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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7)화 (27/292)
  • 27화 

    “오토마톤과 한 몸이 되고 싶으면 시아는 이동시켜 줄게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종업원, 기관사, 바텐더, 무용수. 온갖 오토마톤들이 온갖 행동을 하며 발을 붙드는 사이 봉인이 박힌 오토마톤이 춤을 추면서 슬그머니 멀어지고 있었다.

    “어, 어어? 도망가는데요?”

    “잡죠.”

    라크시스가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도망가던 무용수 오토마톤이 불쑥 공중에 떠올라 목이 졸린 듯 바둥거렸다.

    “아깐 안 된다면서요.”

    “이건 실패해도 죽지 않잖아요. 몸이 벽에 끼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해봤다는 말인가.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성공할 만해서 해봤다 이거지.

    라크시스다웠다.

    그녀가 잘난 걸 숨기지 못하는 고대 마법사에게 빨리 봉인을 꺼내버리자고 말하려는 그때.

    “라크!”

    어느새 크리켓 배트를 든 오토마톤이 라크시스의 뒤쪽에 자세를 잡고 서있었다. 시아의 외침에 라크시스가 채 뒤를 돌아보기도 전.

    뒤통수를 가격당한 라크시스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 * *

    “난 괜찮으니 일단 저것부터 잡아줘요.”

    “깔려있으면서 그런 말이 잘도 나오네요.”

    라크시스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가 쓰러진 틈을 타 득달같이 달려든 오토마톤 때문에 개미 꼬인 과자처럼 시커먼 오토마톤 무더기 밑에 갇혀버린 상태였다.

    시아는 그 개미를 하나하나씩 손으로 뜯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 개미가 저항까지 하는 사람만 한 고철 덩어리라는 거지만. 벌써 손톱 끝이 부러지고 팔뚝에 멍이 들었다.

    “순간이동 말고 아까 같은 마법으로 어떻게 이것들 좀 치울 수 없어요?”

    주변의 오토마톤들이 하나씩 튕겨나갔다가 다시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며 다가와 오토마톤 무더기 위로 엎어졌다. 이래서야 언제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안 부수고 하려니 잘 안 되는 것뿐이니까. 그보다 저걸 먼저 잡아요. 도망가잖아요.”

    “제가 못 잡을걸요. 방해꾼이 많아서.”

    깔려서 얼굴만 살짝 보이는 와중에도 라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봐봐요. 지금 날 적으로 인식해서 시아 쪽엔 별로 없잖아요.”

    저 녀석은 우릴 지켜보고만 있고요. 그가 힘겹게 턱짓을 한 방향을 보니 정말로 오토마톤이 얼마 안 남아있었고, 무용수 오토마톤은 무용 동작을 하다가 멈춘 자세 그대로 라크시스를 우두커니 관찰하고 있었다.

    “시아, 머리는 안 어지러워요?”

    “지금 절 걱정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됐네요. 가서 잡아요. 금방 뒤따라갈게요.”

    정말 그래도 돼?

    잠시 망설였지만 곧바로 오토마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누군가. 잘나디잘난 고대 마법사였다. 본인 앞가림은 충분히 하고도 남지.

    빠져나올 확신이 없었다면 그녀에게 오토마톤이나 잡으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알아서 나와요!”

    시아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무용수 오토마톤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녀가 달려오는 것을 본 오토마톤이 뒤늦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입력된 동작이 서른두 바퀴를 도는 극의 후반부였기 때문에 한동안 바닥에서 턴을 돌며 미끄러지다가 시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라크! 이제 어떻게 해요?”

    와, 이거 힘이 장난이 아닌데. 회전목마 기둥을 붙들듯이 무용수 오토마톤에 매달린 시아는 이젠 점프를 뛰는 오토마톤의 반동에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등에 있는 태엽을 뽑아요! 거꾸로 돌려서 나사를 풀어버려요!”

    여기서 태엽을 풀라고? 이 녀석 몸통에 매달려 있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태엽을 풀려고 꼼지락꼼지락 옆구리 쪽으로 붙었다가 오토마톤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아악! 왜 그렇게 봐! 깜짝 놀라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시아를 떨궈내기 위한 오토마톤의 광란의 춤사위를 보며 라크시스는 전에 없던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이런 마도 기계 따위에 깔리다니.

    하지만 이 공간을 지배하는 마력은 고대 마법사의 근원, 태고의 본질과도 같은 용의 마력이었다.

    폭풍처럼 요동치는 마류 때문에 라크시스는 본인의 마력을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없었다. 공간이동을 하려 해도 좌표가 엉망이 되어 자꾸만 벽이나 기계 속에 몸이 끼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오토마톤 무더기 속 불특정 기계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아예 마력을 폭발시키듯 발산한다면 빠져나가는 거야 금방이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은 글레이셜 홀. 황제는 모르간 만국 산업박람회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런 행사를 개장도 전에 망쳐버린다? 게다가 이곳의 기계들은 거의 다 마정석을 동력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제 마법에 휘말린다면 자칫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아르카나가 불바다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소동을 일으킨다면 언론에 대서특필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쪽에서도 봉인의 존재를 알고 움직이고 있다는 걸 카얄에게 대놓고 알려주는 셈이 된다.

    신경 쓸 게 많으니 골치 아프군.

    시아는 여전히 오토마톤의 태엽과 씨름하고 있었다. 태엽이 덜렁거리는 걸 보니 열심히 돌리긴 했나 보다.

