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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9)화 (129/292)
  • 129화 

    “저, 지금 들어갈래요.”

    시아는 4025호의 문고리를 잡았다.

    “안 돼. 시아야. 위험해. 아까 총성 들린 거 잊었어? 차라리 내가 들어가 볼게.”

    “전하께서 총에 맞으면 어떡하시려고요! 아직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잖아요!”

    헬릭스는 다급하게 시아의 팔을 붙들었다.

    “네가 총 맞는 건 괜찮고? 아니, 난 그렇게 못 해.”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에 머리며 옷까지 젖어 붙은 가운데 시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몸이 떨렸다.

    시아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안 돼요.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이대로 여기서 물러났다간 두 번 다시 못 만날지도 몰라요.”

    “대체 그 일기장이 뭐길래 그래!”

    헬릭스는 이제 무릎을 꿇다시피 사정하고 있었다.

    “제발 돌아가자, 시아야. 널 괴롭힌 놈들은 내 손으로 철창에 넣어버릴 수도 있어. 영영 사회에 못 나오게 해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여기서 나가자. 총성 들었잖아. 여긴 너무 위험해.”

    맞는 말이었다. 공사 중인 기숙사는 진동을 버티며 겨우 형태를 유지 중이었고, 4025호 안의 남자는 총을 가진 상태였다. 수국관은 이제 날카로운 경보 소리와 스프링클러의 물줄기로 가득 차있었다.

    손가방을 든 팔이 묵직하니 벌벌 떨렸다. 다리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그러나 시아는 결국 문고리를 쥐었다.

    “죄송해요, 전하.”

    “시아야!”

    그때였다.

    [괜찮아. 그 사람은 갔어.]

    ‘……!’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시아는 자신과 똑 닮은 음성에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섰다.

    정말이지 똑같았다. 선명한 발음부터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아르카나 억양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냥 거기서 들어줄래? 시아 켈튼.]

    “…역시 절 아시는군요.”

    문고리를 쥔 손이 툭 떨어졌다. 시아는 오래된 4025호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나직이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죠?”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은 하나였다. 그녀의 말대로 4025호엔 그녀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널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게 일기장을 준 것도, 리볼버를 건드린 것도 나야.]

    4025호의 여자는 시아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시아 켈튼.]

    자신의 목소리로 듣는 이름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시아는 문득 4025호의 그녀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너와 나는 같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다를 수 있는 사람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중세에서 만났던 다무스 같았다. 갈리프니 뭐니 했던 아까의 대화가 문득 떠오르고 만다.

    시아의 뇌가 맹렬히 회전하며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겪어왔던 시간 여행에서 유일하게 사라져 있던 기억. 그 공백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4025호의 여자.

    라크시스의 저택에 걸려있던, 자신을 닮은 은발 여인의 초상.

    사도의 상징인 은발. 갈리프라고도 불렸던 여자.

    자신과 똑같은 필체로 쓰인 일기장.

    이윽고 시아는 믿고 싶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당신은 또 다른 나…….”

    [라크시스 옌을 구해.]

    마치 의문을 끊어내는 것 같다. 시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살아갈 테니.]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불어온다. 스프링클러에 젖은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수국관의 사 층까지 무장 경찰과 소방관이 들이닥쳤다. 황자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온 보좌관 레논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뒤로 딸을 찾는 요르문이 보였다.

    [시아 켈튼으로 행복하게 살아. 내 부탁은 그것뿐이야.]

    시아는 직감했다.

    “잠시만요, 가지 말아요! 묻고 싶은 게 아직 남았어요!”

    벌컥 4025호의 문을 열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와 얼어붙었던 벽에 돋은 날카로운 불꽃 자국만이 종전의 상황을 짐작게 할 뿐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헬릭스는 당황했다.

    “사라졌어? 남은 출구라곤 저 창문밖에 없는데……?”

    바람결에 낡은 창문이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헬릭스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창문 밑을 살펴보러 갔지만 시아는 문간에 그대로 서있었다.

    아주 작은 종잇조각이 바닥에서 반짝였다. 칠십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던 시아에겐 익숙한 물건이었다.

    공간이동 스크롤이었다.

    시아는 조각을 집어 들어 주머니 속에 숨겼다.

    “황자 전하, 레이디 켈튼. 괜찮으십니까! 모르간 광역 경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시아야! 이럴 수가, 내가 같이 왔어야 했는데. 다친 데는 없니? 이리 와봐. 응? 미안하다, 아버지가 미안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요르문이 펑펑 울며 시아를 끌어안았다. 제국 유일의 마법사는 딸을 위해 그 자리에서 불을 소환하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윽고 출입 통제를 상징하는 노란 테이프가 4025호를 둘러쌌다. 무려 황자와 켈튼의 사람이 휘말린 사건이었다. 현장을 촬영하는 소리와 급히 달려온 경찰청장의 호령만이 수국관에 남았다.

    시아와 헬릭스는 나란히 수국관 앞 벤치에 앉았다.

