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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28)화 (228/292)
  • 228화 

    담담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라크시스의 대답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것처럼 차분하고도 고저 없이 매끄러웠다.

    “가멜이 제국에 복속되어 수탈당하게 된 데엔 당신보다 제가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심지어 전 황제와 의회를 가로막을 수 있는데도 그저 세월이 흐르는 대로 살기만 했죠.”

    “하지만 라크는…….”

    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고대 마법사인 라크시스 옌은 제국이 가멜을 집어삼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황제와 총리의 목숨을 인질로 식민 전쟁을 멈추라고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아는 라크시스를 비난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마도 시대의 귀족가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식민지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가멜에 대한 이야기들을 멋대로 믿고 멋대로 오해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녀는 이런 죄책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나라가 세워지고 스러지는 것을 보아오면서 정복과 약탈의 참혹함에 무뎌졌나 봅니다. 저도 한때는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며 황금성의 주인에게 마법을 휘두른 적이 있었죠.”

    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금성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맥락상 황금성의 주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시아는 그제야 라크시스의 대답이 이토록 담담한 이유를 깨달았다. 라크시스도 한때 그녀와 같은 고뇌와 죄책감에 시달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거리낄 것이 없었던 마법사인 그는 오래전, 가엾은 이들을 위해 실제로 행동을 했었고, 그 결과도 몸소 경험했다.

    연기처럼 표정이 사라져 가는 그의 얼굴로 미루어보아, 황금성의 주인에게 마법을 휘두른 이후 벌어진 일들은 그리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 듯했다.

    시아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잘못은 모두가 한 겁니다. 그러니 시아, 부디 당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혼자 괴로워하지는 말아요.”

    결국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죄책감은 여전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슴 한구석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 끙끙대며 미안해하기만 하면 달라질 게 있겠는가. 더 이상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에서 태어난 자로서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이럴 때마다 라크가 정말 오래 살았다는 게 느껴지긴 하네요.”

    “이런, 그런 이야기는 곤란한데.”

    라크시스는 농담조로 말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유려한 언변과 조각도 울고 갈 완벽한 얼굴로 나이를 감추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언급이 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그것도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온 스물여덟, 시아 켈튼 앞에서는 더더욱.

    라크시스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라크시스는 품 안에서 빳빳한 봉투를 꺼내 들었다. 새하얀 고급지 위에 빨간 인장이 보란 듯이 찍혀 있었다.

    “리암 블레어가 어지간히 급하긴 했던 모양입니다.”

    “그게 뭐예요?”

    “대공이 사고를 친 이후 받은 겁니다. 리암 블레어가 장을 맡고 있는 승마 클럽 초대장이에요.”

    자세히 보니 이미 열어본 봉투였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에서 봉투를 집어 들어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초대받은 날짜는 지나도 한참은 지난 날짜로, 그들이 로렌시아 호에서 내린 후 저택에서 쉬던 때였다.

    “안 갔군요?”

    “안 갔죠. 구태여 총리와 얽힐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럴 시간도 없었고요.”

    그러면서 라크시스는 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와 함께 있을 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 노력했단 표정이었다. 은근히 칭찬을 바라는 눈길은 덤이다.

    시아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크시스는 제국이 저지른 과거의 죄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우울해지던 자신을 달래주려고 했다. 요즘은 달래주려는 것 그 이상으로 요망하게 굴지만.

    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라크시스의 뒷목 부근께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마치 쓰다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에, 라크시스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짙은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을 떼어내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맞붙였다.

    그렇게 그녀의 표정이 풀린 걸 확인하자, 라크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봉투를 도로 품에 넣었다.

    “뭐, 이번 맨덜랜드의 일로 리암 블레어가 제게 더 이상은 연락하지 않을 테지만요.”

    “하긴 그렇겠네요.”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는 시아와 라크시스가 빈집털이를 한 탓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이 모은 자료를 모두 챙겼다.

    라크시스의 코트 안주머니나 시아의 슈트케이스처럼, 보험사정관의 조수로 분장한 그녀가 내내 들고 다니던 브리프 케이스도 공간이 왜곡된 가방이었다.

    시아가 브리프 케이스를 활짝 열자, 어린아이 키 높이만큼 쌓여있던 증거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두 사람은 서재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달리아 벤슨은 어떻게 할 거예요?”

    “데려가야겠죠. 아까 위험한 명령을 받은 듯했으니, 일단 저주를 풀고 차차 대화를 해볼 생각입니다.”

    붉은 옷의 여자는 떠나기 전 분명 ‘모두를 죽여라’라고 달리아에게 명령했다. 몸싸움조차 제대로 못 할 것처럼 보이는 달리아에게 그런 명령을 했다는 건, 마법이나 저주로 사람을 해하라는 뜻과도 같았다.

    “미스 벤슨이라면 붉은 드레스의 여자가 누군지도 알고 있겠지요.”

    두 사람은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의 불 꺼진 벽난로엔 작은 불티만 남아 잿더미를 점점이 빛내고 있었다. 달리아 벤슨은 처음 묶어놓은 모습 그대로 여전히 소파에 기절해 있었다.

