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렇지만 레아는 한결같이 자신을 거부했다.
‘넌 안 중요해.’
아르카이크 황태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것인 네가 어째서.’
내가 이렇게 너를 원하는데.
거부당한 분노는 그의 비틀린 욕망을 더 부추겼다.
상처 입히고 싶다. 해치고 싶다. 엉망으로 만들어 제게 빌게 만들고 싶다.
레아가 제 손끝에서 피를 흘리면, 그 모습에 속이 턱 막히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사, 살려 주세요!’
비참하고 비굴한 애원. 살을 찢는 고통. 언제 이 짓이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한 절망.
그런 고통과 비할 바 없이, 그저 긁혀 피 몇 방울 흘리는 것뿐인데.
‘넌 그것만으로도 날 죽일 듯이 노려보지.’
노려보는 순간조차 말갛기만 한 얼굴이었다.
저자를 산 채로 매달아 살점 한 점 한 점 저미겠다는 증오 따위는 품어 본 적 없는 표정. 살기 위해 빌어 본 적 없는 푸른 눈.
그게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꺾고 망치고 싶었다. 권속일 뿐인 그녀를 주인인 제가 겪은 지옥까지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레아도 겪으면, 그녀만의 영롱한 빛이 계속 반짝일까. 아니면 빛을 잃을까.
매번 그것이 두려워서 부수려다가도 힘을 거뒀다.
‘너처럼 빛나는 건 처음 봤다.’
그런 너는 나의 것. 나의 마나로 만들어진 나의 권속. 나의 마법사.
“나의 마법사.”
어쨌거나 이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황태자는 길을 찾은 것처럼 다시 반복했다.
“나의 마법사.”
그가 중얼거렸다.
제국과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와중에 인간인 제 마법사 하나 더 손에 넣고, 또 부수는 일이 뭐라고. 황태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손에 넣으려는데 반항한다면 부술 수밖에 없지.”
아르카이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가벼운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뱀 기사단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태자가 말했다.
“트로우 백작에게 명령을 전해라.”
❀ ❀ ❀
트로우 백작은 쩔쩔매고 있었다.
그에게 실험을 맡기던 제국 쪽 귀족이 갑자기 들이닥쳤던 것이다.
“쯔…….”
제국 귀족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트로우 백작, 내 자네의 성실하고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일처리를 좋게 보고 있었거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나?”
“예? 뒤, 뒤통수라니요?”
트로우 백작은 깜짝 놀랐다.
페이런 귀족들과 평민들한텐 수많은 뒤통수를 쳤지만, 오켄 제국 쪽으로는 그럴 마음도 품은 적이 없거늘 이 무슨 말인가.
그렇지만 제국 귀족은 그런 백작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귀한 분께서 자네의 행적에 의구심을 품으셨네.”
“억울합니다. 저는 모국인 페이런 왕국보다 오켄 제국에 더 충심을 보이며 지금껏 위험한 일을 맡아 왔는데…….”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백작의 최근 일처리가 너무…… 안전 지향적이라 하시더군. 가짜 약이라니.”
뜨끔.
트로우 백작은 순간 속이 싸해졌지만 겉으론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제국 귀족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분께선 백작에게 좀 더 담대한 행동을 명하셨던 것 같은데, 설마 그분의 명령을 이 정도로 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백작이 굽실거리며 억울한 양 표정을 꾸며 냈다.
“감히 누구의 명인데 허투루 여기겠습니까?”
“그래. 우리 뒤엔 오켄 제국이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게.”
제국 귀족이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페이런 왕국이 지금 이렇게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도 모두 우리 오켄 제국 덕이 아닌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넘어가 주겠네만…… 오켄 제국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 넘쳐난다는 걸 기억하게.”
언제든 너 따위는 팽할 수 있다는 말에 트로우 백작의 낯빛이 허예졌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껏 일한 저희 가문의 일처리를 아시잖습니까? 믿고 맡겨 주십시오!”
“믿고 맡겨 달라.”
트로우 백작의 말을 되뇐 제국 귀족이 물었다.
“정말인가? 뭐든 믿고 맡겨도 되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국 귀족이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가 트로우 백작의 손에 병을 건넸다.
“이걸 써 보게나.”
❀ ❀ ❀
페이런 왕국의 수도엔 한겨울이 찾아왔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강물에 살얼음이 끼고, 가짜 약 파동에 수도 사람들의 인심도 얼어붙었다.
“피어트 상단의 약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젠 눈앞에 잔뜩 있어도 못 사다니.”
“우리 집 어르신은 기침 좀 하시다가도 피어트 빨간 감기약 한 스푼 드시면 괜찮아지시는데, 어째야 하나 모르겠어요. 꿀이니 따뜻한 차로도 한계가 있고.”
“믿을 만한 약국에 가서 몇 병 사 놓지 그래요?”
“네? 모험할 게 따로 있죠. 그랬다가 재수 없게 독이 든 가짜 약이 걸리면 어째요?”
워낙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한 감기약.
특히 페이런 왕국은 주위의 다른 국가들보다도 약이 널리 퍼진 나라였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열정적으로 펼친 제약사업 덕분에 온 국민이 약을 사 먹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 겨울이 깊어지는 이때에 감기약도 못 믿게 되었으니, 많은 사람의 애가 탔다. 수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댔다.
