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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50)화 (150/292)
  • 150화 

    ‘저놈이 왜 여기에 있어!’

    온몸이 섬찟 얼어붙는다.

    그는 태연히 차탈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누님이 자정이 넘어가기 전엔 도착할 거라고 했는데. 회중시계를 열어보니 시곗바늘이 벌써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누님이 도착했겠지. 라크 녀석이 몇 달을 공들여 만든 무대이니 봉인도 별 탈 없이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될 텐데, 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들까.

    중세에 저놈이 저주를 이용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이 생각나서? 화형을 당했다던 녀석이 버젓이 살아 마도 시대를 활보하고 있어서?

    아니다.

    그가 또다시 인간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이곳에 나타나서다. 과거의 카얄, 중세의 발자크 에이클레이가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행동했던 이유가 있었댔지. 그가 사도치고 지나치게 약해 저주로 마력을 얻지 않으면 마법을 아예 쓸 수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로렌시아호엔 수백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확인된 파티 참석자만 삼백이 넘고, 그들을 시중들기 위한 메이드와 종자, 조종실의 승무원, 정비공 등을 합하면 오백이 훌쩍 넘는 인원이 수만 피트 위에 떠있는 셈이다.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저주를 발동시킨다면.

    ‘게다가 비행선을 추락시키면 증거도 남지 않지.’

    “로드 켈튼,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갑자기 굳어버린 요르문을 보고 메이슨이 걱정스레 물었으나, 요르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얄은 여전히 이쪽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중세의 시간여행이 끝난 이후 발자크는 이쪽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루드윅 젤마니와는 간간이 만나는 듯했으나, 요르문과 라크시스 앞에는 공공연하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 놈의 낯짝을 제대로 보기 위해 일부러 그를 뒤쫓은 적도 많았는데, 기가 막히게 요르문과 라크시스를 피해 다니며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런 발자크 로스가 버젓이 무도회에 참가했다.

    ‘놈의 꿍꿍이가 뭐지?’

    설마 봉인을 노리는 것인가. 하지만 그랬다면 라크시스가 로렌시아 호에서의 자선 파티를 계획하던 때에 진작 꼬리가 밟혔어야 했다. 이륙하기 직전까지도 비행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파티 참석자뿐 아니라 비행선에 오른 모든 사람의 신원 역시 확실하게 확인해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발자크 로스가 먼저 봉인을 건드릴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로렌시아호를 저주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인가.’

    봉인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로드 켈튼?”

    “…당장 라크에게 가야 돼.”

    놈이 여유롭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보하고 있단 건 분명 다른 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나타날 봉인에만 집중했지, 저주를 막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단 말이야.

    이번 봉인은 무탈하게 넘어가나 싶더라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같이 클럽에 가자고 하셨으면서.”

    “자네도 따라와. 비상 동력이든 뭐든 추락할 비행선 끌어 올릴 방법 생각하면서.”

    “예에? 추락이요?”

    메이슨의 멱살을 붙잡다시피 하며 요르문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동시에 어깨에 극심한 충격이 느껴졌다. 순식간이라 피하지도 못했다.

    “아야야……. 당신 뭐야?”

    그의 어깨를 치고 간 건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노부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평소였다면 사과도 제대로 않고 도망쳐 버린 사람을 붙잡아 따져 물었을 터다. 그러나 급한 건 요르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르문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게 다 뭐죠?”

    ‘젠장!’

    발목까지 차오른 무지갯빛 연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마치 북부 지르가나에서만 볼 수 있다는 오로라 같군요!”

    “무도회를 위한 또 다른 이벤트일까요? 아까의 불꽃놀이처럼 말예요.”

    요르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현재 시각 11시 55분. 자정의 종소리를 향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고조되고 있다. 곳곳에서 감탄이 들리는 가운데, 무지갯빛 연기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은 오직 요르문뿐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자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이상 마류라면.’

    파괴되기 직전의 봉인.

    오토마톤의 심장이 폭발하기 직전과 똑같았다. 광룡의 힘이 사라진 빈껍데기 봉인의 말로. 닥쳐올 재앙을 상상하자 피부가 떨리기 시작한다.

    설마 누님이 실패한 것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오늘을 위해 라크시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뒀는데.

    만일 봉인이 예정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도록 사방에 마류 탐지기를 깔아두었다. 아주 약간의 이상 마류도 감지할 수 있게끔 말이다.

    지금처럼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게 말이야.

    ‘어째서 마류 탐지기가 작동하지 않았지?’

    “아아, 이런 마법에 둘러싸여 춤을 춘다면 정말로 황홀하겠어요!”

    무도회장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빙글빙글 돌았다. 낭만에 젖어 서로의 손을 잡고 시선을 교환하며 알록달록한 연기를 가른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꼬리를 흔들며 마루를 쓸고, 사방으로 휩쓸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요르문은 경련하는 어깨를 애써 붙들고 발자크를 흘긋 바라보았다.

    순간, 섬뜩한 기운이 이마를 관통했다.

    발자크가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뱀 같은 시선이 생긋 휘어진다. 정신 교란 마법이라도 썼는지 차탈은 발자크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에 대화하고 있었다.