    라크시스와 시아는 달리아 벤슨과 함께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를 떠났다. 양손 가득 수확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 * *

    시아 일행이 모두 모이게 된 건 맑은 어둠이 노을 위로 드리워질 때쯤이었다.

    봉인에 대해 알아볼 것이 있어 오래 걸린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요르문과 루드윅은 라크시스와 시아가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달리아 벤슨의 저주를 풀 마법진을 그리고 나서야 객실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달리아 벤슨이라고?”

    “보시다시피.”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결박된 채 기절해 있는 여자를 보곤 요르문은 마른세수를 했다.

    누가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납치 감금 사건이라며 곧바로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랐다.

    뒤이어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발견한 요르문은 경악했다. 마법진이라니. 언제적 마법이란 말이냐.

    마법진은 마도구와 기계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운용되는, 요즘 마법과는 거리가 먼 마법 방식이었다.

    ‘이젠 아무나 하지도 못하는 마법이기도 하지.’

    눈알이 빠질 만큼 작은 글씨로 고대어를 빽빽하게 채워 넣은 마법진은 따라 하려야 따라 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했다.

    저걸 일일이 그리고 있었다는 말 아니야?

    그러나 마법진을 그린 당사자는 태연하기만 했다.

    “고대의 저주는 고대의 방식으로 풀어야지. 자네의 파장 감지기에는 영향이 없도록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인용 소파에 팔다리가 묶여 기절한 여자는 정말로 거스 벤슨이 보여줬던 사진의 인물과 닮아있었다.

    시아는 달리아가 스스로 달리아 벤슨인 걸 시인했다고 했다. 그러곤 뒤이어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요르문은 저가 알아 온 정보를 누님이 알면 얼마나 놀랄까, 하며 은근한 기대와 함께 돌아왔다가 시아와 라크시스가 가져온 어마어마한 증거들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요르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이제 루드윅에게 붙잡혀 또다시 시달리는 중이었다.

    “로드 켈튼, 뤼스에서 붉은 옷의 강령술사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저한테도 알려 주셨어야지요.”

    “자넨 괴담 수집가라면서 나보다 괴담 소식이 늦으면 어쩌란 말인가? 그보다 내가 더 이상 봉인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네 그러다 다쳐!”

    “하지만 전 이미 한배를 탔다고요. 슈테른베슈테크에서 그렇게 함께 고생해 놓고, 이제 와서 절 버리시려는 건 아니시죠?”

    “버리긴 뭘 버려. 자네가 위험에 처하든 말든 이단의 뒤를 캐도록 내버려 두는 게 자네를 진짜 내버리는 거란 건 모르나 보지?”

    난롯불 열기에 테이블에 올려둔 머그의 옆면이 달아올랐다. 시아는 따뜻해진 머그를 감싸 쥐고 요르문과 루드윅을 지켜보았다.

    “이번 맨덜랜드의 유령선도 저 때문에 알게 되신 거잖아요.”

    “그래, 그건 고맙다고 생각해. 하지만 데이먼 포드를 봐. 자네도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데이먼 포드가 왜?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크시스가 대신 대답했다.

    “시아. 오늘 아침 제가 그를 만나기로 했었다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은 나요. 존 베버를 만난 이후부턴 계속 까먹고 있었지만요.”

    요르문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누님. 데이먼 포드가 연락 두절이 됐어요. 아무래도 황혼 국교회에서 손을 쓴 모양이에요.”

    [연락 없이 맨덜랜드를 급히 떠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하네. 전달하려 했던 자료는 침대 옆 책상의 두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네. 자네도 부디 몸조심하길 바라지.]

    “전달하려 했던 자료라면…….”

    “중요한 자료이긴 하지만 누님이 오늘 알아내신 정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예요. 황혼 국교회에 자금을 대는 귀족이 있다는 것과 그 귀족이 수도 출신인 것 등이었어요.”

    내내 시끄럽던 옆통수가 어느 새부터 조용해져 있었다. 루드윅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데이먼 포드가 언급된 이후부터 울적한 낯으로 모닥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집는 그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데이먼 포드와 친하다고 했었나. 그랬다면 그를 걱정할 만도 했다.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이니 더더욱 말이다.

    라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아 벤슨을 살폈다. 그녀는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에서 기절한 이후 눈을 뜨지 않았는데, 라크시스는 그 이유를 저주가 풀리는 고통 속에서 의식이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달리아가 앉은 소파 주변 바닥이 하얀 마력으로 넘실거렸다. 빼곡히 그려 넣은 마법진과 수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었다.

    달리아에게서 돌아오는 라크시스의 은발이 전에 없이 눈부시게 빛났다. 요르문은 그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소파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난 그동안 리암 블레어에게서 저주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라크시스는 요르문의 맞은편이자 시아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대꾸했다.

    “그건 자네가 그동안 의회를 나가지 않아서겠지.”

    “그러는 자네는 리암 블레어가 그런 자인 줄 알았나? 의회니, 클럽이니, 하는 데를 나보다 자주 다녀놓고도 리암 블레어가 이단인 걸 몰랐다는 건 라크 자네가 무능하단 뜻이겠지.”

    “무능하다니. 뚫린 입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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