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93)화 (193/292)
  • 193화 

    라크시스는 시아가 초조한 기색인 것을 눈치챘다.

    “왜 그러십니까. 시아.”

    “라크는 봉인이 몇 개일 거라고 생각해요?”

    시아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라크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당황했다.

    “갈리프의 아홉 사도 중 하나가 배신하여 광룡이 되었으니 남은 여덟이 광룡을 봉인했겠지요. 여덟 개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세로의 이중 시간 여행을 겪을 당시 루드윅을 통해 알게 된 진짜 갈리프 신화를 떠올려 보면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시아가 그 사실을 모르고 질문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있군요.”

    “일기장 얘기가 나와서 떠오른 건데요.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봉인이 아홉 개라고 했거든요.”

    라크시스는 그제야 시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제가 대전제를 깜빡했군요. 일기장의 시아 켈튼이 광룡의 봉인을 아홉 개라고 했던 것을요.”

    “별장에서 라크가 그랬잖아요. 일기장에 기록된 시간 여행은 일곱 번이고, 시간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찾아두었던 두 개의 봉인이 바로 보관함 속에 있었던 봉인이었다고요.”

    “그랬었죠.”

    “하지만 일기장을 제외한 모든 정황 증거가 봉인이 여덟 개라고 말하고 있단 말예요.”

    라크시스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어렵군요.”

    그가 어렵다고 말하는 건 처음 봤다. 라크시스에게도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니.

    시아는 요르문을 흘긋거렸다. 그는 시아에게 모든 설명을 마친 후 다시 종이를 붙잡은 상태였다. 요르문은 봉인이 여덟 개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프레디 뮐러의 바람장미에도, 별장에서 찾은 신화학자의 책에도 봉인이 있을 장소는 여덟 개로 추려져 있었다. 뭐가 맞는 걸까. 시아는 실타래처럼 엉킨 머릿속에 한숨을 쉬었다.

    라크시스는 조심스레 가설을 제시했다.

    “시아. 당신은 이번 시간 여행에선 봉인을 두 개나 찾았죠.”

    “…그랬죠.”

    “그 반대로, 어쩌면 봉인을 아예 찾지 못하고 되돌아간 시간 여행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봉인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간 시간 여행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경우였다. 물론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처럼 그녀 자신이 봉인을 찾지 못한 경우는 있었지만, 라크시스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불안정한 봉인이 파괴되지 않은 채 시간 여행이 끝났다든가, 애초에 봉인이 불안정해지지 않았는데도 시간 여행이 이루어졌다든가. 그렇게 된다면 시간 여행의 횟수에 따라 셈한 봉인의 개수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일기장 속 시아 켈튼이 했던 일곱 번의 시간 여행이 그런 식으로 굴러갔을 수도 있었다는 거죠? 라크는 봉인을 찾은 시간 여행과 그러지 못한 시간 여행을 포함해 여행의 횟수가 총 일곱 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고요.”

    그 말인즉 라크시스도 봉인이 원래부터 여덟 개였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홉이라는 수에 맞춰 시간 여행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봉인의 개수가 여덟 개일 수도 있다는 거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인과관계를 따져가면서 상황을 논리적으로 보길 좋아하는 라크시스의 성격이라면 지금까지 발견해 왔던, 봉인이 여덟 개라는 정황 증거를 무시하기 힘들 터였다.

    “네. 모두 제 추측이지만요.”

    라크시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덧붙였다.

    “이번에 봉인을 두 개나 찾았으니 당신의 시간 여행이 일곱 번이나 진행될지도 이젠 확신할 수가 없게 됐죠. 어쨌든 당신은 불안정한 봉인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겠네요.”

    “게다가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은 봉인의 존재도 모르는 상태로 시간 여행을 했잖습니까. 아홉이란 봉인의 개수도 그저 구전되어 오는 아홉 사도에서 유추한 것일 수 있죠. 일기장의 그녀는 아마 진짜 갈리프 신화를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시아는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다.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은 갈리프였다. 시아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된 최초의 원인이요, 모든 일의 전말을 알고 있는 존재란 말이다.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일기를 3587년의 시아 켈튼이 읽고 있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거겠지.]

    [부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아주길.]

    정말로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종말의 순간, 그녀는 이미 갈리프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홉 개의 봉인을 찾아달라고 했으니.

    ‘사도라면 일기장에 남겨진 갈리프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텐데.’

    시아는 고대 마법사라고 불리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독보적인 은빛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풍요로운 마력은 만월처럼 그를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라크시스에게 옛날의 기억만 있어도 답을 알 수 있을 텐데. 그가 사도인지 아닌지, 봉인이 정확히 몇 개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텐데.

    “라크, 그런데 진짜로 옛날 기억이 안 나요?”

