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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1)화 (241/292)
  • 241화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긴장한 근위대장을 잠시 바라보던 알리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마차를 버리거라. 그대의 말을 탈 테니 근위대장은 나를 엄호하게. 근위대와 함께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간다.”

    그때 마차 밖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고대 마법사다, 고대 마법사가 폐하를 구했어!”

    소리로 상황을 파악하던 알리나는 마차에서 내리다 시커먼 연기 속에 파묻힌 인영을 발견했다.

    “옌 경인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찰과 근위병들이 총을 겨누며 폭탄이 터졌던 장소를 빙 에워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엔 찬란한 은발을 지닌 사람이 연기에 가려진 채 서 있었다.

    저자가 만약 라크시스 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경계하고 있진 않을 터였다.

    알리나는 연기 속 사람의 은발이 여인의 것처럼 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위험합니다, 폐하. 어서 황궁으로 피신하셔야 합니다.”

    “…괜찮네. 저들에게 총을 내리라고 해.”

    아는 얼굴이다.

    알리나는 근위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폭발 현장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알리나가 다가오자 은발의 존재는 그녀를 돌아보더니, 이윽고 그대로 허물어져 쓰러져 버렸다.

    알리나는 그 존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신문 배달원이나 할 법한 차림을 한 여자였다. 폭발의 여파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전부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녀에게는 작은 생채기조차 없었다.

    여자의 은발이 곧 빛을 잃고 검붉은색으로 돌아왔다.

    알리나는 혀를 찼다. 여기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숙녀였다. 이 여인은 폭발이 어떻게 일어날 줄 알고 자신을 구한 것인가.

    “폐하!”

    “그대들은 날 경호하고, 나머지는 폭탄을 던진 범인을 색출하게.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야. 그리고 이자는 일단 의사를 불러서…….”

    알리나의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바람이 불며 라크시스 옌이 나타났다. 그의 두 눈엔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라크시스 옌은 황제에게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쓰러진 여인을 끌어안았다.

    “폐하, 레이디 켈튼은…….”

    그는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필사적으로 시아 켈튼을 보호하고 있었다.

    정황상 시아 켈튼이 황제를 지키려 몸을 내던졌다는 것이 확실하나,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연루된 모든 이들을 심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말이 좋아 심문이지, 황궁 지하에 끌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라크시스 옌은 누구의 접촉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시아를 품에 가두고는 황제조차 경계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알리나는 시아 켈튼이 무고함을 알 수 있었다. 설령 그녀가 무고하지 않더라도 고대 마법사가 그녀를 감싸기로 마음먹었다면, 황제로서 알리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얼떨떨한 얼굴을 한 근위대에 새로이 명령했다.

    “그대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네. 이제 근위대는 나를 엄호하여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근위대장, 내게 말을 가져오게.”

    * * *

    하얗던 시야가 암전이 된 것처럼 검게 물들었다.

    으, 머리야.

    시아는 시큰거리는 관자놀이에 잔뜩 인상을 썼다. 등 뒤가 푹신한 걸 보니,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번에도 제멋대로 시간 여행이 시작된 걸까?’

    눈꺼풀에 덮인 눈동자가 어둠을 감지하기 전, 눈앞을 물들였던 새하얀 빛을 떠올리면 그럴싸한 추측이었으나.

    ‘머리가 너무 아픈데. 나 혹시 술 마셨나? 하지만 동창회 날 이후론 부어라 마셔라 한 적도 없는걸.’

    시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꼭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마지막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황제의 행차를 보았던 것 같은데,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던 것 같기도 하고…….

    뒤죽박죽이 된 기억이 하나로 정리되지 못하고 머릿속을 부유했다.

    그때 위장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시아는 그제야 자신을 깨운 것이 사흘을 내리 굶은 듯 텅 빈 배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아는 퉁퉁 부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켈튼저의 익숙한 천장 무늬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사히 잘 끝난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시아가 실제로 움직인 건 손가락 하나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던 거야?’

    불현듯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슈테른베슈테크에서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근육이 고무줄처럼 축축 늘어지는 걸 보니 못해도 일주일은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혹시 아무도 없나요?”

    시아는 바싹 마른 입술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방 안엔 아무도 없는지 잠잠하기만 했다.

    하긴, 누워서 잠만 자는 아가씨를 내내 지키고 있을 사용인도 없겠지.

    시아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봄 내음이 묻어나는 햇살에 발치가 따뜻했다. 창 너머로 만개한 벚꽃들을 발견한 시아가 무의식중에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였다.

    “누워 있어요. 아직 마음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 겁니다.”

    “…라크?”

    시아가 누워 있던 침대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엔 작은 책상 위로 산더미 같은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크시스가 평소처럼 시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라크시스를 오래 보아온 시아는 그가 전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걸음엔 초조함이 묻어있었고, 얼마 안 가 그 좁은 방을 달리다시피 한 라크시스는 몸을 반쯤 일으킨 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시아,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대로 영영 어떻게 되어버릴까 봐…….”

