무시하며 다 마신 잔을 내려놓곤 시아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켈튼, 이런. 댄스 카드가 벌써 다 차버렸군요. 알버트 조지 랑케, 라. 레이디가 에스코트를 허락할 만큼 훌륭한 신사분이셨나 봅니다.”

댄스 카드를 확인한 그의 목소리가 낮게 뭉그러졌다.

꾹꾹 눌러 발음한 알버트의 이름에서는 묘한 질투심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질투해 봤자 결국 자기 자신이건만. 어쩌면 레베카와 밀레이나가 오해하게끔 두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아와 라크시스의 시선이 맞닿았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눈엔 일말의 기대가 서려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까…….

시아는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도도한 귀부인처럼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두말하면 입이 아프죠. 그렇게 우아하게 춤을 추는 분은 처음이던걸요.”

“아하, 그렇습니까?”

라크시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다.

밀레이나가 무도회장 입장을 막았을 땐 당황한 것 같더니, 이젠 그도 상황을 꽤나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제 실력도 보여드려야겠군요. 당신의 마지막 춤곡을 제게 허락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스터 랑케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주시려고요?”

결국 라크시스 또한 작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 가서 춤추다 와요. 비교를 해보려면 남은 춤들을 모두 즐기셔야겠지요.”

“벌써요?”

그의 손에 이끌려 엉겁결에 일어난 시아는 당황하여 눈알을 굴렸다.

라크시스의 시선 끝엔 두 번째 춤을 신청한 프리드리히가 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라니, 레이디 켈튼. 첫 춤이 끝난 지 꽤 지났는데.”

“라크!”

밀레이나에게 등을 떠밀려 티 룸 바깥으로 나가면서도 시아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라크시스와 함께 있을 땐 마음이 편했는데, 다른 사람과 춤을 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난 걱정 말아요. 신사는 춤추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라크시스가 아니라 시아 자신이었다. 티 룸에서 나가기 직전, 스치듯 확인한 그의 표정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라크시스는 대체 뭘 기대하길래 그런 얼굴로 자신을 내보낸 걸까.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으며 시아는 그만 불안해지고 말았다.

* * *

“레이디 켈튼, 춤은 즐거우셨는지?”

“얄미워, 정말. 걸어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게 다행일 지경이라니까요? 그나저나, 황제 폐하께서 편지에 왜 그렇게 쓰셨는지 알겠더라고요.”

다섯 번째 춤곡까지 끝난 시점이었다. 시아는 잔뜩 인상 쓴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티 룸으로 들어섰다.

구두를 신고 종일 마루를 도니 발바닥이 다 아팠다. 그것뿐이면 다행이지, 태어나서 춤이라곤 미래의 양부, 라크시스와 춘 것이 전부였던 시아는 파트너의 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애초에 비교가 안 되는 대결이었다.

라크시스는 부드럽고 우아하게 스텝을 밟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시아의 현재 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행차 날 이후 내내 잠들어 있다 깨어난 시아의 근육이 제 기능을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라크시스는 시아가 편하게 몸을 놀릴 수 있도록 섬세하게 리드했다.

그 탓에 두 번째로 시아와 합을 맞춘 프리드리히는 졸지에 평가 절하가 되고 말았으니, 나름 춤을 잘 춘다고 자부했던 프리드리히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프리드리히 이후로 시아가 만난 신사들의 춤 실력이 앞선 두 사람에 비해 월등히 차이가 났다는 것이었다.

“그랬나요? 저는 당신이 왈츠를 즐긴 줄 알았죠.”

“두 번째 춤곡 말이죠?”

“네. 프리드실 공국의 할켄타인 대위 말입니다.”

라크시스는 끙끙거리는 시아를 부축해 소파에 앉혀 놓곤 샴페인이 든 잔을 가져왔다.

“그걸 보고 있었어요? 정말 못 말린다니까.”

“전 당신의 후견인이니까요.”

“이럴 때만 후견인이 되는 거죠?”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걸요.”

두 샴페인 잔이 서로 맞부딪혔다.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키득거렸다. 시원하고도 청량한 샴페인에 피로가 씻은 듯 가시며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무도회장의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축제나 다름없었다.

세 시즌 안에 짝을 찾아 결혼을 해야만 하는 젊은 숙녀와 신사들이 찰나의 시선으로 서로를 재고 평가하며 현장의 열기를 즐기고 있었다.

시아는 티 룸에 앉아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레베카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피곤하면 돌아갈까요?”

“아직 춤이 남았는걸요.”

“숙녀가 건강을 이유로 자리를 빠져나가는 일은 무도회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라크시스의 걱정은 적중했다.

시아는 실제로도 너무 많은 춤을 춰 무리한 상태였고, 춤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춤을 추는 내내 신사의 발을 밟지 않으려 신경까지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샴페인까지 마셨으니.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술이었는데도 시아는 금방 취기가 올랐다. 그래서인지 불쑥 장난기가 치솟았다.

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사분? 숙녀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시아.”

“신사분의 춤이 어떤지 확인해 보려면 신사분의 차례가 돌아올 때까진 춤을 춰봐야 되지 않겠어요?”

시아는 라크시스를 지나쳐 문간에 비스듬히 기댔다.

“혹시 알아요? 미스터 랑케만큼이나 훤칠하고, 매너 좋고, 춤을 잘 추는 신사분이 또 있을지.”

살짝 꼬인 혀로 키득거리던 시아는 라크시스가 붙잡을 틈도 없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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