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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40)화 (240/292)
  • 240화 

    좁은 틈을 두고 층층이 올라간 수도의 주택들 중 한 테라스에서 흰 커튼이 펄럭였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테라스에 모여들어 행차를 구경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었다.

    나부끼는 커튼 사이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새까만 총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흰 커튼과 붉은 휘장, 흩날리는 꽃가루 사이에 숨은 총신이 황금 마차를 따라 움직였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라크!”

    시아의 외침은 곧 휘몰아치는 바람에 먹혀 사라졌다.

    라크시스의 손바닥이 그녀의 눈을 가린 것도 잠시, 짧은 비명과 함께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주변의 벽을 짚으며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의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그들이 있는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집이었다. 불 한 점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라크시스는 테라스의 역광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앓는 소리를 내며 기절한 저격수가 있었다. 총은 저 멀리 치워져 있었다.

    시아는 그제야 라크시스가 자신을 데리고 저격수가 숨어있던 테라스로 공간이동을 했음을 깨달았다.

    “저야 당연히 괜찮죠. 한 게 없는걸요.”

    “자, 이리 와봐요. 어지럽진 않습니까?”

    저격수는 무형의 힘에 묶여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라크시스의 손짓에 먼지 묻은 커튼이 떨어져 저격수를 미라처럼 휘감았다.

    라크시스는 그를 자연스럽게 넘어와 시아를 살폈다. 예상치 못한 공간이동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라크시스의 손길은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갑자기 마법을 쓰는 바람에 미처 당신을 살피지 못했어요. 멀미가 있었을 텐데, 속은 괜찮고요?”

    두 사람의 거리는 은쟁반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에 불과했다.

    밤하늘에서 왈츠를 추던 그 날처럼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라크시스가 한 건 뉴지 캡 밑으로 흘러내린 시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그녀의 손을 붙잡아 치유 마력을 흘린 것뿐이었지만 시아는 과보호처럼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가슴께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시아는 애꿎은 소매를 구기며 그의 목울대만 바라보았다.

    “저 나름 공간이동 마법 경험자예요. 이 정도론 끄떡없다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라크시스는 담백한 대답과 함께 시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역시 그는 시아와 정식으로 어떠한 관계가 되기 전까진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시아는 아쉽다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결국 3520년 의회 개회식 행차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아는 천천히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방과 테라스의 경계를 지나자, 밤이 낮이 되듯 주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시아는 어둠에 잠긴 방을 돌아보았다. 기절한 저격수의 옆에는 시커먼 장총이 뒹굴고 있었다. 만약 저 총의 방아쇠가 그대로 당겨졌다면, 지금의 평화는 존재할 수 없었겠지.

    거리의 사람들은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을 뻔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행차를 즐기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녀가 쏘아 올린 발언, 황제가 저격을 당해 죽는다는 한마디에서 시작된 변화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암살범이 이번 행차에 나타날 거란 추측이 맞았네요.”

    라크시스는 어느새 시아의 옆에 다가와 함께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황제의 마차는 그들이 위치한 테라스를 지나가고 있었고, 총성 대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아르카나를 물들였다.

    “…제가 이렇게 손쉽게 과거를 바꿔 버렸다는 거죠.”

    “지난 이틀 동안에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손쉽다고 하진 못할 텐데요.”

    라크시스의 말에 시아는 피식 웃었다.

    봉인과 저주를 감지한다고 황제의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마다 마류 탐지기를 빼곡히 붙이던 지난 이틀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배치를 바꿀 수 없어 걱정했던 근위병과 마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봉인의 이상 마류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났다. 정확히는 과거가 완벽하게 달라져 버렸다.

    시아는 복잡한 마음을 곱씹으며 조용히 물었다.

    “잘한 일일까요?”

    “칠십 년 후의 미래가 당신이 알던 대로 흘러가리란 장담은 못 하겠군요.”

    테라스 난간에 기댄 시아의 손등 위로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겹쳐 왔다. 라크시스의 손바닥과 닿은 부분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왜인지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그의 입가엔 짓궂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어쩌면 이 일로 칠십 년 후의 알리나의 증손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농담 반, 진담 반. 시아는 라크시스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황족의 운명을 건드렸으니, 먼 미래의 헬릭스가 영향을 받는 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라크, 헬릭스 황자 전하 때문에 암살을 막은 건 아니죠……?”

    “설마요. 저격수를 잡은 건 황제 폐하의 신실한 신하로서 한 행동인걸요.”

    그러나 시아는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저 남자를 덜컥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라크시스 옌이 저 몰래 해온 일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라크시스는 제 목표를 위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철저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봉인을 위해 비행선도 만드는 남자에게 있어 경쟁 상대를 치워 버리는 건 코 풀기보다도 쉬운 일일 터.

