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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3)화 (63/292)
  • 63화 

    지난 시간 여행에서 메이슨 비렌체의 연구실을 찾아온 정체불명의 검은 남자. 노든 대공이 주시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인데다가 메이슨의 역병 의사 마스크에서 광룡의 봉인 조각을 찾아내 가져가기까지 했다.

    사실상 현시점에서 카얄로 의심되는 가장 유력한 존재였다.

    ‘라크, 슈나이더 경사가 분명 임관 반지로 추정되는 걸 끼고 있었다고 말했었죠?’

    ‘정확히는 파리스 맨틀러 교수의 진술이지만요.’

    오고 가는 시선만으로도 대화가 이루어졌다. 요르문만 그들의 눈짓을 이해하지 못해 갸웃거릴 뿐이었다. 시아는 루드윅의 손가락을 흘끔거렸다. 피처럼 붉은 루비가 두꺼운 금반지 가운데에 인장처럼 박혀있었다.

    “원래 임관 반지는 루비로만 맞추나요?”

    “아, 그건 아닙니다. 해당 기수마다 다르지요. 원칙적으로는 보석의 색도, 맞추는 여부도 자유라고 하지만 워낙 전통이 있다 보니.”

    하하. 루드윅은 멋쩍게 웃었다.

    “제가 브라이던힐에 들어갈 때가 하필 루비 반지를 맞추는 기수였던 것뿐입니다. 사실 전 붉은색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요. 그래도 이 녀석을 맞추는 시기에 입학한 덕에 좋은 친구도 얻었습니다.”

    발자크 로스라고, 저와 비슷한 괴담 마니아죠. 루드윅은 거친 손가락으로 광택이 도는 루비의 위를 여상히 쓸었다.

    “가멜 식민 전쟁도 사실 남대륙의 괴담들을 확인하려고 참전한 거고요.”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늑대를 숭배하는 부족이 제국군에게 복속되면서 저주를 퍼부었더니 정말로 다음 날 늑대가 부대를 습격했다든지 하는 거 말입니다.

    말문이 트여 자신이 목격한 수많은 이상 현상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한 루드윅은 정말로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병사가 마을의 성물을 건드렸더니, 다음 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어버렸다더라. 이런 얘기를 한참 듣고 있던 시아는 결국 어색한 눈웃음과 함께 루드윅의 무용담에 끼어들었다.

    “…정말 괴담을 좋아하시나 봐요.”

    “예. 좋아합니다. 비이성과 비과학으로 점철된 이야기의 진실을 파헤치다 보면 희열이 느껴지죠. 그러다가 정말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순간 제 궁극적인 목표가 달성되는 겁니다.”

    “아, 네에.”

    요르문과는 또 다른 의미로 미쳐있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내 주변엔 무언가에 단단히 몰두한 사람만 있는 거지.

    시아는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래, 케이틀린. 당신은 수도 사람이라고 했죠. 이런 괴담 혹시 들어봤나요?”

    “뭐가 됐든 못 들어봤을걸요.”

    “미스터리 괴담 마니아들 사이에선 유명한 얘기인데. 진짜 괴담이 나타났다고 주간 미스터리에도 실렸는데.”

    그래도 못 들어봤어요? 루드윅의 눈망울이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수도에 산다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진 않아요.”

    “그럼 지금 말해줄게요.”

    “아, 네에.”

    “우리끼리 하는 얘기가 있죠. 아, 여기서 우리는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뭐 이리 사족이 길어. 게다가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니. 우중충한 모르간의 공장 밀집 지대나 갱단이 본거지 삼은 안개 낀 부둣가나 거대한 태엽이 돌아가는 미치광이 과학자의 시계 첨탑 따위를 사랑하는 모임 같다.

    “외계인이 모르간에 나타났대요.”

    “네?”

    허무맹랑한 말에 시아가 저도 모르게 반문한 찰나였다.

    “정확히는 미래인이요. 칠십 년 후에서 3518년으로 온 미래인 말입니다.”

    챙그랑―

    시아는 그대로 포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미래인이라니.”

    한순간에 적막해진 객실은 숨을 쉬기도 버거울 정도로 경직된 공기가 가득했다. 요르문, 라크시스, 시아 모두 돌보다 딱딱한 얼굴이 되어있는데 오직 루드윅만이 눈치 없이 떠들고 있었다.

    “하, 하하. 그런 게 어딨어요. 미래인이라니.”

    “이건 진짜예요. 정말 어렵게 구한 증거인데, 당신에겐 특별히 보여줄게요. 케이틀린.”

    루드윅은 그의 지갑을 열어 고이 꽂아둔 지폐를 꺼내 들었다.

    “이걸 자세히 봐봐요.”

    “뭘 자세히 보라는 거예요?”

    “여기 왼쪽 위에. 이건 3587년에 발행된 진짜 지폐라고요.”

    뭐? 시아는 지폐를 낚아채듯 가져와 몇 번이고 발행연도를 확인했다.

    정말로 발행연도가 3587년인 비스크화(貨)였다.

    푸른 지폐 속 알리나 황제의 초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아는 정말로 까무러칠 뻔했다.

    “위폐겠죠. 어떻게 지금 3587년 지폐가…….”

    “아뇨. 이건 진짜예요.”

    루드윅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튼데일에서 발견됐대요. 정확한 출처는 모르지만, 처음엔 위폐인 줄 알고 경찰이 수사를 했었나 봐요. 그러다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수사를 멈췄고요. 벌써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로튼데일이라면 아르카나의 마도구 상점가였다. 스크롤. 그래. 거기서 스크롤을 샀었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시아는 지금도 제 지갑에 두둑이 들어있는 원래 시대의 지폐를 떠올렸다.