    광룡의 봉인에서 흘러나온 마력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마력 속에서 시아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아까 어지럽냐고 물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인어의 눈물이라 불리던 봉인이 괜히 저주받은 보석으로 소문난 게 아니다.

    ‘본인은 마법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은 진작 알고 있었다. 요르문의 연구실에서 얻은 빽빽한 마력 데이터값이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었으니까.

    “라크, 뭐 해요! 고대 마법사라며! 나 힘들다고!”

    시아가 결국 태엽을 뽑아낸 모양이었다. 태엽이 떨어져 휑해진 무용수 오토마톤의 등에 달라붙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쪽도 고군분투 중이란 말입니다.

    어느새 오토마톤 무더기의 절반을 날려버린 라크시스는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본인과 달리 그녀는 맨몸으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심장 위치에 마정석이 있을 겁니다.”

    “알아요! 그게 광룡의 봉인이잖아요!”

    “그걸 뜯어내요! 동력을 제거하는 겁니다!”

    이걸 뜯어내라고? 태엽을 뽑아낸 구멍 사이로 구리 선이 주렁주렁 연결된 오목한 공간이 보인다. 그 공간 안에 위치한 작고 새하얀 심장 모양 마정석을 움켜쥐었다.

    진짜 심장 같은데. 움켜쥔 마정석에서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맥이 느껴졌다. 발열 때문인지 체온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까와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수술용 장갑이 절실하게 갖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어 들 시간이 없다. 아다지오를 추던 무용수가 곧 다시 점프를 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꺼낼게요!”

    눈을 질끈 감고 마정석을 힘껏 뽑아냈다. 무형의 끈적함이 마정석에 달라붙어 나오고, 오토마톤의 몸에서 광룡의 봉인이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동력이 제거된 무용수 오토마톤의 눈에서 마침내 빛이 사라졌다.

    * * *

    만신창이가 다 됐네.

    시아는 찢어진 인버네스 코트를 벗어서 어깨에 걸쳤다. 관절이 뒤틀린 채로 전원이 나가버린 무용수 오토마톤이 발치에 엎어져 있었다. 별천지 같던 전시실은 전쟁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엉망이 된 후였다.

    땀에 젖은 셔츠까지 벗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지. 시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원수 같은 무용수 오토마톤을 발로 툭툭 찼다.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한쪽에 엉켜있는 오토마톤들은 여전히 기괴한 모습이다. 그 사이에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라크시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똑같은 고생을 했는데도 그의 얼굴은 갓 세수한 것처럼 보송하고 깨끗했다. 코트가 구겨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난동과 전혀 무관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에 반해 시아의 머리카락은 오토마톤에게 잡히고 뜯겨 산발이었다.

    진짜 사기꾼 아냐.

    엉킨 머리를 뽑다시피 손가락으로 훑어내리며 모든 일의 원흉인 작고 하얀 봉인을 흘겨보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감각이 여전히 사실적이다. 내가 이거 때문에 대체 무슨 고생을 했던 건지.

    시아는 당장이라도 봉인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삼키며 라크시스에게 핀잔을 줬다.

    “다 끝나니까 오는 거예요?”

    라크시스가 우뚝 멈췄다.

    왜 대답이 없지. 평소처럼 능글맞게 대꾸해야 정상인데. 그런데 라크시스는 처음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굳히고만 있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름 농담을 던졌다.

    “와, 라크가 대답을 못 할 때도 있네요.”

    “맘껏 책망해요. 제가 무능했던 건 사실이니까.”

    응? 시아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저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러고 보니 묘하게 울적해 보인다. 스스로에게 실망한 티가 나는 우울함이랄까.

    하지만 라크시스가 잘못한 건 없었다. 마법사가 아니라서 좌표니 마류 이상이니 하는 건 공감해 주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건 확실했으니까.

    마법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다면 차라리 잘난 척하면서 상황을 해결할 성격이면 성격이었지, 멀리서 구경만 할 사람이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미안하게 뭘 그렇게 반응해요. 어쨌든 같이 한 거니까 그러지 마요.”

    멋쩍게 사과를 건네며 그의 등을 툭 쳤다. 라크시스의 눈동자에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아.”

    “여기요!”

    그에게 뿌듯하게 봉인을 내밀었다. 조막만 한 광룡의 봉인은 뾰족한 도구에 찔린 듯 가운데가 움푹 패어있었다. 그 틈새로 흘러나오던 연기 같은 하얀 빛은 어느덧 빗물에 고인 기름처럼 일렁이는 무지갯빛으로 살짝 변해있었다.

    “워우. 이거 상태가 안 좋은 거 맞죠?”

    절대 코트 안에 숨길 수 없는 크기의 보석함을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낸 라크시스는 곧바로 상자를 열어 마정석을 담았다. 찰칵 소리가 나도록 보석함을 걸어 잠그자 연기처럼 퍼져나가던 기이한 무지갯빛 마력이 갇히며 주변 풍경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라크시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카얄이 선수를 쳤군요.”

    뭐?

    “네?”

    봉인에 패어있던 커다란 홈은 인위적으로 생긴 흔적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마류 이상 현상이 나타난 거라며.

    “위험했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폭발해 버렸을 겁니다.”

    “그 정도였어요?”

    “완전히 파괴되려면 좀 더 걸렸을 테지만요.”

    “혹시 글레이셜 홀이 불타 없어지는 게 광룡의 봉인 때문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만약 그런 거였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피해가 아닐 수 없다. 저 조그마한 봉인 하나가 사람 여럿 잡는구나. 새삼 카얄이 악질적인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인을 따로 가져가지 않고 글레이셜 홀에서 폭발하게 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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