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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탄 럭셔리 오픈카는 제도에서 가장 부유한 사교계 명사들만 사는 주택가의 중심에 멈추었다.
인근에는 아름답기로 이름난 황립 공원이 있었고, 신사들의 사교 클럽이 늘어선 거리까지는 도보로 10분이면 충분했다. 그야말로 사람들과 교류하기에 가장 최적의 조건이었다.
후작저가 있는 곳도 부촌으로 쳐주었지만, 이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춘 오픈카에서 내리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에드문드에게서 차 키를 받아 갔다. 그 뒤로 도열해 있던 집사와 풋맨들은 그의 지시를 받아 차 뒤 칸에 실린 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곳 사용인들은 다아트로 제국어를 했다. 세노윅 영지에 있던 그의 컨트리 하우스 사용인들과는 달랐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실내로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평화를 깬 건 홀(Hall)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가까운 전화기를 집어 든 에드문드였다.
“예, 어머니. 바쁜 건 얼추 마무리되어서 잠시 비비안느를 만나러 후작저에 들렀습니다.”
수화기에서 무어라 말이 흘러나오자 에드문드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식사요. 안 그래도 비비안느가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일단은 제가 제도 저택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비비안느와 함께 이곳에 잠시 들렀습니다만, 급한 자리이면 짐을 이곳에 다 내려 두고 식사 자리에 빨리 도착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쯤 들은 비비안느는 등 뒤를 바라보았다. 풋맨들이 열심히 제 짐 가방을 나르며 층계를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에드문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대화 중이었다.
“그런 김에 비비안느 영애가 이곳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 물론 어머니와 영애가 가까운 건 알지만…. 문제없으시다고요. 예, 알겠습니다.”
“…….”
이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는 저 몹쓸 혀를 놀려서 저를 총리 관저에서 쏙 빼낸 것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오늘 콜트 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빼낼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제가 저택에 두고 온 거 말씀입니까. 안 그래도 조금 분위기를 잡다가 그걸 영애에게 주려고 했는데, 아까 말씀하신 식사 자리 말입니다. 많이 중요한 자리입니까?”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팔을 툭 치고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태연히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말을 이었다.
“아니라고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식사 자리에는 함께 참석하겠습니다. 예. 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문드는 전화를 끊었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순간 그녀의 손이 잽싸게 그 위를 덮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비비안느가 전화기를 가로채고는 말했다.
“악역을 자처하시겠다는 게 이런 말씀이셨어요?”
“그렇다면.”
“저를 어머님한테서 납치하겠다는 말도 이런 거고요.”
“그래.”
“공작님.”
“응, 비비안느.”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맞추려 하자 비비안느가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이러실 필요 없어요. 아까 들으셨듯 제가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요. …챙길 거 있으시다면서요. 다녀오세요. 전 다시 콜트 부인께 전화해서 아까 전화는 신경 쓸 거 없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그걸’ 이곳 저택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재킷 안에 있었군.”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편지 봉투 같은 것인데, 꽤 오랫동안 지니고 다닌 모양새였다.
비비안느는 그게 뭔지 궁금해져 조심스레 받아 보았다.
“오페라 티켓이네요.”
그것도 상연 날짜가 꽤 지난 것들이었다. 티켓을 뒤로 넘기자 날짜가 비교적 최신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마지막 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곳에 적힌 오늘 날짜가 보였다.
“말했잖아. 데이트나 할까 해서.”
에드문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비안느는 열심히 티켓을 다시 한번 넘겨 보았다.
“전부 로열 박스석 자리잖아요. 나머지 티켓들은 왜 예매 취소 안 하셨어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았거든.”
그가 놀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비비안느의 볼을 어루만졌다.
“꽃다발이랑 이걸 들고 네 저택 앞에서 널 기다릴 때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언젠가 이렇게 네가 다시 날 봐 주면 그때는 말하고 싶었어. 그간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
“그래서 네가 저택 밖에 나타나서 이걸 받아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남겨 뒀지. 예매 취소하고 푼돈 돌려받아 봐야 뭐 하겠어.”
“이러려고 여태껏 못 쓴 티켓 뭉치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셨고요.”
