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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92)화 (92/120)

92화

경비병, 치안대, 심부름꾼, 막일꾼과 빨래일 하는 하녀들까지. 그리고 그들의 가족인 노인과 아이들까지.

“콜록!”

“엄마…… 나 물…….”

집집마다 기침 소리와 고열에 들뜬 소리들이 들렸다. 아이를 가진 여자들은 문 닫은 약국에 매달려 두드렸다.

“문 열어! 열라고!”

“가짜 약이건 뭐건 사야겠어! 내 새끼가 죽게 생겼는데!”

귀족가의 하인들도 병에 노출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랴아, 커어억!”

마부들이 기침할 지경이 되자 귀족들도 불안해졌다.

“쉬이 잦아들 것 같지 않은데…….”

“고용인들 중에 기침하는 자들은 해고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을 숨기는 놈들이 있어서,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요.”

레아도 불안했다.

내가 옮을까 봐 걱정하는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불안이었다.

‘빨리!’

감기약 유통이 막혀 있어 사람들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원망의 화살이 피어트 상단과 공작가로 향하기 전에 일을 해내야 했다.

“어서! 빨리! 얼른!”

“아이고, 아가씨, 여기서 더 빨리하다간 저희부터 죽습니다요!”

“그, 그럼 안 되지.”

잠시 참던 레아는 연구소 안을 몸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빨리! 한시가 급해!”

“아가씨이이!”

헬릭스도 다급하게 말렸다.

“레아, 그렇게 뛰어다니다가는 다친다!”

“아니, 그건, 그건…… 그건 그렇지만!”

전력이 있는 레아는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버벅댔다. 건강해졌어도, 그간 퇴화되어 있던 운동신경이 따라잡지를 못해서 종종 삐끗하는 그녀였다.

헬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또 뛰어다니면 내가 일 안 하고 네 옆에 붙어서 발목 치료하라는 소리인 줄 알겠다.”

“그, 그건 안 되지!”

❀ ❀ ❀

레아가 전생 한국인의 종특 ‘빨리빨리’를 외치며 뛰어다니는 동안, 트로우 백작과 얀 트로우 경도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망할 피어트!”

백작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고생을 하면서 가짜 약을 퍼트렸더니, 판매를 중단시켜?”

백작은 아주 환장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트로우 가문이 흔들리는 사이 리케일 피어트의 정보망은 공격적으로 덩치를 키우며 촘촘해졌다.

‘덩치를 키우건 빡빡하게 운영하건, 둘 중 하나만 하란 말이다! 괴물 같은 놈!’

상대적으로 조용한 영역에서 활약해서 눈에 안 뜨일 뿐, 리케일이 하는 일은 무시무시했다.

엄청나게 확장하면서 빈틈이 없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그렇게 키운 정보망으로 추적하고 포위를 좁혀 오니 아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재수 없는 뱀 기사단원들이 뭘 먹었는지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면, 진즉에 들통나서 잡혀가 매달렸으리라.

트로우 백작은 떫은 입을 다시며 인정했다.

‘버릇없는 평민 놈들이지만…… 뱀 기사단 놈들이 유능하긴 해.’

물론 그 뱀 기사단 놈들도 얼굴이 허옇게 돼서 말하긴 했다.

‘루얀 피어트 그 새끼는 사람이 아니야!’

소드마스터니까 평범한 사람은 아니긴 했다.

‘소드마스터여도 사람이 실수도 하고 그래야 할 거 아니야! 그 새끼가 실수할 땐, 실수인 척하면서 부술 때밖에 없다고!’

‘지난번에 횡베기로 건물 세 개를 한꺼번에 날리는데, 뒈지는 줄 알았다니까!’

루얀 피어트 이름만 대도 머리끝부터 선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렇지만 트로우 백작이 가장 무서운 건, 비상한 머리의 리케일도 천재 소드마스터 루얀도 아니었다.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피어트 공작이었다.

‘가짜 약이 섞여서 돌아다닌다고 판매를 아예 중지시키다니.’

상인으로서나 귀족으로서나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상단을 이끌면서, 이득을 볼 큰 상대도 아닌데 왜 그런 손해나는 짓을 해?’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해 봤자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귀족답게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재수 없게 섞여든 약 때문에 아랫것들이 죽어 나가는 게 공작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백작이 끙, 신음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대가 가장 어려운 법이었다. 백작은 그 발상이 레아 피어트에게서 나왔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고민했다.

“아버지.”

조용히 있던 얀 트로우 경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쩌지요?”

“…….”

“약이 아예 판매 중단됐으니 가짜 약을 더 이상 퍼트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켄 황태자는 이 일을 키우라고 하니…….”

“할 수 없다.”

트로우 백작이 심각하게 말했다.

“드러날 걸 각오하고 더 공격적으로 일을 벌이는 수밖에.”

“더 공격적으로요?”

“그래.”

백작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우리에겐 제국에서 받은 특별한 독이 있지 않느냐?”

❀ ❀ ❀

“콜록! 콜록콜록!”

강가 근처의 한 술집.

맥주를 나르던 여급이 미친 듯이 기침하기 시작하자,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아니, 뭔 기침을 그렇게 죽을 기세로 해? 술맛 떨어지게…….”

“주인장, 다른 애 좀 써! 내가 쟤 기침할 때마다 맥주 사레들겠어!”

주인장이 걸걸하게 되받았다.

“다른 애 쓸 돈이 어디 있어? 사레야 우리 집 술이 너무 시원해서 급하게 마시다가 드는 거겠지!”