    “황제 폐하께선 위폐에 엄청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분인데. 별다른 기사도 없이 사건이 흐지부지되었죠. 위폐도 증거물이라며 모두 회수해가서 한참 말이 많았어요.”

    시아의 귓가에 미약한 한숨이 들렸다. 곧장 고개를 들어 한숨이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라크시스가 있었다.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다. 루드윅만 없었으면 진작 대놓고 마른세수를 했을 것이다.

    “우리끼리는, 아,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추측도 했었죠.”

    “뭔데요.”

    “메이덜린의 탐정 로렌 허슬러가 미래인일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쓸데없이 정확한 건데? 시아는 등줄기를 따라 흐르다 못해 거꾸로 솟구치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며 경악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재키 레이븐이 붙잡힌 후 한때 메이덜린 경찰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돌았거든요.”

    루드윅이 씨익 웃었다.

    “3587년 발행 비스크화를 사용한 사람이 로렌 허슬러이다.”

    “로드 젤마니, 루드윅. 아니, 잠시만요.”

    “위폐 사건을 수사했던 아르카나의 경찰이 위폐 사용범의 몽타주를 상인에게서 받았는데, 그 경찰이 얼마 안 가 메이덜린으로 발령이 난 후 몽타주와 똑같은 사람을 봤다고 합니다.”

    네, 맞아요. 그 사람이 바로 로렌 허슬러라는 거죠. 신난 루드윅이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게다가 어셔 경감의 훈장 수여식 이후 노든 대공이 로렌 허슬러를 직접 찾아 공을 치하하겠다고 발표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대요. 마치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지 뭐예요.”

    라크시스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갔다. 그를 오래 알아온 요르문은 벌써부터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한때 로렌 허슬러가 라크시스 옌의 연인이라는 소문도 있었죠. 재키 레이븐을 잡으러 다닐 때 내내 함께였다는데, 연인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면 황제를 협박해서라도 그녀의 정체가 드러날 만한 수사를 멈추게 하지 않았을까요?”

    루드윅이 3587년 발행 비스크화를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조명이 불안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원인은 바로 이를 악물고 있는 라크시스였다. 저놈이 조금만 더 떠들었다간 이 열차가 통째로 사라질지도 모르겠어. 요르문은 겁을 먹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치가 없는 건지, 간이 큰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루드윅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아, 마침 여기 로렌 허슬러의 파트너가 있었군요.”

    루드윅의 입꼬리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로렌 허슬러가 어디로 갔는지 고대 마법사께선 알고 계시죠?”

    시아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루드윅이 계속 말하게 두었다간 라크시스가 금방이라도 그를 창밖으로 집어던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와아, 그 얘기는 그만하고요. 그래서 씨즐턴에 가는 이유가 뭐예요, 로드 젤마니?”

    제발 다른 얘기 좀 하자. 시아는 어색한 박수를 치며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

    “씨즐턴에요? 아아, 그건 말이죠.”

    다행히 루드윅은 귀가 얇은 편이었다. 화제가 바뀌자 금방 말머리가 바뀌었다.

    씨즐턴행 열차가 서부의 고산지대를 통과한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뚫린 터널로 증기 열차가 삼켜지듯 들어왔다. 한순간에 어둠에 잠식된 창밖으로 희뿌연 증기가 갈 곳을 잃어 안개처럼 차올랐다.

    - 아, 아아. 열차가 에이즈번 산맥을 통과합니다. 환기가 시작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소음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빛이라곤 오로지 객실 등만 남은 특등석은 순식간에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케르딕 7세 양식의 백합 무늬 벽지는 공포 소설의 배경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환기 시설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샹들리에가 규칙적으로 까딱까딱 움직인다. 드레스를 입은 관절 인형이 턱을 열었다 닫으며 객실 입구에서 걸어들어올 것 같다.

    해가 사라졌다고 이렇게까지 느낌이 달라질 일이야? 얼어붙은 시아와 달리 루드윅은 또다시 한껏 흥분하고 있었다.

    “씨즐턴엔 유명한 건축물이 두 개가 있죠.”

    또다시 끝을 모르는 입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씨즐턴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시아 본인이었다. 시아는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시트리나 대성당과 슈테른베슈테크 고성, 맞죠?”

    씨즐턴 왕국의 본성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일 순위로 찾는 관광지는 아니었다.

    “케이틀린은 씨즐턴이 왜 제국에 복속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원래 시대로부터 약 이백 년 전. 그들이 모시던 신이자 고대 마법사인 다무스에서 유래하여 본래 다무스 왕국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씨즐턴은 제국에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국가였다. 제국 본토의 일부까지 진출할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으나 몰락은 예기치 못한 파도처럼 씨즐턴을 집어삼켰다.

    바로 역병이었다.

    “역병이 돌아서 국력이 약해진 사이에 제국군이 씨즐턴을 점령했다, 전 그렇게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시트리나 대성당이 순례지로 유명해진 건 역병 당시 제국의 사제들이 대성당에서 기도로 환자를 돌봤기 때문이고요.”

    “훌륭하시군요.”

    루드윅은 감탄 어린 눈으로 옆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려진 게 전부 진실은 아닙니다.”

    케이틀린이라는 가명으로 본인의 정체를 숨겼지만 그녀는 상당한 고등교육 또한 받은 사람이었다.

    “시트리나 대성당은 역병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성당은 씨즐턴이 제국령이 된 후, 국교회에서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세워진 거니까요.”

    유령이 아닌 건 알아냈지만, 여전히 정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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