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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7)화 (87/292)

87화 

* * *

“이야, 이거야말로 세기의 사랑으로 기록될 만한 이야기였네요. 안 그렇습니까, 레이디 켈튼?”

에드먼드와 아스타가 함께 있을 땐 잠자코 있던 루드윅이었다. 루드윅은 방을 나오자마자 감탄하며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전 마법사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어쨌든 저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영에 수렴한다면서요. 에드먼드 3세는 그런 저주에서 스스로 벗어난 거고요. 바로 사랑의 힘으로요!”

“…로드 젤마니는 감성적인 편인 것 같군.”

“하하. 사람 사는 이야기 좋아하는 게 감성적인 거면 전 꽤 감성적인 편이죠. 신화나 역사도 어떻게 보면 다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왕가와 슈테른베슈테크 가문은 오랫동안 다무스의 피를 이은 인간의 후손으로 여겨져 왔다. 미궁을 지키는 두 열쇠인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 또한 전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화 속 존재의 현신에 열광했다. 왕과 사제가 신성한 영토를 지켜준다고 믿었기에 왕가와 백작가의 가두 행렬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 왕국이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이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 가문의 결합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철부지 왕자 에드먼드와 슈테른베슈테크의 아스타 소백작이 만나게 된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가 에드먼드 왕자야?’

‘…그래. 그럼 네가 내 약혼자가 될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구나.’

‘왕이 되기엔 너무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국왕 전하와 닮았을 거라 생각하고 왔는데 영 아니네.’

소백작님! 왕자 전하께 어찌 그리 무례한 언사를! 아스타의 옆에서 시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됐어. 호들갑 떨지 마. 그런 평가는 아버지도 하셨으니까.’

아스타는 에드먼드 앞에 우뚝 섰다.

‘야.’

‘…야?’

에드먼드는 제 귀를 의심하며 아스타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타는 그런 걸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에드먼드를 향해 당당하게 손을 내밀며 선언했다.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니는 거야. 내 남편 될 사람이라면 적어도 검은 휘두를 줄 알아야 하거든?’

아스타가 씨익 웃었다.

그 후 아스타는 정말로 매일같이 찾아와서 에드먼드를 들판이며 강가로 끌고 다녔다. 연무장에서 죽어라 난장판 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진검을 들다 손바닥이 터져 왕비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활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에드먼드는 그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저도 모르게 아스타가 올 시간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스타. 오늘은 왜 늦었어.’

‘언젠 내가 오는 게 싫다더니.’

‘…내가 그랬어? 아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아스타, 그거 알아? 튤립이 양파에서 자라는 거?’

‘바보야, 튤립이 어떻게 양파에서 자라니?’

‘아니야! 진짜라고. 내가 봤어! 튤립은 양파에서 자란단 말이야!’

에드먼드는 뚱한 표정의 아스타를 질질 끌고 튤립이 만개한 왕비궁의 정원으로 갔다. 아스타는 정원 한쪽에 펼쳐진 튤립을 보고 신이 나서 뛰어갔다.

‘와, 예쁘다. 에디, 튤립이 진짜 알록달록하지 않아?’

‘…나중엔 네 정원이 될 곳인데.’

뭐라고? 아스타가 되물었지만 에드먼드는 푹 익은 토마토가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에드먼드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아스타, 얼른 파보자고. 내가 한 말이 진짜란 걸 증명해 주지.’

‘그런데 이거 서대륙에서 들여온 비싼 꽃 아니야? 왕비님이 화낼지도 모르는데.’

왕비가 화를 낼지도 모른단 소리에 에드먼드가 멈칫했다. 아스타가 얼른 대꾸했다.

‘우리 그냥 구경만 하다 돌아가자. 튤립이 양파에서 자란다는 말 믿어줄 테니까.’

‘믿어줘? 거짓말하지 마. 아스타 넌 내 말 안 믿으면서 믿는 척하는 거잖아.’

에드먼드는 씩씩거리면서 튤립밭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섰다. 맨 손으로 버둥거리며 흙을 파더니 빨간 튤립을 냅다 뽑아 들었다.

‘봐, 진짜지?’

‘…진짜네.’

에드먼드는 의기양양했다. 얼빠진 대답을 하던 아스타는 곧 고개를 부르르 털고 대꾸했다.

‘하지만 빨간 색만 그런 거면 어떡해? 아니, 에디 네가 날 속이려고 일부러 양파를 땅에 심어놓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럼 또 파보든가!’

결국 그날 에드먼드와 아스타는 왕비궁의 튤립을 모두 뽑아놓은 죄로 오백 장에 육박하는 논리학 원서를 세 번 필사하는 벌을 받았다. 일주일 후 황량해진 왕비궁 정원을 다시 찾은 아스타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튤립 예뻤는데.’

‘다 아스타 너 때문이야.’

‘맞아. 에휴. 그냥 에디 네 말을 믿을 걸 그랬어. 왕비님이 이젠 튤립 안 심으신다며. 두 번 다시 못 보겠네.’

‘…내가 심어줄게.’

‘뭐?’

에드먼드는 귀가 새빨개져선 도망치듯 말을 뱉었다.

