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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4)화 (64/292)
  • 64화 

    “역사서를 보면 씨즐턴에 역병이 돌자 제국에선 사제를 보내주었는데, 사제를 보내는 족족 씨즐턴에서 죽여버리자 케르딕 7세가 어쩔 수 없이 성전을 선포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하지만 얼마 전 당시 씨즐턴에 사제로 위장해 보냈던 군인과 첩자의 명단이 제국의 한 고성에서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알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었군요.”

    “그렇죠. 제국의 입장에선 선량한 승자인 편이 여러모로 좋으니까요.”

    간만에 대화할 맛이 났다. 케이틀린은 그가 최근 만난 사람 중에선 가장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상대였다.

    라크시스 옌의 여행 파트너라더니. 고대 마법사가 괜히 끼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 역병을 퍼뜨린 악마 숭배자라 기록된 것도…….”

    로드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그녀는 오래전 씨즐턴의 전신인 다무스 왕국을 망하게 했다고 알려진 백작이었다. 악마를 숭배하고, 사특한 마법으로 사람을 홀리며 역병을 퍼뜨려 당시 씨즐턴 인구의 삼 분의 일을 죽음으로 몰아간 희대의 마녀.

    “아마 제국의 입장에서 가장 거슬렸던 적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큰 거죠.”

    객실 벽을 길게 수놓은 창문으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신 탓에 시아가 소매로 눈가를 가렸다.

    열차가 기나긴 터널을 마침내 빠져나온 것이다. 탁 트인 전경으로 온통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바다, 하늘, 섬, 바다. 햇빛이 부서지는 하얗고도 검푸른 풍경에 눈이 서서히 익숙해졌을 즈음, 잡음 섞인 마이크 소리가 현재 웨스턴체스터 철교를 지나고 있다고 알려왔다.

    끝없는 바다는 속도를 덧없게 만든다. 산맥의 터널을 빠져나온 후 열차는 계속해서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본토와 씨즐턴을 잇는 철교 중간에서 다리를 이어주는 무인도 몇 개를 빼면 말 그대로 망망대해였다.

    시아는 말했다.

    “제국이 애증하는 다리를 지나고 있네요.”

    지금이야 씨즐턴과 본토를 직통으로 연결한다는 편리함 덕분에 웨스턴체스터 철교는 없어서는 안 될 다리가 되었지만, 처음 다리가 지어질 땐 시커먼 철골이 흉물스럽다며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일대의 여객선 사업이 크게 줄어든 것도, 실직자가 늘어난 것도 이 다리 때문이라지.

    “하하, 맞습니다. 케이틀린은 생각보다 제국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 정도는 상식이죠.”

    시아는 여상히 대꾸했다.

    저 멀리 본섬의 끝자락이 보였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하고 시커먼 마천루는 씨즐턴행 열차를 가장 먼저 맞이하고 있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철벽처럼 솟아오른 성벽 요새엔 사격과 포격을 위한 조그만 구멍들이 규칙적으로 나 있었다.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이었다.

    마을과 외따로 떨어진 성. 역병의 시작점이자 종착지로 여겨져 종국엔 버림받은 역사의 잔재.

    “그래서 씨즐턴에 가는 이유가 뭔가요? 시트리나 대성당의 진실을 사방에 알리려고요?”

    “하하. 그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걸요.”

    황제 폐하께서 좀 무서운 분이셔야 말이죠. 루드윅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아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 낡은 고성에 얽힌 괴담이 있어서입니다.”

    “괴담이요?”

    “매년 이맘때쯤 슈테른베슈테크 성에서 사람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관광객들의 소리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고성의 문을 닫은 한밤중에 아득한 함성 소리 같은 게 들려온다고 했으니까요.”

    도대체 한밤중에 문 닫은 관광지엔 왜 가는 건데. 심지어 고성은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에 위치했다. 괴담도 참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접하기 힘들겠구나. 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을 축제 소리를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이 시기엔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느라 축제는 열지 않습니다.”

    루드윅은 이젠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시아에게 바싹 붙어 말했다.

    “…귀신을 봤대요. 죽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의 귀신이 성안을 돌아다니더랍니다.”

    귀신을 보러 간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다음 날 죽은 채로 고성의 삼 층 복도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무언가에 꿰뚫린 듯 몸에 구멍이 난 상태로 말이다. 살아남은 사람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백작은 최후에 악마 재판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 고성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건 억울하게 죽은 백작의 저주일까?

    그 소문을 듣고 슈테른베슈테크 성에 숨어든 사람은 오히려 귀신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귀신이 아무 때나 나타나는 건 또 아닌가 봐?

    - 승객 여러분께 안내합니다. 잠시 후 열차의 종착지인 씨즐턴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내리시는 분들께선 두고 내리는 짐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바다 일색이던 풍경에 녹음과 사람, 건물이 섞여들었다.

    경적이 울리며 열차 지붕 위로 증기가 빠져나간다.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루드윅은 바깥을 한 번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고성에서 마지막까지 일했던 사용인의 후손이 마을에 살고 있어요. 그분에게 백작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할 겁니다.”

