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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1)화 (91/292)
  • 91화 

    “원래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면 알아봐 드릴까요? 어쩌다 보니 젤마니 가문과는 미래에도 연이 좀 있게 됐거든요.”

    루드윅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증손자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었겠지.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내 후손? 어우, 감도 안 잡히는걸.

    시아는 루드윅에게 자신이 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지 털어놓았다. 애초에 칠십 년 후에서 왔다는 걸 들키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루드윅은 시아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게 될 거라면 대충 내 사정도 알게 하는 편이 낫지.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듣던 루드윅은 점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응접실의 테이블을 습관처럼 다닥 두드리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디 켈튼이 남은 광룡의 봉인이라도 모두 찾아내야 종말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거겠네요.”

    “그런 셈이죠. 이미 세 개는 파괴된 게 확실하니까요.”

    아홉 개 중에 한 개는 시아가 시간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어의 눈물이라 불리는 봉인은 켈튼 저택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르카나 중앙역의 봉인과 오토마톤의 심장 역시 파괴되었다.

    일기장을 보고 추측한 아홉 개의 봉인 중 네 개의 행방은 이미 확실했다. 슈테른베슈테크에서의 봉인은 순서 상 다섯 번째로 찾게 될 봉인인 셈이었다.

    루드윅이 중얼거렸다.

    “이번 봉인을 포함해서 앞으로 네 개라…….”

    “앞으로 다섯 개죠.”

    “아니죠. 첫 번째 사도 미옌이 배신했고, 광룡을 봉인한 사도는 모두 여덟이니 남은 건 네 개가 맞지요.”

    시아는 루드윅의 말을 정정하려다 멈추고 말았다. 신화에 따른다면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기장엔 분명…….”

    봉인이 아홉 개라고 되어있었는데. 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기장을 가방에 두고 와서 지금 당장 펼쳐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루드윅을 만나지 못해서 전해 내려오는 갈리프 신화대로 봉인의 개수를 헤아렸을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루드윅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신룡 갈리프가 인간 아이로 인해 타락했고, 광룡이 된 갈리프를 그의 아홉 사도가 봉인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라크와 같이 일기장을 다시 해석해 봐야겠어.’

    처음엔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도 엄청 부끄러웠는데. 이미 공공재가 되어버린 일기장이었다. 수치심을 느낄 여유는 포기해 버린 지 오래였다.

    시아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곤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현자의 별이 광룡의 힘을 봉인해 둔 미궁의 열쇠라는 말씀이시죠. 그것도 에드먼드 3세가 내내 걸고 다니던 큼지막한 루비와 짝을 이루어서요.”

    “결론적으로는 네, 그렇죠. 사실 한때는 미신이 얽힌 유물로 제국에 알려졌지만요.”

    “미신이요?”

    “현자의 별은 누구든 소유한 자를 대마법사로 만들어주는 유물이다, 뭐 그런 흔하디흔한 평범한 내용의 미신 말입니다.”

    턱을 괴고 조곤조곤 풀어놓는 루드윅의 이야기 속에서 현자의 별은 정말로 소국을 바라보는 제국의 오만함으로 포장된 유물이었다.

    제국이 후에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건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다른 대륙에 비해 유독 제국이 위치한 중앙 대륙에서 마법사가 많이 태어났고, 대기 중의 풍부한 마력과 북부의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 탓에 제국은 오래 전부터 마법과 관련하여 상당한 혜택을 누려왔다.

    그러니 마법에 있어서 제국이 자만하게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무스는 과거 해군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소국임에도 번번이 제국군을 막아내는 다무스를 보고 제국에선 그 원인을 알아내려 애를 썼는데, 그 과정에서 현자의 별이란 유물이 괜한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새 발바닥만 한 섬 주제에 감히 위대한 제국에 맞서는 대마법사가 있단 말이냐?’

    아스타의 마법이 해전에서 결정타를 날리는 건 맞았지만, 슈테른베슈테크가 제국의 해군을 상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랜 경력의 뱃사람으로 구성된 아스타의 기사단과 눈만 마주쳐도 손발이 척척 맞는 그들의 호흡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제, 케르딕 7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존심 탓이었다. 살아남은 말단들이 아무리 본국으로 돌아가 다무스의 저력에 대해 말해봤자 황제는 나약한 패배자의 변명이라고만 여겼다.

    ‘제국의 위대한 붉은 군대가 고작 변방의 섬나라에 패배할 리가 있겠느냐. 다무스의 변경백은 요사스러운 주술을 쓰는 마녀라고 했지.’

    케르딕 7세가 현자의 별에 집착하게 된 것도 아스타에게 번번이 패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복동생 이자벨라 황녀에게 부황의 사랑을 빼앗기고 사생아로 전락해 황궁에서 살면서 진작 열등감 덩어리가 되었던 케르딕이었다.

    그리하여 한때 케르딕은 현자의 별을 얻기 위해 라크시스를 구슬린 적도 있었다. 물론 처참히 실패했지만 말이다.

    ‘고대 마법사라고 있는 놈은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아니, 되었다. 요부를 상대하는 데에 굳이 고대 마법사까지 대동할 필요가 있겠느냐.’

    케르딕은 현자의 별을 막대한 마력이 담긴 마정석이라고만 여겼다. 소유한 자에게 마법을 허락하는 유물. 이자벨라와 달리 티끌만 한 마력조차 없었던 케르딕은 평소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에도 열등감을 느꼈다.

