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그러네요. 그때가 마지막이겠네요.”
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성급히 눈물을 지워냈다. 라크시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말도 없이 갑자기 울어버리는 모습이 얼마나 볼썽사납겠는가.
시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이미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다. 시아의 눈가가 발개진 것도, 그녀의 목구멍이 먹먹하게 잠겨버린 것도.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하며 울음을 삼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같은 심정이었기에.
“시아. 우리가 카얄을 무사히 막는다면 광룡의 부활도 마도 시대의 종말도 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이 봉인을 이미 여섯 개나 손에 넣은 상태이니, 남은 봉인이 한 개든 두 개든 카얄도 광룡으로 부활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겨 귀 뒤에 꽂아주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녀의 예쁜 얼굴이 오롯이 보인다. 라크시스는 엷게 웃으며 시아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시아. 당신은 몇 년도에 살고 있죠?”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눈가며 입가며 빨갛게 달아올라선 그런 표정을 지으니 고양이가 아니라 토끼 같아 보인다. 시아는 잠시 머릿속으로 셈을 하는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3587년이요. 홈커밍데이였던 5월 17일에 처음 시간 여행을 하고 나선 일주일 정도 지났나 싶은데요.”
3587년이라. 앞으로 육십칠 년 하고도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남자에게 한 세기도 안 되는 시간은 찰나와도 같았다.
“만약 우리가 카얄을 무사히 막아낸다면 말입니다.”
라크시스가 나직이 말했다.
“칠십 년 후에서 저를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크.”
시아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불현듯 깨달음이 뇌리를 강타했다. 라크시스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으로 수천 년 동안 살아온 고대 마법사였다. 만일 종말에서 그가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칠십 년이란 세월을 더 살아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시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졌다.
기다려 달라는 건.
내가 생각한 그런 뜻일까.
“제가 3517년의 당신에게 도달할 때까지, 시아. 제가 감히 기다려달라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라크시스의 손이 어느새 시아의 손에 얽혀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그대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남자의 손이 시아의 손을 찾아내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붙들었다.
“온 힘을 다해 만나러 가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설령 마력을 모두 포기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향해 달려갈게요.”
시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홍조가 피어오른 뺨으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 힘주어 굳게 다문 입술을 열어주진 않았다.
라크시스는 절박해졌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심정일 거라 생각했는데.
쿵쿵. 빨라진 박동에 관자놀이가 아릿하게 울렸다. 라크시스는 처음으로 초조함을 느꼈다. 그녀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남들은 모두 거절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혼자만 거절이라 여겼던 그날의 고백.
확실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고대 마법사에게 이런 미묘한 반응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라크시스는 볼 안쪽을 짓씹었다. 시아의 머리를 열고 그 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
왜 답을 주지 않는 겁니까.
그때였다.
“라크, 그러지 않아도 돼요.”
시아는 어렵게 입을 뗐다. 후에 라크시스는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던 그 순간까지를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시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돼요. 라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와도 괜찮아요.”
시아의 얼굴은 이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겨우 견디며 작게 속삭였다.
“전 꽤 참을성이 좋거든요.”
그 순간, 라크시스의 이성이 뚝 끊겼다.
“라크!”
라크시스는 시아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머리가 온통 시아로 가득했다. 열기로 어지러운 가운데에도 시아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모습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참을성이 좋다니. 그런 아찔한 말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 가지고 자신을 이리도 흔들어놓는가.
“요, 르문이 보겠어요!”
“보라고 해요.”
시아의 새된 소리가 라크시스의 가슴팍에 묻혔다. 그의 몸에서 시작된 둥근 바람이 두 사람을 서재의 소파로 옮겼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사고가 마비된 라크시스에겐 그런 장소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시아는 이제 라크시스에게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몸이 길쭉한 소파에 함께 떨어졌다. 라크시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밑엔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시아가 누워있었다.
소파의 팔걸이에 늘어진 머리카락이며 급작스러운 공간이동으로 흐트러진 옷매무새까지. 요크 부인이 입혀둔, 목 끝까지 단추로 꽉 잠긴 보수적인 드레스가 맨 위의 단추 두어 개가 떨어진 채 열려 있었다.
“하아…….”