    “전 분명 말했어요. 라크 때문에 제가 누구를 거절했는지 말예요.”

    “이런, 제가 지금 다른 남자를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크시스의 고개가 시아를 향해 훅 기울었다. 시아는 움찔 굳었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이렇게 가깝게 다가오는 것만큼은 익숙지가 않았다.

    그림 같은 얼굴이 시아의 표정에 따라 반응을 바꾼다. 그녀가 당황하자, 긴장하면서도 살짝은 즐거운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유화로 부드럽게 색을 올린 듯한 입술이 움직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속삭였다.

    “전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요. 누굴 선택하든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할 겁니다.”

    거짓말.

    시아는 눈을 흘기다가, 자신의 솜털 하나까지 훑어내리는 그의 시선에 결국 항복했다.

    라크시스 옌이라면 시아 켈튼이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판을 설계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승복이란 그 판이 깨어질, 아주 희박한 확률을 뜻했다.

    ‘내가 이미 본인을 선택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러니까 저 말은 라크시스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과도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자면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애원과도 같았다.

    만일 시아가 라크시스를 거절한다면 그는 분명 예전처럼 폐인이 될 터였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속이 상했다.

    “…제가 라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물론 당신의 행복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요.”

    “말이나 못 하면요.”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라크시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돌아가서 이자를 조사해 봅시다. 마지막 봉인도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아무래도 동관 공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라크시스는 애꿎은 암살자를 허공에 둥둥 띄웠다. 버려진 총에서 장전된 총알을 꺼내던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총은 제국의 물건이 아니군요.”

    “제국의 물건이 아니라면, 어디 건데요?”

    “총신에 이렇게 세로로 일련번호를 새기는 건 서대륙의 제조 방식입니다. 이상하군요. 켈튼 코퍼레이션에서 제국군에 납품하기 시작한 조작형 조준경이 달려 있는데, 그렇다는 건… 시아?”

    라크시스는 약실이 빈 총을 내버려 두고 시아에게 다가갔다. 시아가 신호기를 든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라크, …이건 봉인인가요?”

    신호기에 달린 버튼마다 붉은빛이 가득했고 나침반 바늘이 갈피를 잃고 마구 돌아가고 있었다.

    과부하가 걸린 신호기가 덜덜 떨리다 못해 뜨거워져, 시아는 그만 신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 시아의 주머니에서 쨍한 경고음이 울렸다. 아르카나 거리에 설치한 마류 탐지기가 보내온 신호가 일제히 도착한 것이었다.

    전신의 솜털이 바짝 섰다.

    불길한 기운, 죽음의 냄새.

    그간 보이지 않았던 기이한 붉은 마력이 연기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주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저주였다.

    시아는 붉은 마력을 따라 다급하게 테라스로 달려 나갔다. 햇빛에 비친 시아의 머리카락이 일순 은발처럼 빛났다.

    “라크, 저 반대편에!”

    대로 건너편, 시아와 라크시스가 위치한 건물과 대각선을 이루는 건물에도 층마다 수많은 테라스가 있었다.

    그중 사오 층 정도 되는 높이의 한 곳. 저격수가 있었던 이곳과 달리 커튼으로 가려져 있지도, 빈집으로 위장하지도 않았다.

    그 테라스에 있는 한 남자가 다른 구경꾼들처럼 난간에 몸을 기대고 행차를 내려다보다, 시아를 발견하고 검은 실크햇을 까딱여 보였다.

    남자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꽁무니를 보이기 시작한 황제의 마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찬란한 금발 밑으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그는 카얄이었다.

    라크시스의 주머니에 있던 통신 마도구에서 한 박자 늦게 다급한 차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기랄, 블레어저에 보낸 마법사들의 연락이 끊겼어! 내 말 듣고 있나? 옌 경, 라크시스 옌!

    그 이후, 수 초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욕설과 함께 라크시스가 시아를 지나쳐 테라스 밖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져 카얄이 있는 테라스에 나타나는 사이, 군중 속에서 반짝이는 물체 하나가 황제의 마차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시아의 몸은 그 물체가 폭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폭탄이 이윽고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먹먹하게 울리며 일순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비명으로 바뀌고, 마차를 뒤따르던 근위병의 말들이 놀라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으나, 황제의 마차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뒤집히거나 부서진 곳 없이 멈춰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폭발음에 비해 사고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떨어지는 불티와 도로의 파편을 피해 웅크렸던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근위병들이 급히 달려가 황제의 안위를 살폈다. 알리나는 놀란 얼굴이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근위대장에게 물었다.

    “암살 시도인가?”

    “폭탄이 터졌는데, 제대로 터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또다시 공격이 이어질지 모르니 어서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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