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6)화 (86/292)
  • 86화 

    “건강관리가 안 되어 있다고?”

    “그게…….”

    사실 오랫동안 샤샤리아를 하신 것 같아요. 시아는 그 말을 아스타에게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아스타가 당장 왕성으로 쳐들어가 궁의의 목을 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왜 물고 뜯고 싸우던 왕을 이렇게 신경 쓰는 건데?

    물론 에드먼드 3세가 혼몽한 와중에 이렇게 말하긴 했다.

    ‘아스타, 우리가 심은 튤립이 예쁘게 피었어.’

    그걸 듣더니 아스타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잠시만.”

    아스타가 침대를 빙 둘러싼 사용인들을 손짓으로 물렸다. 시아가 다급하게 아스타를 붙잡았다.

    “지금 국왕 전하껜 안정이 필요해요.”

    “아냐, 안 괜찮아. 열이 나는데? 레이디 켈튼이 이상한 바늘로 찔러서 그런 거 아냐?”

    에드먼드의 이마를 짚던 아스타가 시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억울했다. 아깐 치료해 줘서 고맙다더니. 치유의 사도가 내려온 것 같다면서. 뭐, 이상한 바늘?

    “긴장이 풀리셔서 그런가 봐요. 의술사 소견으로 외상은 아무 데도 없어요. 그리고 주사 맞기 전에 제대로 소독해 드렸거든요. 바늘은 멸균 포장 된 거 눈앞에서 뜯었고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원래 열이 나면 피를 뽑아야 하잖니. 역시 뜨거운 피를 안 뽑으니까 열이 안 내리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이발사를 불러야겠어. 당장 뜨거운 물수건과 은대야, 칼을 준비하라! 아스타가 시립해 있던 사용인들에게 외쳤다.

    피를 뽑는다고? 시아는 이제 환장할 것 같았다. 라크시스가 아스타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레이디 켈튼을 믿기로 했잖습니까.”

    “하지만…….”

    라크시스는 아스타에게 눈짓했다.

    아스타는 뒤늦게 레이디 켈튼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알아차렸다. 생각해 보면 저주의 틈바구니에서 에드먼드를 지켜준 건 제가 아니라 이 제국인 여자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보니 에드먼드는 열이 좀 나는 것 빼곤 처음보다 평안해진 얼굴로 잠들어 있긴 했다. 물론 난생처음 보는 도구며 치료가 영 불안하긴 했지만 레이디 켈튼을 믿어보기로 다짐하지 않았었던가.

    “…미안하구나.”

    아스타의 사과에도 시아는 여전히 토라진 표정이었다.

    “과다 출혈로 국왕 전하를 쓱싹해 버리고 싶으신 거면 미리 말씀 주시지 그러셨어요.”

    “…레이디 켈튼.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잔인하구나.”

    “잔인하긴요. 하하. 직업병이에요, 직업병.”

    별별 환자 다 상대하다가 생긴 직업병이요. 시아는 뒷말을 삼켰다. 하긴 여긴 3587년의 원래 시대가 아니지. 현대 의술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나도 스트레스를 어지간히 받았나 보네.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내비친 걸 보니. 시아 역시 아스타의 눈치를 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때였다.

    “…날 죽이고 싶었던 거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어도 됐었을 텐데, 아스타.”

    “에디?”

    에드먼드가 거무죽죽한 낯을 하곤 깨어났다. 눈 뜬 에드먼드를 마주하자 아스타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심코 부른 애칭마저 도로 들어갔다. 놀란 나머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몹쓸 짓을 많이 했으니. 아스타 그대가 날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하는 건 당연해.”

    그에 비해 에드먼드는 되레 안정적으로 보였다. 왕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축이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에드먼드가, 일국의 왕이 더러운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타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에드먼드는 아스타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골라내어 입술로 모양을 빚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 아니, 변명이 맞을 거야. 내가 그대를 저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건 사실이니 말이야.”

    에드먼드가 빚어낸 말은 작고 연약했으나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죄를 고백하는 자의 무게였다.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부족했던 거겠지. 내 한 몸 부서지도록 그대를 열렬히 사랑했더라면 황녀의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몰라.”

    에드먼드가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국왕을 대하는 가신으로서 예를 다 해야 할까. 나라를 제국에 팔아먹은 무능한 지도자로 질책을 해야 할까.

    아니면 날 저버린 연인으로 대해야 할까.

    성으로 돌아온 후 은발의 마법사가 국왕이 걸렸던 저주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아스타는 쉽사리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변명 따윈 듣지 않을 것이다. 에드먼드가 누워있는 방 앞을 배회하면서 아스타는 아귀가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이 무색하게 에드먼드는 아스타의 앞에 세상에서 가장 낮은 존재가 되어서는 고개를 숙였다.

    “같이 튤립을 심자고 했는데,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준비해 둔 터에 이자벨라의 예배당이 들어서 버렸거든. 그대는 이미 날 믿지 못하게 되었겠지만.”

    에드먼드의 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아스타는 바짝 얼어붙은 몸에 용암이 닿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아스타.”

    용암처럼 불린 이름이 아스타의 발끝에 닿았다.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뜨거웠다.

