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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28)화 (128/292)
  • 128화 

    그것은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하는 자식의 마음이었으며, 카얄이 가슴 깊숙한 곳에 숨기곤 내내 들여다보지 않았던 진심이었다.

    카얄은 갈리프의 멱살을 잡았다.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이 다 터져서 갈라져 있었다.

    “뭐라고 대답 좀 해. 대답을 하라고!”

    한참 후에야 갈리프는 서글프게 대답했다.

    “…너도 내 심장으로 만든 존재잖니.”

    심장으로 만든 존재. 갈리프의 사도.

    그 한마디에 배신자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카얄은 오랫동안 절규했다.

    난데없는 재난에 수국관 안팎으로 비명이 난무했다.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 황급히 빠져나가고 경찰과 소방관을 찾는 고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4025호는 침묵에 잠겨있었다. 갈리프는 끊어질 듯 말 듯한 숨을 이어가며 벽에 기대앉아 색색거렸고, 카얄은 멀찍이 떨어져 웅크린 채 갈리프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날 미워한 적이 없었나.”

    대답을 바라지 않은 혼잣말이 허공을 배회한다. 카얄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갈리프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가냘픈 숨소리만이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 갈리프에겐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지나치게 연약하여 쉽게 죽음에 가까워지니까. 고열에 들떠 정신을 차리는 것도 힘들겠지.

    당신은 정말로 날 미워하지 않았나.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갈리프가 대답 없이 이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실은 누구보다도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럼. 내가 널 왜 미워하겠어.”

    갈리프는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카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런데 왜 그랬어.”

    방울져 떨어지던 눈물이 마룻바닥을 점점이 물들인다.

    “나한테 왜 그랬냐고. 대체 왜…….”

    갈리프는 울고 있는 카얄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순수하며 불완전하고, 그렇기에 쉽게 상처받고 숨어버리는 가엾은 영혼.

    “처음부터 진실을 말해주지 그랬어. 가엾기만 한 영혼은 없다고. 우리는 그저 균형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고.”

    카얄은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울고 또 울다 지칠 즈음이 되어서야 잔뜩 잠긴 목으로 고백했다.

    “두 번이나 당신의 세상을 파괴하고, 이 지경이 되어서야 깨달았어. 당신이 왜 천칭의 심판을 묵인했는지. 영혼이란 건 언젠가 소멸될 하잘것없는 에너지일 뿐인데도, 왜 구원이란 거짓말을 하게 했는지.”

    신의 권능을 손에 넣고 어둠이 되어서 하고 싶었던 건, 진정으로 공정한 심판이었다.

    채찍질당하다 죽은 노예를 소멸로 밀어 넣고, 황금성의 탐욕스러운 주인을 환생시키는 제멋대로의 심판이 아니라, 모두에게 소멸이라는 최후를 선사하는 심판.

    선은 구원받는다는 거짓말로 영혼을 속이는 것이 아닌, 갈리프의 피조물이라면 무엇도 예외 없이 공평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깨우쳐주는 심판.

    그러나 카얄은 또다시 광룡이 되었고, 또다시 힘을 잃었다. 마법도 힘도, 모든 것을 잃고 수십 년 동안 인간들 틈에서 인간처럼 살아가다가 마침내 깨달아버린 것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왜 믿음이 필요한가.

    아무리 거짓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겐 믿음이 필요했다.

    “복수가 지나간 자리엔 너절한 것만이 남지. 찢기고 더러워져,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너절한 것만이 남아.”

    카얄은 오열했다.

    “모든 걸 후회해. 할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어. 천칭을 들여다보기 전으로, 당신의 사도였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당신의 사랑을 받았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어.”

    그때였다.

    “괜찮아.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 인간도, 너도, 나도. 우주 너머에 있는 거대한 천칭도.”

    갈리프의 손이 제 손등 위로 툭 얹힌다. 죽어가는 인간이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움직인 용서였다.

    수천, 아니 영겁의 세월 동안 얼어있던 빙벽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짧지만, 그 무엇보다도 깊은. 끝없던 감정의 골을 한 번에 메우는 진심이 맞닿은 손을 타고 뜨겁게 흘러들었다.

    그런 카얄을 묵묵히 바라보며, 갈리프가 말했다.

    “…이번엔 어쩌면 네 인생도 달라질지 모르겠어.”

    “이번에라니. 그게 무슨…….”

    “시간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거든. 네가 알지 못하는 동안 계속해서 말이야.”

    뒤통수가 멍했다.

    “네가 그렇게 미워했던 인간을, 라크시스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시간을 되돌렸어. 이젠 멈출 수 없는 수레바퀴에 갇혀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지.”

    알고는 있었다. 중세의 다무스에서 벌어진 일들. 그로부터 백삼십 년 후, 마도 시대에서 만났던 시아 켈튼. 그녀가 갈리프인 것도 시간 여행자인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시의 자신은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고, 한땐 시간을 건너오면서까지 자신을 가로막으려는 갈리프에게 완벽한 종말을 보여주리라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단순히 과거로 거슬러 왔을 뿐 아니라, 그 끔찍한 종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내 불길에 짓밟히고 라크시스 옌을 잃는 일을 줄곧 견뎌내고 있었다고?

    슈테른베슈테크의 백작처럼?