그녀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들려왔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자석에 이끌리는 철처럼 라크시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명치 부근이 울렁거렸다. 시아에게서 이런 눈빛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정염이었다. 녹아버린 공기가 뚝뚝 떨어져 피부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몸이 온통 뜨거웠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쳐버리면 어쩌나.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린다면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
솔직한 심정으론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라크시스답지 않은 사고였다. 사실 라크시스는 시아가 자신을 기다려준다고 했을 때부터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얼굴은 종이 한 장이 겨우 들어갈까 말까 할 정도로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코끝의 솜털이 스치며 간지러운 소름이 확 돋았다. 햇살에 비친 시아의 눈동자가 와인처럼 빛났다. 투명한 각막 안으로 홍채 주름까지 모두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시아가 자신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랑스럽다.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더 다가가면 어떻게 될까.
부드러운 입술에 내가 닿는다면. 숨을 얽고, 그녀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껴본다면.
시아는 눈을 감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비의 날개 같은 속눈썹이 그녀의 눈가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건 라크시스에게 달려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라크시스는 숨을 삼켰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다가가면 될 일이다.
아주 조금만 더.
그러나 라크시스는 그대로 멈췄다. 시아가 눈을 뜨고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라크……?”
마치 왜 더 다가오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다. 살짝 찡그린 미간이. 아, 사랑스러워. 이러니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크시스는 시아의 얼굴을 지나쳐 그대로 시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에게 안긴 채로 잠시 있다가, 그녀의 체취를 폐부 깊이 들이켜곤 도로 일으켜 세웠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단정하게 해주었다. 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가 눈빛으로 말했다. 밖에서 누가 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곧바로 서재의 문이 열리고, 요크 부인이 들어왔다. 무슨 소식을 가져온 건지 요크 부인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요크 부인이 다가오자 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까 분위기를 못 이겨 일을 치렀다면 꼼짝없이 들킬 뻔했다.
라크시스는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를 진작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더 가까워지지 않은 건 요크 부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고대 마법사였으니까.
자고로 신사는 숙녀에게 매너를 갖춰야 하는 법이다.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최고의 기억만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하며 반지를 끼워주고 싶었다.
시아 켈튼에게 허락을 받은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유일한 남자가 되어도 좋다는 허락.
“아가씨, 얼른 나와보셔요! 황궁에서 마차가 왔답니다!”
허둥거리는 요크 부인에 연구실에 있던 요르문이 무슨 소란인가 싶어 뛰쳐나왔다.
“요크 부인, 황궁에서 마차가 왜 오는데?”
“아유, 참. 제가 부른 건 주인님이 아니라 아가씨란 말이어요? 황궁에서 티 파티 초대장이 왔어요. 그것도 아가씨 앞으로 말이에요!”
요크 부인이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궁내관이 직접 편지를 전하러 찾아온 모양이었다. 황제가 초대장 하나를 보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아마도 알현식 날 있었던 소란에 대해 보상하고 싶었기 때문일 터다.
“궁내관들이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에게 직접 초대장을 전달하라고 하셨다지 뭐예요? 명예도 이런 명예가 없지요. 어서 일어나셔요, 어서요!”
요크 부인의 소란에도 시아의 시선은 여전히 라크시스에게 붙박여 있었다. 당황하면서도 아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로 요크 부인이 그녀를 소파에서 끌어낼 때까지 라크시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손을 들어 그의 뺨에 얹었다. 다음으론 그의 목덜미에, 입술에. 마지막으로는 그의 가슴께에 그녀의 손을 가져와 대었다.
라크시스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셔츠와 베스트 너머로도 느껴지는 박동에 시아의 눈이 서서히 동그래지며 잘게 떨렸다.
아마 그녀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라크시스가 시아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라크시스 옌이 이 정도로 평정을 잃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다음은 당신에게 허락받은 후에 할 겁니다.”
“라크.”
허락이라니. 사실상 고백을 해버리겠다는 선언과도 다름없지 않은가. 시아의 숨이 가빠졌다.
허락을 해주면 그다음엔? 그다음엔 어쩔 건데! 아니, 어째서 다음을 허락받고 하는 건데!
요크 부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상상의 끝까지 가버린 시아가 결국 푹 익어 터져버리고 말았다. 라크시스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시아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멀어졌다.
“참는 건 저도 자신 있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