    “…그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완곡한 부정이었다. 시아는 묘하게 우울해진 낯으로 옛 기억이 없다고 대답하는 그를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아녜요. 방금 했던 질문은 잊어주세요.”

    미궁에 빠진 봉인의 개수 논쟁은 더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아는 허리춤에 양손을 당당하게 걸치고 결론을 지었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봉인이 여덟 개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어요.”

    “뭐든 의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라크시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가 팔짱을 풀고 시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애초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라크시스는 시아에게서 조금도 떨어져 있기 싫은 것처럼 바짝 다가섰다.

    “광룡의 봉인이 총 여덟 개라면 앞으로 남은 봉인은 한 개일 테고, 총 아홉 개라면 찾아야 할 봉인은 두 개가 남았다는 뜻이 되겠죠.”

    “네, 그렇죠.”

    “여덟 번째 봉인을 찾게 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는 겁니다.”

    기다란 그림자는 어느새 시아를 뒤덮고 있었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역광 속에서 고요히 파도치고 있었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만일 봉인이 모두 여덟 개라면, 당신의 시간 여행은 여덟 번째 봉인을 찾은 후 완전히 끝나게 되겠죠.”

    길쭉한 손가락이 시아의 눈앞에서 접혔다 펴진다. 여덟 개에서 아홉 개로. 희고 아름다운 마법사의 손가락이 그림처럼 움직이는 걸 눈으로 좇으며 시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홉 개라면.”

    “아홉 개라면 당신은 한 번 더 시간 여행을 하게 될 테죠. 그 여행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마지막 여행이 될 겁니다.”

    마지막 시간 여행. 그 단어에 시아는 숨을 삼켰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집채만 한 풍랑에 삼켜져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차디찬 파도가 심장을 마구 때린다. 쿵, 쿵쿵. 라크시스의 얼굴이 거센 박동과 함께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 탓이다.

    마지막이라니. 알 수 없는 상실감이 속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왜 벌써부터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시간 여행은 언젠간 끝나게 되어있었다. 끝이 나야만 모든 일이 마무리가 된다. 언제까지고 봉인만 찾을 수도 없잖아. 역사를 바꾸든 바꾸지 못하든 어쨌든 시간 여행은 끝나게 되어있다.

    솔직히 말이 여행이었지 사실상 고생길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기공식 현장에 난데없이 떨어졌던 그날부터 공동묘지에서 눈을 뜨고 중세의 감옥에 갇혔던 순간까지. 살인마를 잡아 추리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테러에 휘말려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아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을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시간 여행을 해오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라크시스 옌. 마도 시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름다운 마법사.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풍향계가 빙그르르 돌아가던 하얀 저택. 만개한 장미에 둘러싸여 라크시스와 시아가 자정의 티타임을 가졌던 그때.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시대에 떨어진 그녀가 용기 내어 시간 여행을 도와달라 했을 때, 라크시스 옌은 기꺼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후 그녀의 곁에 라크시스 옌이 없었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파트너라고 생각했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라크시스 옌은 언제나 시아 켈튼과 함께였다. 단지 같은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사이라고 정의하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

    지나치게 가까웠던가. 그걸 지나치다고 할 수 있나. 모르겠다.

    이젠 라크시스가 없는 순간이 허전할 지경인데.

    그저 허전하기만 할까. 시아는 라크시스가 곁에 없는 상황을 끝끝내 상상하지 못했다. 스물여덟 해를 혼자서 잘 살아와 놓고선 고작해야 한 달 남짓을 함께 한 남자가 없어지는 걸 견디지 못한다니.

    라크시스가 제게 하던 달콤한 말들이 떠올랐다. 친구로 남지 않기 위해 분발하겠다고 했지. 그가 친구로 남지 않으면, 뭘까. 시간 여행의 파트너가 아닌 라크시스 옌은 제게 무엇이 될까.

    아직 소원 내기도 제대로 못 했는데. 시아는 오래전 옌의 저택에서 라크시스와 했던 내기를 떠올렸다. 라크답지 않다, 라는 말의 속뜻 맞추기를 두고 소원 내기를 했었지. 시아는 그제야 그가 제 앞에서 ‘라크시스답지 않아지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아.

    장력을 이기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다음. 어쩌면 그다음. 짧으면 한 번, 길면 두 번. 그녀가 라크시스를 만날 수 있는 횟수는 이제 고작해야 두 번 남았다. 그것도 좋게 쳐야 두 번이라는 거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이 마음을 고백해도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찰나뿐이라는 거다. 그조차도 남은 봉인을 찾느라 정신없이 흘러갈 테지.

    어차피 라크시스와는 함께할 수 없었다. 그는 칠십 년 전의 사람이었고, 시아는 칠십 년 후의 사람이었으니까. 시간 여행이 끝나면 이 만남도 끝나버리리라.

    ‘…라크시스와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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