    순간 모든 게 느리게 움직였다. 실제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지, 바짝 긴장한 탓에 오감이 마비되었는지 알 순 없다. 시간의 틈에서 깨어있는 건 오로지 둘뿐인 것처럼 감각이 느려졌다.

    요르문은 발자크를 찰나 멀거니 응시했다. 시계의 초침이 칸을 넘지 못하고 포물선을 그리다 멈춰 선 도중이었다.

    발자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길 바라지.]

    오랜 악연에게나 할 법한 조롱이었다. 그래, 놈은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다.

    ‘이 개자식이!’

    째깍.

    동시에 시간이 다시 흘렀다. 와글거리는 무도회장의 소음이 쏟아지고, 바닥을 납작 기던 무지갯빛 연기가 확 솟구쳐 오른다. 몽롱한 기운에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처럼 낭창낭창 춤을 추었다.

    심약한 레이디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가운데 지척에서 소란이 일었다. 레이디 로드리치가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나갔다. 파티의 주최자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수군거리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 뚝 멈췄다.

    그들이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저거 라크시스 옌 아닌가요?”

    한 레이디의 새된 외침을 필두로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이 층 난간으로 향했다. 밀레이나와 귀부인들이 무도회를 구경하던 바로 그 난간이었다.

    은발의 신사가 짙푸른 연미복 자락을 펄럭이며 시원하게 뻗은 다리로 눈앞을 가로지른다. 그 뒤로 웬 여인이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쥐고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분명 둘 다 필사적으로 뛰고 있음에도 왜인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환상적으로 보였다. 사랑의 도피를 하는 연인의 모습을 엿본 기분이랄까. 그들이 뛰면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들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상상이었다.

    두 사람은 이 층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워낙 빨리 뛰어간 탓이다. 그럼에도 워낙 인상이 깊은 탓인지 뇌리에 잔상이 남아 계속 맴돈다.

    라크시스 옌과 이름 모를 여인. 검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는 여인을 보자마자 사람들의 머릿속엔 똑같은 이미지가 떠올랐다.

    앨런 어셔의 연작.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 재키 레이븐을 잡은 탐정. 라크시스 옌의 연인.

    누군가가 외쳤다.

    “로렌 허슬러예요!”

    요르문은 기가 막혀 뒤통수를 잡았다.

    ‘들키면 안 된다면서요, 누님!’

    메이슨이 당황하여 말했다.

    “로드 켈튼, 방금 두 사람은…….”

    “나도 알아, 말 안 해도 안다고!”

    요르문은 다급하게 발자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차탈의 앞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라크시스와 시아를 바라봤을 뿐인데.

    이내 차탈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발자크를 찾는다기보단, 라크시스와 시아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가늠하는 모양새였다.

    이제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된다. 요르문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로드 켈튼! 같이 가요!”

    제발 같이 가요오오! 메이슨이 자신을 놓친 것도 모른 채였다.

    * * *

    눈을 깜빡이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방금까지 같이 있던 건 누구였더라.’

    차탈은 고개를 부르르 털었다. 분명 누구와 만나 대화하고 있었는데. 졸았던 것처럼 아까 전의 일들이 가물거린다.

    금발에, 불길한 마력에……. 누구였지. 분명히 내가 쫓고 있던 놈이었는데. 모르간을 들쑤시고, 황궁까지 기어들어 온 마법사였는데.

    그래, 저주를 쓰던 자였다. 내가 보낸 새들을 죽이고, 역으로 나를 관찰하던 마법사. 몇 년을 추적하다가 겨우 실체를 마주했는데.

    그래서 놈이 누구였더라?

    [별관으로 가거라. 네가 찾던 존재가 있을 테니까.]

    차탈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동굴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기이한 목소리가 골을 뒤흔든다. 그러다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소란 속에서 이 층을 가로지르는 남녀가 보였다.

    ‘고대 마법사와 로렌 허슬러!’

    그의 눈에 기묘한 빛이 서렸다. 차탈은 이윽고 라크시스와 시아가 사라진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보는 눈이 지나치게 많았어.’

    연회장을 가로질러 다시금 인적 드문 복도로 들어서면서 라크시스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얼핏 스쳐 가며 헤아려도 이백은 넘는다. 게다가 그중엔 강렬한 붉은 머리까지 있었다.

    차탈 세페란테. 시아를 그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어쩔 수 없지.’

    터지기 일보 직전의 봉인을 사수하려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좌표를 알면 공간이동이라도 할 텐데. 봉인이 어디 있는지 알질 못하니, 무지갯빛 마류가 짙어지는 방향을 따라 직접 추적해 나갈 수밖에 없다.

    찰나 넋 나간 요르문과 시선이 마주쳤던 것이 기억난다. 이번 비행이 끝나면 틀림없이 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아, 여긴가 봐요.”

    라크시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들이 멈춘 곳은 별관 플로어였다. 무늬를 내어 깔아둔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카펫이 넓게 깔리고, 이국적인 수목이 장식처럼 멋들어지게 놓였다. 그레이트 로얄 호텔의 로비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풍스러운 장식이 난간이며 카운터마다 그득한 가운데, 정복 차림의 풋맨과 벨보이가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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