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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2)화 (92/292)
  • 92화 

    “제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건, 모든 시간과 사건은 아주 촘촘히 맞물려 있다는 거예요. 야사로 남은 사소한 일들조차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비트는 역할을 한단 말이죠.”

    응접실 밖, 복도에 걸린 자그마한 등불이 두 사람의 발밑에 동그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시아는 루드윅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과거를 함부로 바꾸는 건 위험해요, 레이디 켈튼.”

    루드윅은 그녀가 괜히 속상해할까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아는 한참 동안 그림자를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두 번째 시간 여행, 그러니까 재키 레이븐을 체포하고 원래 시대로 돌아갔을 때였죠. 제가 알고 있던 인간관계가 모조리 변해버렸더라고요. 좋아하던 소설의 작가가 바뀌고, 철천지원수 같던 친구가 절 짝사랑했던 남자로 바뀌었죠. 예정에 없던 공습이 아르카나를 덮치고, 마차 기사님이 절 구해주다가 사경을 헤매게 됐어요.”

    시아는 곧게 서있었다. 루드윅은 덜컥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놀라운 건 뭔지 알아요? 어쨌거나 광룡은 나타났고,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아 제가 알던 3587년의 모습까지 도달했단 거예요. 갈리프도흐도 그대로였고, 제 가족도 그대로였어요.”

    “…레이디 켈튼.”

    “과거를 바꾸었을 때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는 저도 로드 젤마니도 알 수 없어요. 이미 건드린 시간을 수습할 수도 없죠. 다만 우린 속수무책으로 밀려드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헤엄쳐 나가야 할 뿐이에요.”

    루드윅은 시아에게서 잠잠한 기백을 발견했다. 차분한 목소리엔 제 주장을 담담히 풀어내는 힘이 있었다.

    “로드 젤마니는 강물에서 떠내려가는 사람을 본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구할 수 있다면 구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전 시간의 흐름을 헤엄쳐 나가다 손만 뻗으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것뿐이에요. 어차피 우리가 과거에 온 것만으로도 원래 시대는 우리가 알던 모습과 완벽하게 같을 수 없거든요.”

    시아는 메이덜린에서 맞닥뜨렸던 릴리 알펜을 떠올렸다. 릴리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때 시아가 메이덜린의 거리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재키 레이븐의 공격을 받았던 릴리가 그대로 쓰러져 죽었거나 혹은 경찰서로 들어가 헨리 던로에게 도움을 청했더라면.

    시아가 릴리 알펜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어쨌든 당신이 재키 레이븐을 잡은 덕에 릴리 알펜이 살아남았던 거니까.’

    라크시스의 말이 바람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시아는 설핏 웃었다.

    “이미 바뀔 건 다 바뀌었다니까요? 그리고 광룡의 봉인을 찾으려고 한 순간 이 시대는 우리가 이미 바꿔버린 것과 다름없어요.”

    “…그렇습니까.”

    유리 덮개의 뚜껑이 자꾸만 들썩였다. 정령이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시아는 뚜껑을 슬며시 열어주었다. 그러자 틈새에서 정령 하나가 포르르 빠져나와 창밖으로 날아갔다. 밤하늘에 뜬 별처럼 작은 점이 되어 정령이 사라졌다.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웠어요.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는 비밀인 거 알죠? 로렌 허슬러가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라는 것도 마도 시대의 사람들에겐 비밀이에요.”

    시아는 손가락을 들어 쉿, 입술을 가렸다. 생긋 웃는 눈꼬리가 나비처럼 휘어졌다.

    인사를 남기고 시아는 떠나갔다.

    루드윅은 시아가 사라진 자리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있었다. 과거를 연구하는 학자인 그에게 있어 생각할 것이 많아진 밤이었다.

    * * *

    “주인님 말씀이십니까? 워낙 잠이 없으신 분이라 아직 집무실에 계실 듯합니다만…….”

    론다니는 동요라곤 전혀 느껴보지 못한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는 오랜 경력의 노집사에게서 의심의 낌새를 발견했다. 늦은 시간에 내가 제 주인을 찾는 의도를 궁금해하는 거겠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슴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시아는 응접실에서 나와 곧바로 아스타를 만나려 했다. 등불에서 불티가 도망친 것까지 보았다.

    지하 감옥에서 라크시스는 분명 아스타를 향해 정령으로 우릴 지켜보지 않았느냔 투로 물었지.

    현자의 별 때문에 백작과 대화하려고 했던 건 맞다. 그 대화가 진심으로 통하길 바랐던 것도 맞다.

    하지만 아스타는 여전히 시아 일행 주변에 눈과 귀를 심어 지켜보고 있었다. 시아는 백작과의 대화가 진심이 될 수 있도록 그녀의 정령을 살짝 이용했을 뿐이다. 일부러 정령이 든 등불을 받아 들고 루드윅과의 대화를 듣게 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은 늦긴 늦었지.

    사람은 원래 등 따숩고 배부르고 정신이 맑을 때 가장 관대해진다. 잠들기 직전은 통상적으로 그런 상태와 거리가 멀었다.

