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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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매끄럽게 나아가던 차가 멈추자 익숙한 광경이 그들을 반겼다. 저 멀리 강을 가로지른 도개교가 웅장하게 서 있었고, 그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가 길가에 놓여 있다.

    비비안느는 그 풍광에 홀려 말했다.

    “아, 여기 기억나요.”

    이곳이 일출로 물들었을 때 비비안느는 처음으로 약초 궐련을 태워 보았다.

    같은 날 그녀는 ‘요원’을 가장하던 에드문드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만나리라 믿었던 요원이 죽은 줄 알았을 때, 이곳의 박명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새벽 내내 밤거리를 배회한 그녀를 묵묵히 맞아 주었다.

    사진 다섯 장을 태우며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내일을 떠올려 보려 했었다.

    지금, 차에서 내린 비비안느는 똑같은 벤치에 조심스레 앉는다.

    그때 아침, 또는 새벽과는 달리 노을 타기 전 빛무리가 무정한 강물에 스며들어 있었다.

    에드문드가 옆자리를 채우며 같은 풍광을 바라봐 주자 비비안느의 말문이 트였다.

    “샹프니야에서 있었던 일로 매디슨이 당신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애는 그 이유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둘이 아까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래.”

    “그냥… 당신이랑 결혼할 저더러 ‘진짜’ 귀족답게 결혼한다고 했죠.”

    “그러면 그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지.”

    “…….”

    “…오늘 그랬듯이 내일도. 내일 그랬듯이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가 제 슈트 바지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프러포즈 반지는 이미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비비안느가 그의 손을 훑자, 그가 차가운 쇠 감촉의 무언갈 제게 쥐여 주었다.

    손을 펴 보았을 때 비비안느는 그게 총알 두 개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실탄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탄이야.”

    “…….”

    “너더러 날 쏘라 한 날, 피스톨에 장전된 게 뭐였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겠지. …난 그때도, 지금도 너나 네 소중한 사람들을 해칠 생각은 아주 조금도 없어. 그 반대라면 모를까.”

    비비안느는 그 두 총알을 소중하게 쥐어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라이너스 오빠랑 친해져서 다행이네요.”

    이런 조언을 해 주었을 사람은 그밖에 없었을 테니까.

    “선물을 받았으니까 저도 선물을 드릴게요.”

    강가의 바람이 비비안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고, 그녀가 그의 큰 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한때 뤼드빅과 그녀의 약혼반지였던 레드 다이아 반지였다.

    “샹프니야에서 집을 얻으려고 전당포에 맡겼던 거예요. 올해 제 약혼 발표 연회에서는 직접 찾아 주셨었죠? 그런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요.”

    “그럼 이걸 주웠던 데에 돌려놓을까.”

    그 말을 마친 그가 손을 기울였다. 그러자 그 위에 놓인 반지가 스르륵 흘러 벤치의 틈 사이로 떨어졌다. 그걸 가만 보고 있던 비비안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 벤치 밑에서 주우셨군요. 그때는 반지가 조금 더 컸었는데.”

    “그래서 네 손가락에서 빠진 모양이야.”

    “그런데 반지는 저렇게 두어도 되겠죠?”

    “그래. 운 좋은 누군가가 주워 가겠지. 그때 약혼 발표 연회에서 네게 말을 걸 빌미를 찾으려 애썼던 나보다, 저 반지가 더 필요한 사람이.”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는 작게 웃었다.

    “왜 그래?”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 왔다. 비비안느의 미소가 조금 더 환해졌다.

    “이제는 믿어서요. 당신이 저를 처음부터 좋아했다는 그 말.”

    “…….”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좋아했어요. 그때는 부끄러워서 표현하지 못했지만, 공작님을 많이 생각했어요.”

    “그럼 우리 여기서 다시 시작해 볼까.”

    “…….”

    “작년 겨울에 여기에서 헤어졌을 때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 해 줄래.”

    그 추웠던 시간은 이 풍광에서 찾아볼 수 없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남았다.

