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그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셋을 세면 이리로 와요.’
‘라크에게 안기라고요?’
라크시스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공중으로 날아오르기라도 할 모양인가보다.
공간이동은 시간이 걸려서 안 되고, 하늘로 떠오르는 건 총알이 날아오는 것보다 빠르단 소린가.
그러나 그녀가 되물어볼 틈도 없이 라크시스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셋.’
“무슨 수작이지? 허튼 생각 마라. 그랬다간 이 총알이 요르문 켈튼의 잘난 머리에 그대로 박힐 테니까.”
‘둘.’
“암구호라도 나누는 모양인데. 고대 마법사, 당신도 알잖나? 마법이 만능은 아니란 걸 말이야. 벌집이 되어 숨이 끊어진 자를 살리는 마법은 없지.”
시아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라크시스는 믿지만, 스물여덟 평생 상식으로 알고 지냈던 물리 법칙들도 무시할 순 없었다.
날아오는 총알을 눈으로 보고 피하거나, 총소리를 듣고 피하거나 하는 일들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는 총이 발사된 순간, 그 사실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몸 어딘가가 뚫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시아는 눈앞의 고대 마법사를 믿기로 했다. 왜인지 여유로워 보이는 라크시스를 향해 몸을 던지며, 시아는 마지막 숫자를 셌다.
‘하나!’
라크시스의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그가 품으로 뛰어든 시아를 받아안은 순간.
“뭐, 뭐야!”
그 누구의 총알도 발사되지 않았다.
보험사정관들은 당황하여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하지만 리볼버에선 쩔꺽쩔걱 소리만 날 뿐, 튀어나오는 총알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이걸 찾나?”
고대 마법사가 주먹 쥔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가 손을 펴자 수십 개의 총알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하게 굴렀다.
동시에 보험사정관들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들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서로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웨스트스트릿은 졸지에 아수라장이 됐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웃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시커먼 남자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보곤 창문을 도로 걸어 잠갔다.
“정신 차려라! 위대한 어둠의 자식들이 간악한 빛에 굴복해선 안 된다!”
달리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하지만 고작해야 부인 된 몸으로 남자들의 싸움판을 말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달리아는 방아쇠를 당겼다. 헛손질이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리아는 제 손에 총이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라크시스 옌, 대체 어떤 사특한 술수를 쓴 거냐!”
“이런. 내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군.”
퍽―
그녀의 뒤통수에서 알싸한 고통이 일 정도의 큰 소리가 났고, 달리아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녀의 뒤엔 지팡이를 든 라크시스가 시아를 안고 서 있었다.
달리아의 기절과 동시에 보험사정관들은 싸움을 멈추고 비척비척 거리를 떴다. 달리아를 후려갈긴 지팡이를 빙글 돌려 다시금 신사처럼 쥔 라크시스는 품 안의 시아를 기분 좋게 내려다보았다.
“해결됐네요. 어떻게든 말이죠.”
* * *
“공간이동은 어렵다면서요.”
“그래서 못한다고 했잖아요. 발밑에 바람이 고여 드는 걸 봤으면 저들이 당신을 쏴버렸을걸요.”
그래서 사람 대신 총알을 옮겼다, 라.
시아는 이걸 유능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저한테는 공중으로 날아오른다고 했으면서.”
“지금이라도 날아오를 순 있어요. 그렇게 해드릴까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여전히 양팔로 가둔 채였다. 그는 시아의 이마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는 농담으로라도 총을 맞겠단 소리는 하지 말아요. 제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시아는 덜컥 할 말을 잃었다. 잠깐 사이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심장이 말간 눈동자를 통해 여과 없이 그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오래전, 정체불명의 시간 여행자를 실험체로 삼으려 했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시아는 그의 변화를 새삼 느끼며, 조용히 사과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마침내 시아와 라크시스는 웨스트스트릿 168A번지에 입성했다. 달리아 벤슨은 노끈으로 손발을 단단히 묶고, 수건으로 입까지 막아 응접실 소파에 던져두었다.
주방이나 뒤뜰에서 나타난 사용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시아는 약에 취해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을 보고 라크시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아르카나의 창부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군요.’
그들의 헐벗은 옷차림은 마치 창관에서 일하는 자들 같았다. 이들도 붉은 드레스의 여자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아는 좁고 층이 높은 케르디안 하우스의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한참 후 그들이 발견한 건, 제국에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어마어마한 사실이었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는 실존하는 회사였군요.”
라크시스는 서재의 반쯤 부서진 책상 앞에서 탄식했다. 서재며 침실, 주방까지 빠짐없이 돌며 모아온 증거들이 어린아이 키 높이만큼 쌓였다.
“이건 미라 장부네요. 유령선이 입항할 날짜와 시간이 다 적혀 있고… 이건 이미 거래가 끝난 유령선들이고요. 당장 오늘 밤에도 유령선이 들어오네요.”
