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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18)화 (118/292)
  • 118화 

    갈리프가 만든 세상은 언제 봐도 놀라웠다. 별다른 장식 없이 밋밋하게 들어선 우물은 사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통로였다. 우물을 통해 대지를 내려다보며 사계절을 보고 온갖 생물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사도들의 낙이었다.

    “다들 일하러 가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아, 미옌!”

    첫 번째 사도, 미옌은 누구보다 철저한 성격이었다. 갈리프가 가장 신뢰하는 사도라 불릴 정도로 사도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였다.

    “다무스. 넌 두 번째 사도이면서 형제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걸 계속 방관했던 거냐?”

    “그렇지만 이런 걸 보고도 어찌 그냥 지나칩니까. 저 바다를 보십시오. 분명 검푸를진대 햇살이 비추니 보석처럼 반짝이지 않습니까.”

    “빨리 일어나라. 영혼을 인도하지 않으면 천칭이 멋대로 기울어버린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반항심 강한 네 번째 사도, 팔리야가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미옌은 갈리프 님이 아니라 천칭의 사도 같네. 말끝마다 천칭, 천칭. 설령 기울어도 갈리프 님이 바로잡아 주겠지. 천칭은 어차피 그분의 뜻을 따르는 심판대에 불과하잖아?”

    “헛소리 말고 당장 내려가!”

    미옌의 잔소리 끝에 결국 사도들은 흩어져 대지로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팔리야의 엉덩이를 걷어차 우물로 밀어 넣은 미옌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어느새 나타난 갈리프가 서있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언제 마주해도 말문이 막혔다. 미옌은 오금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갈리프는 늘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은하수를 실로 자아낸 듯 빛나는 은발이 신비롭다 못해 경이롭다. 어쩌면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한 올 한 올마다 진짜 별이 담겨있을지도 몰랐다.

    갈리프는 최초의 빛이자, 우주의 모든 빛 그 자체였다.

    인간들은 그 빛을 감히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용이라는 생물이라 칭하고, 그녀로부터 비롯된 사도들을 용의 심장 조각이라 묘사했다.

    미옌은 그런 인간을 상상력이 풍부한 족속들이라 부르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감만은 꽤 정확하다고 평가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저 말괄량이들을 어떻게 움직였을지.”

    “철이 아직 덜 들어 그렇겠지요. 언젠가는 형제들도 사도다운 사도가 될 겁니다.”

    갈리프는 말이 없었다. 늘 그렇듯 평화로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옌은 충분했다. 빛의 사도로 태어나 영혼을 인도하는 의무를 행하는 건 미옌에게 있어 세상의 전부였고, 삶의 목적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미옌은 우물에 뛰어들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갈리프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이윽고 우주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천칭이 기울고 있었다. 사도가 내려가고 나면 언제나 이런 소리가 들렸다. 인도된 영혼이 심판대인 천칭에 오르는 소리였다.

    갈리프는 천칭이 이내 균형을 이루는 걸 느끼고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 * *

    비극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천사님. 아직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아이입니다. 저는 데려가셔도 좋으니 아이만큼은 제발 기회를 주세요, 제발…….]

    “이런 영혼이 한둘인 줄 아느냐. 어미의 배 속에서 죽은 영혼도 많아. 네 아이는 적어도 숨이라도 쉬어보지 않았느냐.”

    미옌은 갓난아이의 몸에서 빠져나오려는 영혼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여자의 영혼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린다 싶었는데 결국 강둑이 터졌다. 강과 가까운 곳에 살던 인간이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었다.

    물이 빠진 바닥에선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강가는 막 죽음을 맞이한 영혼으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우는 소리가 괴로우리만치 쟁쟁했다. 참사의 현장이었다.

    [어찌 이리 매정하십니까. 평생을 저놈의 노예로 살면서 매질을 당했습니다. 눈멀고 귀먹은 가축처럼 굴려지다 겨우 도망쳐 자유를 찾았단 말입니다. 이제야 사람처럼 살아보려 하는데, 왜…….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건가요!]

    여자의 영혼이 악에 받쳐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도망친 여자를 추격하러 왔다가 급류에 휘말려 죽은 귀족의 영혼이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사연 없는 영혼은 아무도 없어. 천칭이 기울기 전에 어서 가야 한다. 아이에게서 비켜라. 강제로 끌어내기 전에.”

    [안 됩니다. 안 돼요……. 이 애는 안 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제발…….]

    사도의 권능이 갓난아이의 영혼을 억지로 끌어냈다. 밭은 호흡을 이어가던 작은 육신이 뚝 멈추자 여자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때 죽은 귀족의 영혼이 바락 외쳤다.

    [버러지 같은 게! 네년이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죽을 일은 없었다고! 노예면 노예답게 굴 것이지, 감히 내 재산 주제에 도망을 쳐? 원래 저것도 내 것이었단 말이다!]

    귀족의 영혼이 갓난아이의 영혼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 마지막 한마디가 도화선이었다.

    여자의 영혼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난 두 영혼이 머리채를 잡고 한데 뒤엉켜 개싸움을 벌였다.

    그걸 말리다 미옌은 여자의 영혼에게 덩달아 머리채를 잡혔다. 뿌리까지 뽑히는 듯한 감각이 참으로 아찔했다.