    【 기묘한 만남 】

    “썩 꺼져! 이 늙은이보고 애먼 사람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젊은것이 단단히 미쳐가지고는. 에잉, 쯧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루드윅의 코앞에서 문을 거세게 닫았다.

    시아와 라크시스, 요르문은 지금 사람이 매몰차게 문전박대당하는 걸 구경하는 중이었다. 루드윅은 당황했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문고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아이, 어르신. 그러지 마시고 말씀 좀 해주시죠. 아, 그래. 전 이런 사람입니다.”

    오래된 나무 문엔 사람 눈높이에 맞게 조그만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노인은 유리창에 두 눈만 띄우고 낯선 일행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루드윅은 문 앞에 서서 명함을 흔들었다.

    고고학자, 신화학자.

    “학문 연구차 조사하러 온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 씌워진 불명예를 벗어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노인의 시선이 가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문이 빼꼼 열렸다.

    루드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고리를 확 잡아 열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됐어. 이미 오래 전 일이야. 난 심지어 거기서 일한 적도 없다고. 아버지가 거기서 돌아가셨고 말이야.”

    아버지가 거기서 돌아가셨다니. 노인은 보기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 모양이었다.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유감인 걸 알면 당장 썩 가버려. 애먼 사람 괴롭히지 말고.”

    노인은 여전히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절벽 끝에 점처럼 위치한 고성에 닿아있었다.

    “하지만 어르신. 슈테른베슈테크의 사람들은 고성을 매우 사랑했죠.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주인 되는 백작 일가를 두고 차마 홀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악마 숭배자가 뭐 그리 좋다고 핏덩이 같은 어린 자식을 두고…….”

    “백작이 악마 숭배자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어르신.”

    루드윅이 노인의 양손을 덥석 그러모아 쥐었다. 가파른 골목길에서 마을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천진한 웃음소리였다.

    노인은 제 손을 잡은 건장한 학자와 그 뒤에 나란히 서있는 세 남녀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저 중 하나는 황제도 움직인다는 위대하신 고대 마법사라지.

    산등성이에 평화로운 바람이 불었다. 석회암 지대에 자리한 오랜 마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노인은 부풀어 올라 숨구멍을 막아선 울음기를 삼키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어디 가서 말도 못했어. 아버지가 그 성의 집사였다고 하면 돌을 맞았지.”

    “어르신…….”

    “지금은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 안 남았어. 제국군이 총과 칼을 들이밀고 오니까 사람들은 성으로 피했지.”

    그때의 슈테른베슈테크는 하나가 아니었다. 투항하고 목숨을 부지하자는 쪽과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쪽. 역병으로 몸도 정신도 피폐해진 사람들은 대부분 전자로 마음이 기울어있었다.

    “왕이란 자가 먼저 배신하더군. 슈테른베슈테크를 버린 거야. 케르딕 황제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말이야.”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은 제국에 마지막으로 함락된 곳이었다. 아찔한 협곡도 협곡이었지만 사자 같은 백작의 기세에 동조한 성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제국군에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덤덤하게, 그러나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직도 제국이 싫으네.”

    * * *

    “어쩌다 여기까지 따라오게 됐을까요.”

    시아는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내려가며 라크시스에게 소곤거렸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다무스 왕국이 건재하던 시절부터 있었던 마을이었다. 지붕이 낮은 연한 베이지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외벽에 달라붙은 상수도관이나 가스등, 증기 보일러실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있는 것처럼 보일 풍경이었다.

    “어차피 그 낡은 성엔 한번 가봐야 했습니다. 당신 일기장에 나와 있었으니까요.”

    루드윅은 시아 일행보다 두어 걸음 앞서 있었다. 괴담의 출처를 확인해 매우 신난 상태였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던 루드윅이 우뚝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제가 너무 빨리 걸었나요?”

    “아뇨. 걱정 말고 그냥 가세요. 우린 잘 따라가고 있으니까.”

    시아가 체념 조로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은 또 잘 듣는지 루드윅은 일행을 기다리지도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걸어갔다.

    “저렇게 좋을까.”

    군인의 덩치로 촐싹거리는 뒷모습을 보고 시아는 피식 웃었다.

    노인은 결국 루드윅에게 괴담의 근원지를 알려주었다.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삼 층 복도 끝엔 방이 하나 있었지.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면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곳을 찾아봐. 귀신 봤다는 놈들이 다 그 방 얘기를 했거든.’

    ‘그 방이 무슨 방인데요?’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던 건 기억나는군.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백작뿐이라 했어.’

    저 멀리 마을의 광장이 보였다. 주민들의 거주지가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철로를 따라 관광객을 태운 트램이 지나갔다. 증기 마차가 여행 가방을 든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라크시스가 말했다.

    “당신 일기장엔 세 번째 시간 여행 도중에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서 화재가 있었다고 적혀있었지요.”

    “그 화재가 귀신이 나타난다는 고성 삼 층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죠. 일기장엔 거기까지 적혀있지 않았지만, 정황상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시아 일행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귀신의 존재가 마류 이상 현상의 결과물일 것이라 짐작했다. 마류 이상 현상이 귀신으로 오해받은 전적은 아르카나 중앙역 매몰 사고 때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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