    “시아 켈튼이라면, 저 애라면 틀림없이 수레바퀴의 궤도를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나와 다르게, 네 운명도 바꿔줄 수 있을지 몰라.”

    체념인지 초탈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눈에 담은 갈리프가 눈에 들어온다. 뒤늦게 문 바로 뒤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걸 깨달았다.

    젊은 남자와 여자.

    문 바로 너머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아 켈튼이었다.

    어째서 시아 켈튼이 둘인가. 눈앞에 있는 비루한 몰골의 갈리프가 유일한 시아 켈튼이 아니었던가? 중세까지 찾아와 내 뒤통수를 치고, 라크시스 옌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려주어 봉인을 빼돌리게 했던 마도 시대의 시아 켈튼이 정녕 아니란 말인가?

    동시대의 두 시아 켈튼. 우주를 뒤집어도 불가능한 일.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평행 세계. 평행의 시간선.

    반복되고 마는 시간을 새로이 써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카얄은 갈리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다니던 시아 켈튼을 보았을 때도 그녀가 우주의 법칙을 어기고도 대체 어떻게 살아있었는지 궁금했었는데.

    심지어 시간선을 두 개나 만들어내다니.

    대체 당신은 무얼 위해 그리 절실하게 구는 거지?

    갈리프가 바싹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네 빈 자리를 닦으며 살아가겠노라 다짐했었지. 내가 저버린, 나의 아이를 기억하며 말이야.”

    나의 아이. 그 한마디에 카얄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네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젠 이해해. 미옌 네가 보았던 세상을 나도 겪었으니까.”

    우주의 저편에서 대지를 관망하던 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갈리프는 모든 걸 잃고 지상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미옌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 아이가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럼에도 라크시스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까지 발악하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태고의 빛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의 갈리프는 굴러다니는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평행한 시간선을 만들기 위해 틀림없이 권능 그 이상의 것을 천칭에 걸었을 터다.

    ‘…하.’

    갈리프 역시 모든 것을 바꾸고자 본인의 모든 것을 내건 마지막 모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갈리프.”

    어느덧 인간들이 지척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토록 요란하게 일을 벌였으니, 경찰이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난 당신을 죽일 거야.”

    카얄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오로지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왔어. 사도의 권능도, 사랑하던 형제도, 평화로웠던 나날도 모두 저버리고 이런 꼴이 되면서까지 살아남았던 건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어.”

    예전처럼 증오에 차있지도, 원망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카얄은 총을 주워들었다. 지금 그녀를 쏘면 곧바로 죽어버리겠지. 이미 빈사에 가까운 상태이니.

    그러나 카얄은 총을 도로 품에 집어넣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삶을 지탱하지.”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 마법을 대놓고 사용했으니 곧 추적이 따라붙을 것이다. 제아무리 마법이 대단하다 한들 끈질기게 달라붙는 인간의 집념은 이길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오직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살아갈 거야.”

    그가 총 대신 꺼낸 건 낡은 스크롤이었다.

    “당신 역시 이토록 발버둥 치고 있는 걸 알게 됐으니까. 당신이 만든 최후를 지켜볼 거야. 그리고 나서 내 손으로 당신의 머리통을 쏴버릴 거야.”

    카얄은 마도 시대의 종말 이후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려진 마도구를 찢었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 발동된 스크롤은 좌표의 마력을 추적하느라 한참을 웅웅거렸다.

    “당신의 굴레에 날 휘말리게 한 대가라고 생각해.”

    카얄의 발밑에 동그란 바람이 고였다. 갈리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인사도 배웅도 없었다. 바깥의 소란과, 오로지 스크롤이 발동되면서 나는 작은 바람 소리뿐.

    그러나 침묵으로도 충분했다.

    “갈리프.”

    시야가 반쯤 바뀌었다. 갈리프의 모습이 이제 흐릿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지 않으면 극심한 멀미에 시달린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 미세하지만 그녀의 호흡이 안정된 걸 진작 느끼고 있었다. 천칭의 사랑을 어지간히도 받았나 보지. 죽음의 문턱에서도 되돌아오는 걸 보면 말이야.

    뒤늦게 터진 스프링클러에 갈리프가 푹 젖어있었다. 카얄은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를 던졌다.

    “다음에 만나면 그땐 정말 마지막이야.”

    그가 두고 간 건 낡은 스크롤이었다.

    【 변곡점 】

    “전하, 안 되겠어요.”

    공사 중인 수국관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4025호에서 일어난 총성에 뒤이어 갑자기 건물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기 때문이다. 불이 난 것도 아닌데 화재경보기가 울리며 스프링클러가 터졌다.

    경찰이 출동하는 소리가 났다. 곧 사 층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4025호 안의 두 사람은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경찰서로 연행될 터다.

    ‘분명 시아 켈튼이라고 했어.’

    4025호 안의 여자는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자신에게 줬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심지어 시아 켈튼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갈리프와 미옌. 건너들은 대화에서 등장한 이름은 신화에 나오는 용과 그 사도의 이름과 일치했다. 심지어 미옌은 로드 젤마니가 열변을 토하며 알려준, 갈리프를 배신한 첫 번째 사도였다.

    이들은 제 시간 여행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4025호 안의 두 사람을 만나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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