크고 작은 종이 쪼가리들을 이리저리 들춰보던 시아가 구시렁거렸다. 처음에야 사람을 사고팔았던 기록에 경악했지만, 이젠 하도 봐서 질릴 정도였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서재의 책장 앞으로 불러냈다. 그는 양장본으로 위장한 두꺼운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시아. 황혼 국교회의 자금 출처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되어 모서리가 삭아 찢어지고 종이는 누레진 서류들로, 타자기가 없던 대항해시대에 자필로 일일이 기록해 둔 주식과 채권, 특허권, 법적 외교권과 독점 무역권들이었다.
라크시스는 그중 한 장을 꺼내어 시아에게 내밀었다.
[주식회사 남대륙 회사의 독점 무역권 및 외교권 일체의 반환에 대한 협약서]
3498년에 남대륙 회사가 파산하면서 황실과 의회에서 남대륙 회사에 일임했던 가멜에 대한 권한을 반납한다는 증서였다.
참 많이도 해 먹었구나. 칠십 년 후에 무역을 이런 식으로 진행했다면 분명 주변국들에게 뭇매를 맞고, 가멜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았을지도 몰랐다.
남대륙 회사 대표의 서명은 익숙한 철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표 : 스테판 블레어]
“스테판 블레어……. 라크,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시아가 작게 되물었다.
“스테판은 리암 블레어의 조부입니다. 남대륙 회사가 파산하던 당시, 제국의 총리이자 남대륙 회사의 최대 주주였죠.”
라크시스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실제로 남대륙 회사 운영에 깊게 관여했던 자였습니다.”
남대륙 회사 맨덜랜드 지부가 실존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3498년, 남대륙 회사가 파산하던 해, 남대륙 회사가 위임받았던 권한은 의회와 황실로 돌아왔다.
이 당시 총리였던 스테판 블레어는 비록 황실과 의회로 모든 권리가 돌아오긴 했으나 황실과 의회가 가멜을 비롯한 남대륙 현지 사정에 어두운바, 그간 남대륙 회사가 식민지를 관리해 온 세월을 언급하며 그들을 의회 산하 기관으로 두고 현장 관리를 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 주장했다.
요약하자면, 주식회사로서의 남대륙 회사는 사라졌으나 의회의 수족으로서의 남대륙 회사는 남아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회사가 아님에도 회사라는 이름을 유지하게 된 것은 관습과 전통을 사랑하는 제국민의 성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튄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세금을 횡령했던 거네요.”
“가멜 현지에 대한 관리 허가는 스테판 블레어가 했는데 심지어 관리 주체도 스테판 본인이었던 거죠. 이러니 그의 손자인 리암이 유령선에 그토록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고도 멀쩡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리암 블레어는 조부가 남긴 화수분으로, 제힘은 하나도 들이지 않고 카얄을 돕고 있었단 뜻이다.
라크시스는 계속해서 시아에게 빛바랜 서류들을 보여주었다.
“스테판 블레어 이후 가멜 현지에서 면화, 옥수수, 카카오 등의 작물에 대해 세율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군요. 제국엔 기존 세율대로 세금을 걷었다고 보고된 듯합니다.”
그러나 의회의 누구도 가멜 현지의 세금 보고 자료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이를 검토하는 것도, 최종적으로 세율을 승인하는 것도 스테판 블레어였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보던 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옛날에… 마도 시대 당시 가멜에 대기근이 들어 제국으로 수입되는 곡물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당시 굶주린 가멜인들이 제국 식민정부에 저항했다는 내용도요.”
라크시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기근이 든 적은 없었습니다. 광룡의 부활까지 남은 마도 시대는 고작해야 이 년일 테니, 3522년까지 가멜에 기근이 들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거짓이 되겠군요.”
시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배신감과 미안함.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일어났던 일이 아닌, 한 세기 전의 일이었으나 시아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3400년대의 가멜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리암 블레어가 어째서 총리직에 목숨을 거는지 알겠군요.”
“총리직을 유지해야만 조부의 비밀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라크시스는 손톱을 뜯고 있는 시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잘못은 아닙니다. 책임을 느낄 순 있어도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미래에서 온 사람이고, 이곳은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잖아요.”
시아는 손톱을 더 이상 뜯지 못하도록 제 손을 감싸 버린 라크시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따스하다.
전에도 이랬었지.
시아는 오래전, 씨즐턴으로 향하던 기차에서 라크시스에게 받았던 위로를 떠올렸다. 그땐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벌어진 테러 때문에 죄책감에 펑펑 울고 있었더랬지.
그는 시간이 바뀌고, 역사가 바뀌고, 미래가 바뀌는 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시아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이미 벌어진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지만, 라크시스가 건넨 위로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도 시대의 영광 속에 사는 저 역시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은 있겠지요. 제가 입은 이 코트도, 오늘 아침에 먹었던 음식들도 그들의 피땀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