    그렇게 케르딕은 현자의 별에 집착하게 되었다. 단지 자신의 자존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시아는 턱을 괴곤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자벨라 황녀는 현자의 별이 어떤 유물인지 알고 있었던 거네요.”

    “아까 로드 슈테른베슈테크와 에드먼드 3세의 대화를 복기시켜보면 그렇죠. 그렇지 않고서야 이자벨라 황녀가 케르딕 7세의 제국군과 갈라서면서 현자의 별을 노렸을 리가 없으니까요.”

    이자벨라 황녀는 분명 손위 형제인 케르딕 7세와 돈독한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케르딕 7세가 후대에 인망 좋은 황제로 회자되는 이유도 황비인 캐서린 노팅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더불어 이자벨라가 이복동생임에도 각별히 아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자벨라는 왜 제국군을 공격하면서까지 현자의 별에 집착했을까. 그녀가 미궁을 열어 광룡의 봉인을 얻으려 한 이유는 뭘까.

    루드윅이 말했다.

    “그럼 레이디 켈튼은 미궁을 열러 가실 건가요?”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미궁 속의 봉인이 제가 찾던 광룡의 봉인 같으니까요.”

    시아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텅 빈 응접실엔 그녀가 들고 온 등불 하나만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등불 안에서 조그마한 불티가 유리에 붙어 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스타가 부리는 불의 정령이었다. 먼지만 한 눈이 왜인지 모르게 충격을 받고 커져있었다.

    이윽고 정령은 저들끼리 한데 모여 심각한 얼굴로 옹알대기 시작했다. 녀석들, 요 조그만 머리로 무슨 작당을 하고 있을까. 시아는 무의식중에 유리 덮개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놀란 정령이 항의하듯 유리 덮개 안을 마구 헤집으며 날았다. 불꽃이 정령의 꼬리처럼 뒤따라 사방으로 일렁였다.

    시아는 피식 미소 지었다.

    “미궁도 미궁이지만 어쨌든 일단 열쇠부터 얻어야겠네요. 현자의 별과 붉은 심장이 열쇠라고 했죠.”

    기지개를 쭉 켜며 한숨 돌리려는데 루드윅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담긴 표정이 퍽 이상해 시아는 루드윅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루드윅은 한참 대답 없이 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현자의 별을 또 훔치실 거라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했더니. 시아는 어이가 없어 빽 외쳤다.

    “안 훔쳐요!”

    “저는 공범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사 하는 거죠.”

    “안 훔친다니까요…….”

    그러면서도 시아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사실 한편으론 일이 수틀리면 현자의 별을 훔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원래의 난 경찰서 가는 것도 무서워하던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었는데.

    광룡의 봉인이란 게 참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루드윅이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대화해 봐야죠. 로드 슈테른베슈테크는 생각보다 개방적이고 수용력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그건 그렇죠. 옹졸한 군주는 아니더라고요. 역사가들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던데요.”

    시아는 아스타가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까진 그녀만의 추측이었으니까.

    다만 그 추측이 들어맞는다면 대화가 조금 더 편해질 것이란 생각을 할 뿐이었다.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드윅이 시아를 배웅해 주려고 뒤따라 일어섰을 때였다.

    응접실 입구에 멈춰 선 시아가 루드윅을 뒤돌아보았다.

    “아, 추가 질문을 잊었네요.”

    “아아, 말씀하세요.”

    루드윅은 시아의 질문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궁금해하던 건 바로 역병의 시발점이었다.

    루드윅은 시아에게 거짓 없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곤 조용히 물었다.

    “…역사를 바꾸시게요?”

    “바꾸려는 게 아니에요. 고통스러운 죽음을 피하게 해주고 싶은 거지.”

    씨즐턴행 기차에서 루드윅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속에 자리했던 부채감이었다.

    론다니의 손자라는 이유로 돌을 맞았던 마을의 노인. 마녀로 몰린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역병으로 죽어간 사람들. 제국에게 희생된 다무스의 삶.

    “그냥 빚을 갚으려는 것뿐이에요. 만약 이 시대의 다무스 왕국이 제게 현자의 별과 붉은 심장을 선뜻 내준다면 된다면 전 제국의 부속 도서 씨즐턴이 아닌 다무스 왕국에 빚을 지게 되는 셈이잖아요.”

    대항해시대에 제국이 점령한 식민지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미래의 다무스는 완전히 제국령이 되어있었다. 신화와 역사를 잃고 국호마저 씨즐턴으로 바뀌어버린 채였다.

    남의 아픔을 짓밟고 성장한 부 위에서 시아는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니 다무스에게 빚을 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설마 로드 슈테른베슈테크에게 모든 걸 말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가 영지민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모든 역병을 막고 치료해 주려 하는 것도 아니고요.”

    뭐,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안 믿으면 그만 아니겠어요? 시아는 등불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루드윅은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역병이 돌고, 그때를 틈타 제국군이 다무스를 차지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는 씨즐턴은 사라지게 돼요. 3385년에서의 시간 여행이 끝나면 전혀 예상치 못한 3518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걸요.”

    우리가 입국허가서도 없이 다무스에 불법체류 하는 외국인이 될 수도 있는 거란 말이에요. 루드윅은 감옥에 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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