    응어리졌던 세월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고작 이름 한 번 불린 것뿐인데. 에드먼드의 입에서 제 이름이 불린 건 아득히 오래전이었다. 한때 아스타는 에드먼드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녀가 사랑하던 나라를, 영지를, 사람들을 모조리 앗아갔으니까. 그녀에게서 에드먼드를 앗아간 것도 에드먼드 본인이었으니까.

    “감히 용서를 바라지도, 구원을 바라지도 않아. 나의 죄를, 내가 고백한 죄를 그대가 인정해 주겠어?”

    묵직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종소리마저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열기로 가득했다. 신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회개하는 인간처럼, 에드먼드는 아스타의 발밑에 꿇어 모든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평생 그대에게 속죄하며 살아갈 테니.”

    용서도 구원도 바라지 않는다지만, 아스타는 알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죄를 인정해 주는 것이야말로 그를 용서하는 것이라는걸.

    그래, 튤립.

    같이 튤립을 심기로 했잖아.

    아스타의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디.”

    에드먼드는 숨을 삼켰다. 제 이름이 아스타의 목소리로 불리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튤립은 네가 심어.”

    “…아스타.”

    “네가 심은 튤립이 만개하면 그때 용서할게.”

    삼켰던 숨이 물기와 뒤섞여 끓어 넘쳤다.

    에드먼드는 아스타의 손을 쥐고 오열했다.

    * * *

    워. 이것 참.

    무슨 일이 있었는진 잘 몰라도 보는 사람 속을 다 태우는 절절한 고백이었다. 시아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간 사정을 알고 있는 성의 사용인들이 소맷부리로 눈물을 찍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가만 보니 루드윅도 소리 없이 코를 삼키고 있다. 감동받았나 보다.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어, 라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는 걸 보니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감정이 벅차오른 것 같았다.

    요르문은 심드렁했다. 라크시스는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안 좋아 보인다기보단 정확히 말하면 이 감동 어린 분위기를 못 견뎌서 조금씩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물 젖은 연인의 재회 장면이 좋은 거야, 싫은 거야?

    하지만 시아는 라크시스를 더 관찰할 수가 없었다.

    “…이건 뭐지?”

    오열을 멈춘 에드먼드 3세가 이성을 되찾곤 자신의 팔에 꽂힌 기다란 관과 그 끝에 달린 찰랑이는 액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물감이 드는데. 지금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어, 어어. 그거 만지면 안 되는데.

    에드먼드가 발견한 건 정화 마력액이 담긴 수액이었다. 낯선 물건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관을 꾹꾹 눌러보더니 팩에 담긴 액체가 제 팔뚝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걸 깨달았다.

    “국왕 전하의 회복을 돕기 위한 약물이에요. 수액은 거의 다 들어가서 조금만 있다가 빼드리려고…….”

    “불쾌하군.”

    에드먼드가 관을 움켜쥐었다.

    “안 돼요!”

    관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에드먼드는 제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절벽 위의 지옥도가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제 품으로 떨어지던 기사의 목, 뜨끈한 피, 미라, 저주에 걸린 친위대.

    “에디!”

    아스타가 비명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시아가 한 발 더 빨랐다.

    피를 멎게 하고, 남은 수액을 버리고, 놀란 에드먼드를 진정시켜 침대에 눕히고 마지막으론 에드먼드를 따끔하게 혼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셨어야죠. 멍 들고 피 나고.”

    “…미안하다.”

    “팔 안 아프세요?”

    에드먼드는 시아의 눈치를 봤다. 이리 따끔하게 혼난 건 왕자 시절 몰래 성 밖으로 놀러 나가 외박하여 선왕에게 혼난 적 이후론 처음이었다.

    에드먼드는 생긴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프구나.”

    에휴. 시아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아스타는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회복되는 에드먼드를 지켜본 아스타는 시아의 의술에 의심을 품었던 걸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백 년 전 사람치고는 꽤 개방적인 편이란 말이야?

    백작은 심지어 그녀가 시간 여행으로 감옥에 갇히던 첫날 연회 때부터 평범한 귀족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 기회다. 둘 다 내게 미안해하고 있을 지금!

    시아는 아스타와 에드먼드가 한데 모인 김에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국왕 전하,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불경죄라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저희도 이 사태에 휘말린 만큼 사정은 들어보고 싶어요.”

    시아가 운을 떼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에드먼드의 눈동자였다. 바짝 긴장한 기색은 근엄한 표정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두 분,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셨어요?”

    그와 동시에 아스타와 에드먼드가 대답했다.

    “어.”

    “…그랬었지.”

    단호한 대답에 에드먼드가 깜짝 놀라 아스타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타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시아가 또 한 번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요?”

    이번에도 아스타와 에드먼드가 동시에 입을 열었으나.

    “여전히 꼴 보기 싫어.”

    “…난 아스타를 사랑하네.”

    정반대의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에드먼드는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아스타에게 심장이라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에휴.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겠다. 아까의 눈물 젖은 재회 장면을 봐서 그런가. 후회 가득한 에드먼드 3세를 보니 마냥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예요?”

    아스타는 말이 없었다.

    결국 에드먼드가 한참 후에 운을 띄우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꽤 오래전이었지. 아마도 내가 이자벨라를 처음 만났던 어느 연회에서부터였을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