비비안느는 그의 탄탄한 가슴 쪽을 훑었다. 에드문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미간이 좁혀 들어갔다.
“그러고서는 어머님께 이걸 저택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까지 하셨어요?”
“왜, 안 돼?”
“당연하죠. 전 바라지도 않았는데 당신 혼자 나쁜 짓 했으니까요.”
“내가 언제는 두 분께 착한 아들이었다고.”
“잘나셨어요.”
“오히려 내가 네 덕에 어머니께 연락을 자주 드리게 되어서 어머니께서 좋아하시지.”
“공작님.”
“언제 이름으로 불러 줄 건데.”
“공작님께서 재촉하지 않으시면요.”
“…아직도 내 전용기 타 보는 건 싫다는 건가?”
“아뇨, 그래도 선약이 먼저니까요. 그리고 저 정말로 억지로 콜트 부인을 돕는 게 아니에요.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느는 게 좋아서 그래요. 거기다 당신 어머니한테 배우면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것만이 레이디다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비비안느는 말을 마친 뒤 에드문드의 볼에 뽀뽀를 쪽 남겼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당신 어머니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잘 보이고 싶겠어요.”
에드문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걸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그는 뒤늦게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내 어머니라서 그렇다고.”
“당연하죠.”
비비안느는 곱게 웃어 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제 선약에 양보해 주시겠어요? 지금 당장 총리 관저로 가서 어머님을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대신 앞으로는 나랑 여기서 지내.”
“매번 운전기사가 태워 주는 차 타고 관저에 어머님을 뵈러 가는 건 너무 과하잖아요.”
“내가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그럼.”
“…….”
“어때.”
“정말요?”
비비안느가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물어 왔다. 에드문드는 천천히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네겐 이미 통역 선생도 있고, 새 식구에게 관심 많은 내 어머니도 곁에 있는 데다가 벌써 네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는데. 운전 선생 하나 끼어든다고 뭐 나쁠 것 있겠어?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좋다며.”
그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현관 밖으로 나가 운전기사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풋맨이 마지막 남은 짐 가방을 저택 안으로 옮기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요.”
에드문드가 차 문을 열려고 했을 때, 다른 쪽 차 문에 기댄 비비안느가 그를 불러 세웠다. 거절을 들을 거라 생각했는지 에드문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때 비비안느의 수줍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 고맙다는 말, 못 들으셨잖아요.”
그러자 에드문드의 입가에 차마 숨기지 못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날 벤치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대화를 나눈 이후, 두 사람은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시선을 느끼며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았다. 그리고 그녀는 차 문을 열고는 조수석에 탄 다음, 옆자리에 앉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요?”
“시범 교습.”
“…….”
“…거기에다 생각해 보니, 보육원에 다녀오는 일도 썩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니잖아요.”
“네 곁에 있는 게 재미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아무렴 낫잖아.”
“그러네요. 그런 거로 해요.”
에드문드가 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자 차체가 움직이며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비비안느가 치마폭에 손을 파묻고는 바깥을 보려 했을 때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어 왔다.
“그럼 오페라는 언제쯤 같이 볼 수 있을 거라고 알고 있으면 될까.”
“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비비안느가 입을 열었다.
“이번 주 주말쯤이 괜찮겠네요.”
“왜 그렇게 까마득한 건데.”
“말씀드렸잖아요, 선약이 있다고.”
“그럼 운전 교습은 그 선약들 사이에 끼어들 틈이 있고?”
“으음, 네.”
“…….”
“시간을 내 볼게요.”
“그나마 짐을 관저 대신 여기에 옮긴 게 다행이야.”
“그럼요. 아. 그나저나 제 시녀 마사도 여기에 데려와도 괜찮나요?”
“…….”
“에드문드?”
“네 시녀와 약속 같은 걸 안 잡겠다면, 언제든지.”
“그럼요.”
비비안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주말에는 공작님이랑만….”
그쯤 말하던 그녀는 그의 표정을 한번 훑고는 말을 정정했다.
“…에드문드, 당신이랑만 시간 보낼 거라고 약속할게요.”
“그렇다면 시녀 열 명을 데려와도 괜찮아.”
그의 말에 비비안느는 작게 웃었다.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도 똑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