    [네가 그러고도 천사야? 그러고도 천사냐고!]

    “잠, 잠깐 이것 좀 놓고 말해라. 진정해. 큭, 이런다고 죽은 걸 살려줄 순 없어.”

    [이따위 운명을 줘놓고도 내 인생을 심판할 순 없어! 적어도 기회는 똑같이 줘야 할 거 아니야, 저놈처럼 날 때부터 밀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줬어야 공평한 거 아니냐고…….]

    결국 짜증이 난 미옌은 광대한 권능을 사용했다. 반경 수십 미터 내의 영혼이 일제히 불타올라 우주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후…….”

    미옌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다듬었다. 여자의 영혼에게 뜯기던 자리가 아직까지 아팠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팔리야가 배불뚝이 영혼 하나를 인도하며 슬쩍 다가왔다.

    “미옌, 살살해.”

    “살살할 게 뭐가 있나. 그러는 팔리야 너야말로 사도답게 행동해라. 심판받을 영혼에게 거짓말 하지 말고.”

    팔리야가 인도하던 배불뚝이 영혼은 거짓된 신앙으로 사람들을 착취하던 제사장이었다. 팔리야는 육신을 떠나기 싫어하는 제사장의 영혼에게 낙원으로 데려가 주겠노라 거짓말을 해 구슬린 참이었다.

    팔리야는 기지개를 켜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이렇게 데려가나 저렇게 데려가나 데려가기만 하면 상관없잖아. 우린 인도자이지 심판자가 아닌걸.”

    매번 사도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팔리야였다. 평소 쌓아두던 감정이 울컥 올라와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미옌은 이내 그만두었다.

    “…알겠다. 일단 가지.”

    형제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옌은 반박 한 번 하지 않고 조용히 차원의 문을 열었다. 팔리야는 미옌에게 고지식하다느니 꽉 막혔다느니 하며 구시렁거렸지만, 미옌의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위 운명을 줘놓고도 내 인생을 심판할 순 없어!’

    서럽게 울부짖던 영혼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에 저항하던 영혼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었는데도, 오늘따라 유독 신경이 쓰였다.

    ‘위대한 천칭이 그간의 삶을 모두 판단해 줄 것이다. 팔리야가 옳아. 난 인도자이지 심판자가 아니야.’

    그러나 끝없이 합리화를 해도 한번 떠오른 의문은 해갈되지 않았다. 그렇게 천칭에 다다를 때까지 미옌은 영혼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마침내 모든 영혼을 천칭의 두 접시 중 빛의 영역에 올린 후였다.

    “팔리야.”

    “응?”

    “너는 저 영혼들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황동빛의 휘황찬란한 천칭은 이리저리 기울고 있었다. 생전의 모습을 잃고 빛알갱이처럼 변한 영혼들은 가만히 앉아있기도, 깔깔거리며 몰려다니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어둠에 빨려가듯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심판을 받잖아. 죄지은 영혼은 영원히 소멸되고 그렇지 않은 영혼들은 환생하거나 밤하늘의 별이 되지.”

    “…그렇지.”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

    싱겁긴. 팔리야는 피식거리며 미옌을 툭 쳤다.

    “어쨌든 어서 돌아가자고. 다무스가 그러는데 글쎄 드디어 제 신전이 생겼다지 뭐야? 그 정신 나간 둘째를 섬기는 인간들이 있다니, 희대의 사이비가 생기는 게 아닐까?”

    팔리야가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졌다. 토끼에 감동받아 하루 종일 토끼나 돌보고 있는 녀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미옌은 끊임없이 접시의 균형을 맞추는 천칭을 관찰하고 있었다.

    “뭐 해? 안 가고.”

    “팔리야. 먼저 가라.”

    재미없긴. 팔리야는 홀로 진지한 미옌에게 곧 흥미를 잃었다. 나선의 은하길을 따라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천칭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진 마. 갈리프 님이 금하신 거니까.”

    그러나 미옌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형제가 떠나고 혼자 남은 미옌은 천칭에 가까이 다가갔다. 윤이 나는 접시 위로 모래알 같은 것들이 와그르르 굴러다녔다. 비록 살아있을 적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미옌은 그들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미옌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영혼의 목소리를 듣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

    [으왓핫핫! 신은 역시 내 편이야! 고작 노예 따위를 쫓다 억울하게 죽은 내게 기회를 주신 게지!]

    평생을 노예로 살다 죽은 여자의 영혼이 소멸한 것이다. 그녀를 착취했던 귀족은 새로운 육신을 입고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판이 이렇게 마무리된다고……?’

    고요하던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선한 자는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불변의 법칙이었고 우주가 정해둔 순리였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인도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생전의 발자취를 천칭은 알고 있을 테니까. 천칭은 누구보다 공정하게 심판을 해줄 테니까.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비극의 진실을 엿본 사도는 강둑에서 인도한 영혼이 모두 심판을 받을 때까지 이들을 관찰했다.

    바뀌는 건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힘겨운 삶을 살았던 영혼은 심판을 받고 소멸되었으며, 반대로 평생 남의 고혈을 빨아먹고 살았던 영혼은 구원받아 또다시 대지로 내려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적진 않았다.

    며칠을 우두커니 앉아 천칭을 지켜본 결과, 미옌은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심판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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