    라크시스가 있는 걸 보니 자신은 아직 마도 시대에 있는 모양이다.

    시아는 자신이 시간 여행을 한 게 아니라, 잠을 꽤 오래 잤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어떻게 되긴요. 자, 날 봐봐요. 아픈 곳도 없고, 다친 곳도 없고. 이렇게 멀쩡한걸요?”

    그러나 라크시스는 시아를 볼 겨를도 없이 저를 꼭 껴안은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상했다. 자신이 단순히 잠만 잤다면 그가 이렇게 힘들어할 리가 없는데.

    시아는 말없이 라크시스를 끌어안았다. 그의 고개가 파묻힌 제 어깨가 점점 젖어 들고 있었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그를 위로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죠? 어릴 적엔 맨날 늦잠을 자서 헤이든에게 혼난 적도 있었는데 말예요. 지금도 의술원이 아니었으면 매일같이 늦잠 잤을걸요.”

    “시아. 오늘이 며칠인지 알고 계십니까.”

    시아는 그를 위로하려다가,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라크시스를 마주하곤 멈칫했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데요?”

    라크시스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시아의 불안감도 커져갔다.

    열린 창으로 날아온 꽃잎 하나가 파편화된 기억들 속에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시기의 계절은 겨울이나 다름없는 가을이었다. 별궁 밖 나무들이 낙엽을 벗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던 계절이었단 말이다.

    라크시스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3521년 3월이에요. 당신 일기장의 마지막 시간 여행이 시작되는, 바로 그 3521년의 봄입니다.”

    시아는 멍하니 앉아있다, 불현듯 깨달았다.

    완전히 어그러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시간 여행이 운명대로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음을.

    * * *

    무려 석 달 동안 잠들어 있던 시아가 깨어난 일로 켈튼저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누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요르문.”

    “같이 식사하고 싶었어요. 한집에 살면서 식사를 같이 못 한 게 너무 오래되어서…….”

    라크시스의 부축을 받아 앉게 된 식탁엔 시아가 소화하기 편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곁에 앉아 그녀가 먹기 편하게 고기를 썰어 가져다주었다. 유모가 어린아이에게나 해줄 법한 행동이었으나 요크 부인은 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묻진 않을게요. 오랜만에 마주하는 자리이니, 누님이 편하게 계셨으면 하니까요.”

    시아는 세 달 동안이나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려 줬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제게 밀어주고 있는 어린 날의 양부를 보며, 문득 그가 정말로 가족 같다고 느꼈다.

    칠십 년 후의 요르문은 시아 켈튼의 진짜 가족이었지만 마도 시대의 요르문은 거짓으로 묶인 관계였는데…….

    “주방장이 누님이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구워낸 새끼돼지예요. 누님이 예전에 욕탕에서 잠드시는 바람에 이걸 드시지 못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나 시아는 알고 있었다. 요르문이 직접 주방에 일러 오래전 그녀와 함께하지 못한 만찬에 올랐던 음식들을 준비하라고 말했음을.

    “…고마워. 요르문.”

    “뭘요. 누님은 제 유일한 누님이시잖아요.”

    그 말에 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낯선 세계에서의 여행. 시간 여행을 시작한 이래 시아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마도 시대가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그녀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고, 요르문 켈튼과 라크시스 옌이라는 대마법사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시아에게는 봉인이 없는 칠십 년 후의 미래가 더 안전하고 익숙했다.

    요르문에게 누님이란 말을 들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에 힘이 없어서인지 마음까지 괜히 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켈튼저에서 일상적인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연달아 터지는 사건을 해결하고 봉인을 찾으러 다니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으아, 누님. 울지 마세요. 제가 그러니까, 누님을 슬프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아니, 그냥, 흑, 하품이 나오는 거야, 우는 게 아니라, 흡…….”

    이 여행도 언젠간 끝이 나겠지, 하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고, 라크시스에게서 3521년이라는 연도를 듣자마자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벌써 마지막 봉인만 남겨 두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 봉인을 지난번 맨덜랜드에서 찾아버렸다면, 모든 건 그때 끝나 버렸을 수도 있었다.

    “제가 괜히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나 봐요. 아침을 그냥 방에 올려드릴 걸 그랬어요.”

    “아냐, 같이 먹는 거 좋아. 이렇게 먹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그리고 너무 방에만 있어도 답답해. 그렇죠, 요크 부인?”

    시아는 풀죽은 요르문을 곁눈질하며 지나가던 요크 부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눈치 빠른 부인은 아가씨의 속마음을 재빨리 읽어내고, 시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럼요. 아가씨는 침대에서 벗어나실 필요가 있지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여러모로 도와주시면 더욱 좋을 테고요.”

    그 후로 식사는 고요하고도 아주 오래 이어졌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시아의 기침 소리, 해묵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차분한 목소리.

    시아는 라크시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요르문과 라크시스에게서 지난 넉 달 동안의 일들을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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