    그녀는 이제 과거에 그만 갇혀 있고 싶었고 그와의 미래를 그리고 싶었다.

    비비안느가 조심스레 그에게 말했다.

    “제게 잘할 거라는 약속 정말 지켜 주신다고 하면요.”

    “그럴게.”

    “그러면, 좋아요.”

    고마워. 그가 말하며 제 이마에 키스해 왔다.

    시선이 마주쳐 올 때 비비안느는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사내가 여기에 있었다.

    마주하는 시선만으로 세상에 그와 단둘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다시 시작하는 특별한 기분이었다.

    그러니 뤼드빅과 세상에 짓눌려 숨죽였던 과거가 흐릿해져, 꼭 그 아픈 시간들이 아예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실을 반증하듯, 벤치 아래에서 아직 줍지 않은 붉은 다이아 반지가 반짝였다.

    온 하늘에 서서히 드리운 석양처럼 붉게 타는 모양새였다.

    에필로그. 두 번째 결혼식

    한 달 뒤.

    비비안느는 허리를 짚고는 후작저의 텅 빈 방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다 챙긴 거겠지?”

    그녀의 구두코 앞에는 크고 작은 가방들이 놓여 그림자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아유, 혼자 하시지 말고 저나 다른 시녀들한테 짐 싸는 걸 도와 달라 하지 그러셨어요.”

    시녀 마사는 제가 다 안타깝다는 양 말했다.

    “상견례 이후로 아가씨께서 너무 무리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어요.”

    상견례라 함은 메르고빌과 콜트, 두 가문 내외가 공식적인 회동 자리를 가진 걸 가리켰다.

    가든파티에서 콜트 부인이 메르고빌 후작 부인을 구워삶아 정식 상견례 날짜를 받아 간 것이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게 쭉 순탄했다.

    상견례에서 콜트 수상의 적극적인 태도에 메르고빌 후작은 내심 흐뭇해했다. 그러고는 수상에게서 술을 받아 마시다가 그래, 사돈을 맺자 해 버린 것이다. 그런고로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와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에드문드는 이 틈을 타 후작에게 비비안느가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총리 관저에 머물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술김에 허락했다.

    하여 비비안느는 혼전에 새로운 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녀의 관심사는 자연히 결혼과 콜트 일가 사람들이 되었고, 그녀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맞추어 작은 습관부터 바꾸어 나갔다. 그러다 이제는 그 생활에 더더욱 적응하겠다며 저택을 아예 떠나기로 한 것이다. 오늘은 그녀가 짐을 가지러 저택에 잠시 방문한 날이었다.

    내내 비비안느를 지켜보고 있던 마사는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아까 말했듯 그녀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게 요지였다.

    “괜찮아. 어차피 총리 관저에는 사용인들이 없으니까, 혼자 하는 데 익숙해져야지.”

    비비안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가씨….”

    벌써 그녀가 다 컸다는 양 흐뭇하게 바라보는 낯이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 마사가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말을 이었다.

    “뒤늦게 요리를 배우신다고 고운 손에 화상도 입으셨다죠. 종일 관저에 상주하면서 각료들이 방문하면 요리 담당에, 각료들 부인이 방문하기라도 하면 콜트 부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심심하지 않게 해 주시고. 거기다가 통역 공부도 틈틈이 하느라 밤잠도 설치실 텐데…. 공작님께서는 이걸 다 알고 계실 테죠? 아가씨께서 얼마나 애쓰시는지.”

    “원래도 사업 때문에 바쁜 사람인데 그런 걸 어떻게 다 신경 쓰겠어.”

    “그래도 그분께서 아가씨께 한 일을 생각하면, 그것보단 더 잘하셔야죠!”

    “아니야, 마사.”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꼭 에드문드가 알아주지 않아도 돼.”

    “아니, 왜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콜트 부인께서 얼마나 잘해 주신다고.”

    “그래, 네가 어머니랑 근래에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질투가 다 나더군.”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악마도 이름 부르면 온다더니. 악마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다운 사내가 문가에 기대어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결혼식을 내가 아니라 내 어머니랑 올린다고 해도 믿겠어. 둘이 어찌나 붙어 다니는지.”

