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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1)화 (151/292)
  • 151화 

    아까보다 짙어진 마력이 코를 찌른다. 라크시스는 무의식적으로 소매를 들어 호흡기를 가렸다. 불안정한 마력은 피부를 타고 스며들기에, 코나 입을 가리는 건 사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고대 마법사라 불릴 정도의 자신도 이 정도인데. 마법사가 아닌 시아는 봉인을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아, 괜찮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뒤를 돌아본 라크시스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시아를 바라보았다.

    “어… 여기서 괜찮다고 대답하면 이상한 걸까요?”

    그녀는 멀쩡했다. 그것도 지나치게 멀쩡했다.

    쓰러진 고용인들과 인상을 쓰고 입을 가린 라크시스를 번갈아 보며 시아는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글레이셜 홀에서도 이랬었지. 그때도 머리가 어지럽냐는 물음에 시아는 괜찮다고 했었다. 당시엔 오토마톤 무덤에서 빠져나오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녀가 그저 시간 여행자이기 때문에 이런 이상 마류도 견디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무사하면 됐죠.”

    희끄무레한 막이 시아의 몸을 둘러싸고 요동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작은 빛 알갱이들이다. 정령을 닮은 마력이 부유하며 그녀를 봉인의 불안정한 마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노란 마력등에 비친 머리칼이 하얗게 빛난다.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었으나, 라크시스의 눈엔 이제 뚜렷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저런 식으로 빛났던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라크시스는 그간 제가 놓쳐온 단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반응이 떨떠름한데요? 혹시 저한테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아뇨. 문제 같은 건 없습니다.”

    “흠. 아닌 것 같은데.”

    시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봐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본인이 사도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까. 자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던 초상 속 여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라크, 이 층이에요!”

    시아의 외침에 상념에서 겨우 벗어났다. 라크시스는 그녀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 *

    기분이 묘했다.

    ‘아까 날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했던 거 맞지?’

    라크시스가 그렇게 얼빠져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얼빠져 있었다 한들 찰나였고, 생긴 것 때문에 잠시 그림처럼 우두커니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 게 전부였지만.

    라크시스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그의 반응도 덩달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예쁘장한 얼굴로 사람을 자꾸 들었다 놨다 하더니, 이젠 이런 걸로 마음을 못살게 군다.

    대체 누굴 생각했을까?

    ‘아마도 초상화 속의 여인이겠지.’

    갈리프, 즉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갈리프의 또 다른 형태라는 걸 알고 있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라크시스가 떠올린 사람은 그녀가 모르는 시아 켈튼의 과거를 그와 공유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주 먼 옛날의 갈리프와 라크시스 사이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한텐 옛날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방금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불안정한 봉인은 시아에게 상념의 틈을 주지 않았다. 저 멀리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승강기가 보였다. 철창문이 굳게 닫힌 뒤로 시커먼 통로가 뱀의 아가리처럼 뚫려있었다. 고장 난 바늘이 승강기의 층을 가리키지 못하고 시소처럼 방황했다.

    ‘뭔가 이상한데.’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바늘이 2층에 닿을 때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치 2층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문득 글레이셜 홀에서 자신과 라크시스를 피해 도망가던 오토마톤이 떠올랐다. 그 봉인은 살아있는 것 같았지.

    봉인은 왜 도망가려고 했을까. 봉인이 정말로 어둠의 힘을 가둔 사도 그 자체라면, 자신이 파괴되었을 때 일어날 폭발의 여파를 알고 도망쳤을 수도 있다.

    이번 봉인도 그런 거라면.

    그래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 승강기를 고장 냈다면.

    ‘봉인은 별관 이 층에 있어.’

    농도 짙은 마류가 승강기 통로에서 왈칵 밀려온다. 시아는 다급하게 외쳤다.

    “라크, 이 층이에요!”

    그녀의 손짓에 시아와 라크시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자잘하게 많은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자정이 되었다.

    뎅뎅뎅뎅뎅―! 짹짹짹―! 당당당당! 띵띵띵띵띵―!

    별관 곳곳에 있던 시계가 동시에 울렸다. 괘종시계의 시보 장치가 돌아가며 객실 문 너머로 소름 돋는 울음을 마구 내뿜는다. 기괴하게 공명하던 종소리가 멎었을 때였다.

    팟―

    거대한 레버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증기기관의 아득한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금방 다시 하나둘 불이 켜지긴 했지만, 라크시스와 시아는 찰나 비행선의 모든 동력이 끊어졌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깜빡이는 조명 밑에서 시아와 라크시스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라크. 이번 건 이미 파괴됐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이 정도로 불안정한 기운이라면 폭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시아는 다급하게 계단을 넘어 이 층 복도로 진입한 라크시스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라크!”

    “왜 그러십니까?”

    “이번 봉인은 제가 맡을게요.”

    “맡는다니, 그게 무슨…….”

    시아의 다부진 시선을 마주한 라크시스는 곧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시아, 지난번에 제가 다친 걸 봤잖아요. 그게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고 그러는…….”

    “알아요. 아니까 그러는 거예요. 저도 라크가 더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시아는 결심한 듯 손을 그러쥐었다. 봉인의 맥동하는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보일러실에서 라크시스가 찾아냈던 봉인을 잡았을 때였다.