    졸리면 대화고 뭐고 만사가 다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시아가 내일 아침 아스타를 다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론다니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시아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시아는 얼떨결에 론다니를 따라갔다. 생각보다 봉인을 찾는 일이 빠르게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솟는다.

    그러나 집무실 방문은 결국 불발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켈튼. 주인님께선 안 계시는 것 같군요. 아까까지만 해도 국왕 전하와 담소를 나누고 계셨는데, 아마 오늘은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론다니가 정말로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백작이 집무실에 없는 게 집사의 잘못은 아닌걸.

    “아니에요. 저야말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한걸요.”

    “방까지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시아는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아까 라크가 날 찾았다고 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방에 들러서 일기장을 챙겨야겠다.

    로드 젤마니랑 했던 이야기들을 라크시스에게도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시아는 텅 빈 복도를 지나 홀로 계단을 올랐다. 어둠에 잠긴 복도에 제 구두 소리만 울리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론다니에게 같이 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이젠 등불에도 정령이 몇 남아있지 않았다. 저 멀리 삼 층 복도 끝 방이 보였다. 즉 바로 옆 시아의 방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시아는 발을 재게 놀렸다. 그렇게 방 앞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수십의 정령불이 어둠 속에서 화악 타올랐다.

    “늦었네.”

    태양이 떠오른 것 같았다. 순식간에 밝아진 복도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롱대는 그림자 속에서 사자의 갈기를 닮은 머리카락이 실루엣을 따라 쓸어넘겨졌다.

    시아는 멍하니 실루엣의 이름을 불렀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아스타가 씨익 웃었다. 그녀는 실내복 차림으로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정령 하나가 아스타의 어깨 위에 서서는 시아를 가리켰다. 종알종알,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시아는 그 정령이 바로 등불에서 도망쳤던 정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아?”

    “그게.”

    할 말이 분명 있었지. 하지만 시아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스타의 시선 마주한 사람은 누구나 이럴 것이다. 그녀의 기백에 시아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말았다.

    아스타가 말했다.

    “이렇게 계속 세워둘 건 아니지? 날이 춥다. 일단 들어가자.”

    【 별보라가 몰아치던 밤 】

    시아는 한참 동안 고성 삼 층의 끝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시아를 찾아다니던 요르문이 지쳐서 제 방으로 돌아가고, 론다니가 무기고를 떠나 성벽을 한 바퀴 돌면서 모든 경비병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 시아는 아스타와 함께 있었다.

    그렇게 달이 밝았다. 집무실에선 아스타가 기르던 흰부엉이가 간간이 우는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렸다. 부엉이가 주인의 태만을 견디지 못해 직접 사냥에 나서는 날갯짓 소리가 푸드덕 들릴 즈음, 시아는 복잡한 감정을 속에 품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육중한 문을 살짝 닫고 돌아설 때였다.

    “시아.”

    문과 가장 가까운 창가에 라크시스가 비스듬히 기대 서있었다. 시아는 움찔 놀랐다.

    “…라크?”

    라크시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시아에게 다가왔다. 시아는 당황했다. 라크시스는 누가 봐도 오랫동안 시아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깨 위엔 오래된 달빛이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신비로운 달빛을 받아 생명을 얻었다는 조각상의 전설 같았다. 라크시스는 빛바랜 명화처럼 복도의 한편에 놓여있었으나, 시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생명이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색을 띠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 찾았어요? 아니,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제법 쌀쌀한 계절이었다. 별다른 난방시설도 없는, 부실한 유리창이 전부인 중세의 고성은 사람이 오래 서서 기다릴 곳이 못 됐다.

    시아는 창백해진 라크시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의외로 라크시스의 손은 따뜻했다. 생각해 보니 허공에서 물도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제 몸 하나 따뜻하게 간수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민망해진 시아가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손마디에 얽혀들었다.

    꽉 맞물린 아귀는 일부러 맞춰서 짠 가구처럼 두 사람의 손을 하나로 만들었다. 빈틈없는 접촉에 견디지 못한 시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라크시스가 걱정스레 말했다.

    “손이 차군요.”

    구름 같은 목소리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가벼운, 그러나 물기를 머금은 듯 묵직한 울림이 그녀의 어깨 위에 나붓이 닿았다.

    심장 위에 솜털이 자라 쭈뼛 선 기분이다. 피부 속이 간지러웠다. 시아는 이상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어딜 어떻게 긁어도 이 낯선 간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시아는 애꿎은 벽돌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원래 손발이 찬 편이에요. 그나저나 전 왜 찾은 거예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밑의 동그란 이마와 갈팡질팡하는 눈동자.

    라크시스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라크시스가 시아를 데리고 간 곳은 본성에서 가장 탁 트인 성벽이었다. 외성의 높은 벽이 시야를 가리지 않고, 파도치는 절벽만이 검푸른 밤바다를 지키는 장소.

    시아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가 허허벌판을 보고 물었다.

    “…뭘 보여주려고 했는데요?”

    “곧 볼 수 있을 겁니다.”

    라크시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

    별과 별 사이, 아무것도 없던 흑록색의 어둠 속에서 빛이 솟아나더니 긴 꼬리를 남기며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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