주인장의 대꾸에 몇몇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단골들은 꺼림칙한 눈빛을 했다.

주인장이 갈 데 없는 조카딸을 데려다가 여급으로 부려 먹고 있는 건 단골들 사이에 알음알음 다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하고 있는 꼴을 보면 먹을 거나 입을 것도 잘 챙겨 주지 않는 것 같았다.

‘기침이 심상찮은데.’

‘저거 저러다 멀쩡한 젊은 애 잡는 거 아니야?’

“콜록!”

여급이 기침했다.

단골들의 시선을 느낀 주인장이 그녀를 주방 쪽으로 떠밀었다.

“애나, 들어가서 좀 쉬어라. 응?”

“콜록!”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여급 애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기침했다. 흉곽 안의 장기가 다 흔들리는 듯한 기침이었다.

“이년이 진짜, 작작 좀 하라니까 재수 없게!”

주인장인 삼촌이 눈을 부라리며 그녀의 등을 세게 쳤다.

“콜록, 코올록!”

“이게 진짜!”

그녀가 시위하는 거라 생각한 삼촌의 얼굴이 벌게지며, 솥뚜껑만 한 손이 올라갔다.

‘그래 때려라, 때려.’

기침에 흔들리는 머리로 애나가 생각했다.

삼촌의 커다란 손에 맞는 걸 무서워했던 게 무척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기침에 시달리기 전만 해도 저 손버릇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었는데. 더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 애나에게 이제 이런 폭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맞아서 죽기밖에 더 하겠어.’

자포자기에서 비롯된 해방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마약처럼 적셨다.

“콜록!”

애나가 기침하며 어디 더 때려 보라는 듯 머리를 들이밀었다. 독 오른 그녀의 반응에 삼촌이 멈칫했다.

“이, 이년이!”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더 벌게진 얼굴로 손을 휘둘렀다.

멈칫했던 게 부끄러웠고, 노예처럼 여기던 조카딸에게 무시당한 기분도 더러웠던 것이다.

철퍽!

“으윽!”

평소보다 거센 동작에 애나의 마른 몸이 부엌 구석에 처박혔다. 생각보다 더 큰 소리에 주인장인 삼촌이 침을 삼켰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그러면 어디서 저렇게 돈 안 드는 여급을 구한단 말인가.

걱정이 된 삼촌이 목소리를 꾸며 냈다.

“……그러게 왜 손님들 앞에서 보란 듯이 기침을 하고 그러냐.”

슬쩍 물러선 그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좀 쉬다 나와라.”

애나는 널브러진 채 닫힌 부엌문을 바라봤다.

서러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다 지긋지긋했다.

‘다 망해 버렸으면.’

누가?

몰랐다.

그냥 자신만이 아니라 저 문밖에서 신나게 먹고 마시는 이들도 망했으면 싶었다.

저를 부려 먹고 때리는 삼촌도.

제게 술집 일을 몰아 놓고 애들만 돌보면서 먹을 것도 주지 않는 숙모도.

저를 사촌누이가 아니라 하녀 취급하는 어린 사촌들도.

제 생각에 해방감을 느낀 애나가 또 생각했다.

‘다 죽어 버렸으면.’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잠깐이었다.

아무도 자신 따위 걱정해 주지도, 챙겨 주지도 않는데, 생각 좀 하는 게 무슨 죄라고.

‘어차피 이러다 죽을 건데, 뭐. 나만 망하고, 나만 죽는 건 억울하잖아.’

문득 든 생각에 애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 죽어 버렸으면.”

“그래?”

누군가 가볍게 되물었다.

애나는 눈만 들어 말한 이를 쳐다봤다.

용병처럼 보이는 특징 없는 얼굴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가라고 하려던 애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콜록!”

“저런.”

남자가 애나 옆에 병 몇 개를 내려놓았다.

“나도 그런데.”

“……에?”

그 말만 남기고 남자는 몸을 일으켜 부엌에서 나갔다.

“저기, 잠깐만……!”

이게 뭐냐고 물을 사이도 없었다.

애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남자가 놓고 간 것을 살폈다. 붉은 감기약 약병들이었다.

“…….”

그 순간 머릿속을 채운 건 손님들이 하던 말이었다.

‘누가 피어트 상단의 감기약을 가짜로 흉내 내서 판다더구먼.’

‘그 빨간 감기약 말이야? 그게 제일 효험 있던데, 어째.’

‘그것만이 아니야.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독도 넣고 그런다잖아.’

꿀꺽.

애나가 침을 삼켰다.

이 약병들에 독이 들어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콜록!”

고통을 잊고 잠들 수 있다면.

이 기침에 시달리지 않고, 돌봐 주는 이 없이 열에 들떠 밤을 보내지 않고, 겨우 맞은 아침 해에 안심하기도 전에 맞지 않는다면.

이게 감기약이든 독약이든 무슨 상관일까?

애나는 벌떡 일어나 홀린 사람처럼 부엌문을 잠갔다.

철컥.

삼촌이 그녀를 때리기 전에 문을 잠그면서 내던 그 공포스러운 소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경쾌하게만 들렸다.

애나의 손이 맥주 통을 열었다. 물을 담아 두는 커다란 통을 열었다. 스프가 끓고 있는 솥의 뚜껑을 열었다.

콸콸.

그리고 빨간 감기약들을 쏟아부었다.

“다 죽어 버려.”

그녀의 눈이 열과 광기로 벌겋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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