    ‘아, 또다시 여기구나.’

    다무스의 지하 미궁에서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광활한 우주 한가운데에 서있는 나. 은하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계단이 나선을 그리며 발밑을 가득 채운다.

    이 장면을 라크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게만 보이는 광경일까.

    손안에는 동그랗게 잠든 어둠이 있었다. 이게 봉인되었던 광룡의 힘이겠지. 지난번과 달리 조잘대지 않는 게 어색하면서도 조용해서 좋았다.

    계단의 끝에는 어김없이 천칭이 매달려 있었다. 마도 시대의 유물처럼 생긴 황동빛의 휘황찬란한 천칭은 각 접시에 빛과 어둠을 번갈아 만들고 없애며 끊임없이 좌우로 기우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번 해봤다고, 시아는 어둠이 한가득 올라가 있는 천칭 접시에 손에 쥔 어둠을 올려두었다.

    아니, 올려두려고 했다.

    [신이여. 전 당신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시아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얼떨결에 힘이 들어간 손에서 어둠이 끼엑, 하며 찌그러졌다.

    ‘누, 누구…….’

    [모르는 척 마십시오! 이 울리아트, 정말 섭섭합니다!]

    울리아트? 그게 누구야? 시아가 되묻기도 전에 흐릿한 형체가 흐느적거리며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러고 보니 머리며 팔과 다리가 보인다. 점점이 반짝이는 별을 기준으로 별자리처럼 실루엣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갈리프의 세 번째 사도, 울리아트. 그는 다무스와 달리 이미 육신을 잃고 유령 같은 형태로 별과 별 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도 놈의 손에서 구해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막내가 정말 큰일을 해왔더군요.]

    ‘막내라면……?’

    [당연히 당신이 구한 작고 연약한 인간을 말하는 거지요. 그 아이를 위해 왕좌도 새로이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얼굴이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는데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떻게 그걸 모르느냐, 하며 되묻고 있다. 그렇지만 난 정말 모른다고. 난 시아 켈튼이란 말이야.

    그런데 작고 연약한 인간이라면.

    설마 신화 속에 등장하던 노예 아이인 걸까?

    [신이여, 어서 가져가십시오. 하도 그걸 배에 품고 있었더니 허기가 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지 않았겠습니까.]

    울리아트가 시아의 손에 들린 어둠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내내 조용하던 어둠이 몸을 둥글게 펴며 콩알만 한 입으로 버럭 화를 냈다.

    [그거라니, 버릇없는 사도 같으니! 난 네 주인과 똑같은 태고의 존재란 말이다!]

    으왁! 깜짝이야. 이번엔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바깥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나 보다. 울리아트가 질린다는 목소리로 어둠에게 삿대질했다.

    [아무튼 이놈을 얼른 가져가 주십시오. 이제 이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

    손바닥에서 움찔거리며 화내던 어둠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다 울리아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버틸 수 없다는 말이 진짜인 듯 별자리를 그리던 별들이 희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또다시 울컥, 알 수 없는 향수가 밀려든다. 아아, 사도 다무스를 만났을 때와 같다. 그때야 이 감정이 뭔지 몰랐지만 이젠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빚어낸 존재의 쇠약을 지켜보는 창조주의 마음. 스러지는 별을 지켜보는 빛의 마음.

    이건 갈리프의 감정이었다.

    그러자 손바닥의 어둠이 또다시 원망스러워졌다. 다무스의 배를 뚫고 튀어나오려 하던 난폭한 어둠이 떠오른다. 다무스는 결국 죽고 말았지. 루드윅이 카얄(Kayal)을 태고의 어둠이자 악신이라 칭했던 것이 떠오르고 만다. 어둠과 갈리프가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악신이라 불릴 정도면 손바닥 위의 이 조그만 덩어리는 그렇게 좋은 녀석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어둠이 눈을 깜빡이며 능청스레 인사했다.

    [안녕, 또 만났네?]

    ‘또, 만났다고?’

    또 만났다니. 이 덩어리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본인을 마치 지난번에 내가 천칭에 올렸던 어둠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둠은 피식거렸다. 시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나고, 이것도 나야.]

    엥? 시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둠은 그녀의 관심을 가볍게 무시하고, 울리아트의 형체를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흐릿하긴 해도 아직 생명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아마 남은 빛만으로도 한동안 계속 타오를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이번의 별은 소멸되진 않겠네.]

    어둠은 시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죽은 별은 어차피 우주를 떠돈다. 운이 좋으면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다무스나 갈리프처럼 천칭에 거래를 청해 우주의 섭리를 어긴 것만 아니면 소멸할 일은 없다.

    울리아트 역시 어둠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침울하게 물었다.

    [다무스는… 영원히 사라진 건가.]

    [조그만 별 주제에 시간을 계속 반복시켰으니 당연한 결과지. 네 주인도 머지않아 영원히 사라질 텐데, 뭐.]

    [뭣, 사특한 어둠 주제에 지금 갈리프 님을 모욕한 거냐? 갈리프 님이 죽길 바라는 거냐고!]

    울리아트가 욱하며 발버둥 쳤다. 산산이 흩어져 버린 육신의 발버둥이라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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