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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9)화 (119/292)
  • 119화 

    평생 품어왔던 사도의 신념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천칭에게 있어 영혼은 그저 말 그대로 우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추에 불과했다. 작은 영혼이 사라지면 그만큼 작은 어둠이, 큰 영혼이 사라지면 그만큼 큰 영혼이 반대편 접시에서 나타나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갈리프 님. 천칭은 정말로 위대하고 신성합니다. 어찌 저리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대를 세우셨습니까?’

    ‘…우주는 언제나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 천칭은 오로지 균형을 위해 존재한단다. 미옌.’

    그땐 그저 형식적인 답을 해주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태어나는 것이 있으면 소멸하는 것 또한 존재해야 하고, 빛이 있으면 그만한 어둠 역시 존재해야 한다. 갈리프는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제가 만든 영혼들을 어둠의 먹이로 주고 있었던 것뿐이다.

    공정한 심판대에 세운 것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며 사라진 여자의 영혼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따위 운명을 줘놓고도 내 인생을 심판할 순 없어!’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인도했던 가엾은 이들의 목소리가 수만 갈래의 가시가 되어 고막을 찌르고 이성을 갈가리 부수어 놓았다. 팔리야에겐 영혼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천사님, 정말로 다음 생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럼. 천칭은 공정하시지. 다시 태어나면 분명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진짜 거짓말쟁이는 나였다.

    깨끗하여 수정 같던 마음에 검은 씨앗 하나가 내려앉는다. 핏발 선 눈자위에 메마른 눈물이 고여 들었다. 찰나 뿌리박고 싹을 틔운 검은 덩굴은 올곧던 사도의 마음을 점령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괴로움과 죄책감의 눈물이었다.

    미옌은 그 길로 대지에 내려갔다.

    [그대가 이 성의 주인, 무자파가 맞느냐?]

    “뭐, 뭐야! 누군데 감히 내 성에 들어와서 이러는 거야!”

    술과 과일, 여자가 넘쳐나는 황금성의 연회장에서 왕이 벌떡 일어났다. 투노인지 사병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헐벗은 군사들이 기세 흉흉하게 창을 들었다.

    왕이 쓴 월계관은 가장 귀하다는 보석으로 꾸며진 금관이었다. 미옌은 공기처럼 걸어가 황당하다는 얼굴의 왕에게서 월계관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

    이곳은 금이 나지 않는 나라였다. 타국의 금광을 돌아오는 강에서 나는 사금이 유일한 금이었다.

    미옌의 손에서 월계관이 으스러졌다.

    [이 관을 만들기 위해 수없는 자들이 강바닥을 헤집었겠구나.]

    “이런 미친 놈을 봤나! 여봐라, 당장 저자를 죽……!”

    왕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꺄아아악―!! 전하!”

    왕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살찐 몸에 달라붙어 있던 여자들이 경악하며 도망쳤다. 미옌에게 칼을 들이대던 병사도, 욕을 퍼붓던 시종도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그날은 황금성의 나라가 멸망하는 날이었다. 후대에 기록되길, 신이 폭군을 심판하기 위해 사도를 내려보냈노라 하였다.

    미옌은 그 후로도 대지 곳곳을 돌며 스스로 영혼을 심판했다. 악한 자를 천칭에 보내고, 가엾은 자들을 모아 직접 새로운 육신을 찾아주며 환생을 도왔다.

    왕은 백성의 눈치를 보았고, 신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커졌다. 비로소 세상이 세상답게 돌아간다며 기뻐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세상은 얼핏 평화로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평안한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배신자!”

    미옌은 형제들에 의해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천칭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발걸음을 끊었던 차원의 세계였다. 형제들이 잠적한 자신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멍청하게 잡혔군.’

    명을 다한 인간 뒤에 숨어있던 팔리야에게 결국 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울리아트의 주먹질에 입 안이 부르텄고, 다무스에 의해 기절한 후엔 기억이 없었다.

    손발이 팔리야의 권능으로 결박되어 있었다. 미옌은 비릿하게 웃었다.

    언제는 형제라며 둘도 없는 가족처럼 굴더니. 이젠 버러지보다 못한 눈으로 날 보는군.

    신전과 왕좌, 우물뿐인 차원의 세계가 불안정했다. 낮과 밤, 계절과 계절이 순서대로 흐르지 못해 엉망이 되어있었다.

    그놈의 천칭, 혼란스러워 해보라지. 우주의 균형이 뭐라고 그따위로 영혼들을 심판해 왔단 말인가.

    “내가 배신자라고?”

    “이게 뻔뻔하게……!”

    분노한 팔리야가 미옌을 걷어찼다. 미옌은 목구멍에서 왈칵 피를 토하며 울분에 젖어 고함을 내질렀다.

    “속고 있는 건 너희들이야! 내가 천칭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나? 갈리프가 왜 천칭을 오래 보지 말라고 했는지 아느냐고!”

    “감히 갈리프 님을 불경하게 부르다니!”

    다무스가 불꽃을 피워 미옌에게 내던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만들 하거라.”

    사도들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신전의 기둥 뒤에서 찬란한 은발을 늘어뜨린 갈리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리프는 무게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와 미옌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어찌하여 그랬느냐.”