    두 사람의 손엔 따뜻한 초콜릿이 쥐어져 있었다. 그 역시 요르문의 마법이었다.

    시아는 머그에 담긴 초콜릿을 홀짝였다. 올려다본 4025호의 창문은 아까와 다르게 사람이 북적거렸다.

    헬릭스는 제 몫의 담요를 시아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시아는 반응이 없었다.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는데 사라졌으니, 우울해할 만도 했다.

    “총에 맞은 채로 뛰어내렸으니 금방 잡힐 거야. 목격자도 많으니 곧 찾을 거고.”

    “이젠 괜찮아요. 전하.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돼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헬릭스는 할 말을 잃고 시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후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여기까지 같이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저 때문에 고생만 하셨네요.”

    시아에게 덮어주었던 담요가 도로 돌아왔다. 검댕투성이가 된 원피스 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선 시아는 금방이라도 떠날 것만 같았다.

    문득 헬릭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만.”

    헬릭스는 다급히 시아를 불러세웠다.

    “나, 앞으로도 너와 같이 가고 싶어.”

    “…어디를요?”

    “네가 바라는 곳이면 어디든.”

    썩 분위기 있는 곳은 아니었다. 총격 사건의 용의자와 아르카나 테러 사건의 용의자가 동일 인물일지 모른다는 목격자 진술이 막 확보되어 수국관은 한층 소란스럽고 삭막해졌다.

    사방에 꽃 대신 경찰이 숲을 이루었다. 저물어가는 하늘 밑에 깜빡깜빡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무엇보다 둘 다 물을 맞고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꼴이 엉망이었다. 시아를 만난다고 다듬어 넘긴 머리가 축 처져있었다.

    꽃단장을 마치고 유리온실에서 마주했을 때 고백했다면 더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이 어디론가 기울어있는 게 보였다. 후련해하던 방금 전의 얼굴에서 헬릭스는 시아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적어도 말은 해봐야지. 레논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백해 보라고 했었다.

    분위기도 낭만도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고백해 볼 여지조차 사라질 것 같아서.

    “나, 너 좋아해.”

    헬릭스는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전하.”

    “오랫동안 좋아해 왔어. 널 갈리프도흐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시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황량한 풍경 속에서 헬릭스는 홀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는 어디서든 빛나는 사람일 것이다.

    일국의 황자인 데다 자상하고 친절하다. 제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나서서 함께 고생을 자처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속도 남자다운 겉모습만큼이나 단단히 여물어있을 터다.

    여느 여자애들처럼 헬릭스를 바라본 적도 있었다. 갈리프도흐 동창회 날 전에 이런 고백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선 베개를 때렸겠지. 헬릭스가 내게 고백했다면서.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런 곳에서 고백하고 싶진 않았지만 말이야.”

    황자 헬릭스는 여전히 좋아한다. 앞으로도 좋아하겠지. 이렇게나 성실한 사람이니까.

    “좋아해. 시아 켈튼.”

    그럼에도 시아는 거절했다.

    “…죄송해요.”

    4025호의 여자. 그녀는 또 다른 시아 켈튼이었다.

    이미 나의 인생을 살아본 사람.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라크시스를 사랑할 것이며, 그가 죽을 것까지 알고 있었던 사람.

    갈리프니 신이니 하는 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본 것도 아니니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라크시스 옌을 구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살아갈 테니.’

    ‘시아 켈튼으로 행복하게 살아. 내 부탁은 그것뿐이야.’

    그건 진심이었다.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주면서까지 라크시스를 구해달라고 한 건 자신이 앞으로 그를 사랑하게 될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왜 라크시스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젠장, 걱정했잖아요. 이렇게 말도 없이 빨리 와버리면 어떡합니까.’

    멋대로 도착한 과거에서 라크시스는 저를 걱정해 주었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어쨌든 당신이 재키 레이븐을 잡은 덕에 릴리 알펜이 살아남았던 거니까.’

    위로해 주었으며.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과거니까. 괜찮아요.’

    유성우 밑에서 오래된 과거를 고백했다.

    ‘그렇게 나와 만나는 것이 당신 운명이었을 수도.’

    시간 여행을 하는 제겐 이렇게 말했고.

    ‘앞으론 이런 제게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가끔은 이렇게 낯뜨거운 장난도 쳤으며.

    ‘분발해야겠군요. 당신에게 친구로 남지 않으려면.’

    친구 이상의 무엇이 되겠노라 열기 어린 시선을 보낸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가 저를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라크시스가 생각나는 걸 보면 나 역시 그의 사랑을 눈치챈 걸지도 몰라.

    “…역시 내가 너무 늦었던 거겠지.”

    헬릭스는 멋쩍게 웃었다.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려 노력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미안했다. 당신도 정말 좋은 사람인데.

    “며칠만 빨랐다면 승낙했을 거예요. 저도 전하를 좋아했었거든요.”

    헬릭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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