‘네가 왕비궁에 들어오면 내가 직접 심어줄게.’

네 정원에. 하지만 아스타는 에드먼드의 작아진 뒷말도, 새빨개진 귀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스타는 에드먼드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냐. 에드먼드, 튤립은 같이 심자. 같이 뽑았잖아.’

에드먼드의 고백을 들은 시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래서 튤립이란 말에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반응한 거구나.

이렇게 수줍은 사랑을 지켜오던 에드먼드 3세는 자타공인 약혼녀 아스타 사랑꾼으로 왕성에 소문이 났었다고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어느 연회에서 이자벨라 황녀를 만나자마자 돌변하고 만다.

아스타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이자벨라에게 간이고 쓸개며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곧장 청혼을 해버린 것이다. 이자벨라 황녀와 에드먼드의 결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결혼 전부터 이자벨라의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서 있었다고 했다. 아스타는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줄 알았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암. 괜찮지. 괜찮고말고. 렉시, 너도 여기서 알짱대지 말고 가서 할 일이나 하렴.’

알렉스는 아스타의 축객령에 집무실을 빠져나가다 침울한 표정의 집사 론다니를 만났다. 그러곤 똑같이 침울한 표정이 되어 같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주군, 이런 말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만. 제국의 케르딕 황제에게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갑자기 황제가 왜?’

‘…그게, 청혼서랍니다. 주군.’

그땐 몰랐지. 그게 현자의 별을 노린 청혼이었다는 걸.

‘그래도 다행이었지 뭐야? 황제가 이자벨라 황녀의 오라비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아가지곤 청혼을 거절했거든.’

아스타가 지나간 세월을 되짚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시아는 아스타가 채 숨기지 못한 마음의 상처를 보고 말았다.

‘아, 그래. 에디. 이자벨라는 왜 나와 케르딕의 결혼을 반대했던 거야? 둘이 사이가 꽤 좋았던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른가 보더군. 이자벨라는 케르딕을 증오해. 내가 저주 때문에 기억이 온전치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속내를 꽤 많이 털어놓더군.’

시아는 움찔 놀랐다. 이자벨라 황녀와 케르딕 7세는 배다른 남매임에도 사이가 각별했다는 역사 속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자벨라가 케르딕 7세를 증오했다니.

설마 저주를 걸어가면서까지 이자벨라 황녀가 에드먼드 3세와 결혼하려고 했던 것도 케르딕 7세 때문이었을까?

‘그럼 넌 왜 나와 케르딕 황제의 결혼을 거부했던 건데?’

‘…무의식적인 불쾌함이 들었다. 그 당시엔 이유를 몰랐지만, 아마 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거였을 테지.’

‘넌 황녀와 잘도 결혼해 놓고.’

‘…미안하다.’

이자벨라 황녀는 정말로 모종의 꿍꿍이가 있어 에드먼드 3세와 결혼했던 모양이었다. 아스타를 통해 듣게 된 이자벨라 황녀의 계략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백작의 생일 연회 날 밤의 제국군 기습은 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졌다. 아스타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한 이자벨라 탓에 정략혼으로 현자의 별을 얻으려던 케르딕 7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고, 어떻게든 현자의 별을 빼앗기 위해 케르딕은 이자벨라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다무스 왕국을 기습했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복 오라버니가 선전포고 없이 백작령을 기습할 것도, 현자의 별을 노리는 것도 말이다. 에드먼드의 말로는 이자벨라가 제국 황성에 첩자를 심어둔 것 같았다고 했다.

새벽에 친위대를 몰고 백작령에 찾아온 에드먼드 역시 이자벨라의 짓이었다. 에드먼드는 이자벨라가 제게 제국의 기습을 역이용해 백작을 구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서 현자의 별을 가져오라 명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자벨라 앞에서 항상 의지를 잃고 마는 몸뚱이가 저도 모르는 새 밤새 말을 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왜 거기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더군. 친위대는 내가 그대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단 말밖에 하지 않았지. 아마 군사를 지휘하는 그대의 포효를 듣고 내 몸을 조종하던 이자벨라가 놀라지 않았나 싶은데.’

중요한 건 아스타 역시 그 기습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항구가 열릴 것도, 외성의 경비병이 국왕의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줄 것도, 심지어 에드먼드가 찾아올 것도 백작은 알고 있었다.

에드먼드(사실은 에드먼드를 조종하던 이자벨라)에겐 제국군의 기습을 처리하고 슈테른베슈테크에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아스타가 완벽하게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대는 현명하군. 왕은 내가 아니라 아스타 그대였어야 했어.’

‘반역죄 덮어씌우는 소린 하지 마. 그러다 진짜 마녀로 몰려서 죽는다니까?’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아스타를 보면서 시아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다가올 미래를 들여다본 사람처럼 말했다. 제국군이 기습해 올 것도 알았고, 이자벨라 황녀가 현자의 별을 노리고 에드먼드 3세를 보내올 것도 알았다. 단지 현명하단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백작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노을 지는 저녁에 보는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남긴 붉은 꼬리가 사람을 홀릴 것처럼 아름답게 고성을 감싸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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