    에드문드가 비비안느 쪽으로 걸어와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짧게 머금고는 속삭였다.

    “어머니한테 다 맞춰 주지 마.”

    주위에 서 있는 마사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이토록 비비안느 외에는 무신경한 그가 말을 이었다.

    “이러면 내가 아내를 맞는 게 아니라 어머니 조수를 고용하는 것 같잖아. 네 사용인도 널 걱정하고. 내가 중재해 줘야 하는 거면 말해.”

    “중재요?”

    비비안느는 당치 않다며 작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전 콜트 부인이 정말 좋아요. 제게 정말 잘해 주시고, 존경스러운 분이고.”

    비비안느는 콜트 부인 덕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매일매일 느꼈다. 그녀를 통해 저명한 통역사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그 우수한 인력에게 과외도 받게 되었다.

    콜트 부인은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그녀를 따스하게 환영해 주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성취를 진심으로 격려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와 달리 전혀 권위주의적이지 않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비비안느는 별스러운 걱정을 다 한다며 에드문드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가방 두 개를 직접 들어 올렸다.

    “일단 짐부터 옮기고 식사하러 가요. 빨리 움직여야 할 거예요. 안 그래도 오늘 어머님이랑 잠시 교외에 있는 보육원에 방문하기로 해서 바빠요.”

    “보육원?”

    에드문드가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그가 성가시다는 듯 뇌까렸다.

    “어머니께서 이제는 사회 복지 재단 일에까지 널 끌어들인단 말이야?”

    “네. 당신이 어머님을 안 도와줬었는데 이제부턴 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고마워하시더라고요. 물론 저도 어머님을 돕는 일이 즐겁기도 하고요. 게다가 제가 보육원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제가 함께 가는 게 맞죠. 사실 당신이 하는 일이 애들 정서에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에드문드는 그 말에 픽 웃으며 비비안느가 작은 손으로 든 짐 가방들을 가로채 갔다.

    “내 눈에는 너도 앤데.”

    “…….”

    “내가 네 정서에는 좋고?”

    “안 좋아요.”

    비비안느는 아까 든 짐 가방보다 더 무거운 걸 양손에 들고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귀여운 시도는 금방 가로막혔다. 에드문드가 짐 가방째로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놀란 그녀가 그의 재킷 라펠을 쥐려는 동시에 짐 가방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정확히 에드문드가 내려놓은 작은 가방들 위로.

    “내려 주세요.”

    에드문드는 대답하는 대신 등 뒤의 마사에게 말했다.

    “저택의 풋맨들에게 메르고빌 아가씨의 짐을 아래에 있는 자동차에 실어 달라고 전해. 그러라고 내가 이 집 사용인들에게 모자란 급여를 보태 주는 게 아닌가?”

    “공작님께서 왜 제 정서에 안 좋은지는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비비안느가 불평하자 에드문드가 그녀의 콧등에 키스를 남기며 말했다.

    “유감이네. 난 그 반대라서. 너만큼 내 정서에 좋은 게 없거든.”

    “…….”

    “그래서 더더욱 어머니가 널 이렇게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겠는데.”

    “네,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님과의 식사 시간에만 늦지 않는다면 아무렴 상관없어요.”

    “그래? 그것도 안됐네. 네 짐을 총리 관저에 옮길 생각은 원래부터 없었어.”

    “그게 무슨….”

    “수도에 내 타운 하우스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나?”

    에드문드가 말하며 실외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마사가 불러 모은 풋맨들이 짐을 들고 줄줄이 뒤따랐다.

    그는 보폭이 넓어 마당까지는 금방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정중하게 오픈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에드문드가 조심스레 비비안느를 차에 태웠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널 납치해 간 악당이 될 테니까, 오늘은 나랑 데이트하고 내일부터는 네가 정말 어머닐 돕고 싶을 때만 관저로 출근해. 매일 붙들려 있지 말고.”

    악당?

    납치?

    비비안느는 머지않아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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