    “…배곯는 이가 가엾고 안타까워 그러했습니다.”

    자신을 빙 둘러싼 형제들의 서늘한 시선이 설산의 눈보라처럼 살갗을 에었다. 갈리프의 뜻에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런 취급을 받을 거란 예상은 했다. 그러나 실제로 형제들에게 외면받는 기분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비참해서 헛웃음이 났다.

    옳은 건 나였고, 틀린 건 갈리프였는데.

    미옌은 권능을 사용해 회수해 온 영혼 하나를 품 밖으로 꺼내 보였다. 몽글한 구름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영혼이었다.

    “갈리프여. 참으로 불쌍하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귀리죽조차 먹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칭에 오르면 두 번 다시 대지를 밟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요.”

    아이가 별천지를 보는 것처럼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이의 영혼과 눈이 마주친 사도들이 움찔거렸다.

    “이토록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일진대, 제가 감히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이제 밀과 고기를 먹여줄 부모 밑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랬느냐.”

    갈리프는 미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미옌의 품에서 또 하나의 영혼이 떠올라 나타났다. 빛을 거의 잃어 몸뚱이 너머의 풍경이 그림자처럼 비치는, 닳아빠진 영혼이었다.

    “이자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생에서도 사람을 죽였지요. 천칭은 이자를 벌써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천칭이 이번에도 이자를 살려준다면 무고한 자가 또다시 희생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구나.”

    갈리프는 미옌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성질 급한 팔리야가 몇 번이고 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내질렀으나 갈리프가 팔리야를 막았다.

    이윽고 갈리프가 천천히 일어났다.

    “네 말이 옳다, 미옌.”

    “갈리프 님! 어째서 배신자의 말을……!”

    “천칭은 네가 말한 것처럼 정의로운 심판자가 아니란다. 네가 본 것은 틀리지 않아.”

    미옌은 그 순간 시커먼 늪처럼 변해버린 가슴 깊숙한 곳에 툭, 하고 파문이 이는 것을 느꼈다.

    천칭의 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외면해 왔던 갈리프였다. 제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 해도 자신을 배신한 사도를 눈앞에 두고 평정을 찾을 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갈리프는 분노하지도 않고,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제게 맞다고 말해주었을 뿐이었다.

    통제되지 않은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하, 하하……. 당신도 알고 계셨군요. 그래요. 전 혹여 당신이 일부러 모두에게 진실을 숨겼을까 봐 걱정했는데. 반응을 보니 천칭이란 놈이 언제나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었군요.”

    사도로 태어나던 날, 처음 눈을 떠 갈리프를 보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차오름 속에 허우적거렸는데.

    그래. 갈리프 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니.

    태고의 빛이요, 최초의 신이여. 나의 창조자여.

    미옌은 엉금엉금 기어 갈리프의 발밑에 엎드렸다. 그녀의 발등에 입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갈리프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미처 보지 못한 채였다.

    “이제라도 바꾸면 됩니다. 갈리프. 새로운 심판대를 세우십시오. 낡고 그릇된 유물은 치워버리시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미안하구나.”

    “…예?”

    발밑이 갈라졌다. 미옌은 질겁하며 필사적으로 기어 도망쳤다.

    벌어진 틈은 마치 인간들이 말하던 빙하 속 무저갱 같았다. 갈리프와 미옌 사이에 자리한 거대한 틈은 끝 모를 우주의 깊은 어둠을 내보이며 사납게 입을 벌렸다.

    조금만 늦게 몸을 피했더라면 그대로 죽을 뻔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다. 거대한 틈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세찬 바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왕좌를 붙들고 기둥 뒤에 숨었다.

    갈리프는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서있었다. 찬란한 은발이 사방으로 뒤엉켜 날았다.

    “균형은 이미 깨지고 말았어. 천칭을 달래기 위해선 널 어둠에게 보낼 수밖에 없단다.”

    “그게 무슨……!”

    갈리프에게 대꾸하는 사이 벌써 몸이 절반은 틈 속으로 잠겨 들었다. 손발이 묶인 미옌은 허우적거리다 뒤늦게 깨달았다.

    갈리프는 날 이해하지 않았던 거야.

    “고통스러울 거야. 외로울 테지. 어둠의 저편은 춥고 공허하며 아무것도 없는데.”

    “잠깐,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갈리프, 갈리프 님. 방금까지 제 말이 맞다고 하셨잖습니까. 당신도 천칭이 잘못 되었다는 걸 인정하셨잖습니까!”

    미옌은 울부짖으며 갈리프에게 매달렸다. 갈리프는 그를 내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구해주지도 않았다.

    “이게 벌인가? 당신을 거스른 벌을 받는 거냐고!”

    발밑의 어둠은 사도인 그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어둠이었다. 별빛 하나 없는 완전한 검은색을 보자 불길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나, 죽는 건가?

    문득 팔리야의 말이 떠올랐다. 천칭의 접시에 오른 영혼들의 말로가 어떠했더라.

    ‘죄지은 영혼은 영원히 소멸되고 그렇지 않은 영혼들은 환생하거나 밤하늘의 별이 되지.’

    빛과 어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갈리프는 영혼을 어둠의 먹이로 주었지. 영혼을 받아먹던 어둠이 바로 이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둠에 잠긴 발끝부터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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