“트로우 상단도 약 판매를 중지했다면서요?”
“저도 들었어요. 지금 같은 때에 약을 팔아 봤자 의심만 산다나?”
“이미 귀가 있는 사람이면 다들 트로우 백작가를 의심하고 있는데…… 들키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피어트 기사단이 쉬지 않고 들쑤시고 다니던데요.”
믿음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저 어제 자기 전에 멀리서 푸른 빛이 솟아오르는 걸 봤는데! 그게 검기라지요?”
“헉! 루얀 피어트가 또 한 건 했나 보군요.”
“저도 그거 봤습니다. 루얀 피어트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검기가 점점 강해지던데…….”
다들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가짜 약 사건의 배후는 트로우 백작가일 게 빤하지.’
‘이제 곧 꼬리 잡혀 만천하에 드러나겠지!’
‘이번에야말로 피어트 공작가한테 박살 나지 않을까?’
그렇지만 현실은 여론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트로우 백작가가 분명하리란 다수의 심증에도 불구하고, 증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피어트 공작가에서는 모두 골머리를 싸맸다.
“이렇게 사건이 떠들썩해지는데 꼬리를 잡는 일은 지지부진하다니…….”
“아무래도 트로우 백작가에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리케일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트로우 백작가의 전성기 전력이라 해도, 지금 이 속도로 우리의 추적을 피해 낼 수는 없을 겁니다.”
“맞아요. 제가 우리 애들 끌고 진짜 벼락같이 출동하거든요? 그런데 가서 숨 붙어 있는 놈을 본 적이 없다니까요?”
루얀의 말에 공작이 신음하며 말했다.
“으음. 오켄의 황태자가 뱀 기사단이라도 빌려주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듣고 있던 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꿈에서 그렇게 깨고 나서 잊고 있었는데, 그 도마뱀 놈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뱀 기사단이 그렇게 유능해요?”
“베일에 싸인 집단이지. 황실친위대인데 인원도 다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래도 소드마스터인 작은오빠보다 강하진 않을 텐데.”
루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쓸었다.
“다른 비장의 한 수가 있는 거겠지. 암살자 출신이라거나, 독을 잘 쓴다거나…….”
“마법능력자들 같았다.”
조용히 있던 헬릭스가 말했다. 공작가 식구들이 놀라 그를 주목했다.
“지난번 납치사건 때 동원됐던 황태자의 측근들이 뱀 기사단이라면…… 놈들은 마법능력자들이다. 카라이 같은.”
“……비약을 먹고 살아난 마법능력자들이란 소리인가?”
“확실하다.”
공작가 식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린애들에게 비약을 먹이는 잔인한 실험 끝에 살아난 소수의 마법능력자 아이들. 그 애들을 모아 황실친위대를 만들었다는 얘기 아닌가.
오켄 황실이 이 정도로 미친 집단일 줄이야.
“그럼 차라리 추적을 포기해요.”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레아가 냉정하게 정리했다.
“가짜 약을 유통시키는 놈들이 있다는 건, 이미 수도 사람들 모두 알고 있잖아요.”
“다들 뒤에 트로우 백작가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리케일의 대꾸에 레아가 힘주어 말했다.
“이미 우리의 무고함은 알렸고, 범인이 따로 있을 거란 것도 소문났어. 그런데 그 범인을 잡지 못하고 약만 못 팔게 된 게 한참 지났잖아? 사람들은 이미 지쳐 있을 거라고. 슬슬 범인은 범인이고, 우리가 무능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할걸.”
레아는 또박또박 강조했다.
“이게 오래가면 피어트 상단의 신뢰도가 바닥을 칠 거예요.”
“으음.”
피어트 공작이 신음했다.
“상황을 종결시키잔 얘기냐?”
“네. 우리가 무능해 보이지 않도록, 단호하게요.”
며칠 후 피어트 상단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시중에 나와 있는 빨간 감기약을 판매 금지시킨 것이다. 왕실에서도 협조했다.
“가짜 약품을 팔다 걸릴 시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바로 체포하겠다! 죄인은 왕실 지하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왕실 지하감옥.
말이 감옥이지, 그곳에선 재판을 기다릴 일이 없었다. 손바닥만 한 감옥이 차기만 하면 얼른 끌어내서 교수대로 보냈으니까.
서슬 퍼런 왕실의 공표에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었다. 약재사 길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국에 괜히 약 팔았다가 잘못될라!’
다들 바짝 얼어서 약을 못 팔고, 못 사고, 눈치만 보고 있는 어느 날. 페이런 전역에 폭설이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한파가 들이닥쳤다.
“콜록!”
기침 소리가 곳곳에서 무섭게 번져 가고, 독감이 대유행했다.
“콜록! 콜록!”
“코올록! 커억!”
빈민가에서는 끊임없이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독감의 파괴력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가차 없었던 것이다.
작은 굴 같은 움집들에선 환자들이 고열을 이기지 못해 비틀대며 나왔다가 얼어붙은 길바닥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어이구, 내 엉치…… 어이구!”
순식간에 빈민가를 휩쓴 독감은 곧 평민들에게까지 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