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02화 (102/110)
  • 18.

    “언니 얼굴 무서워.”

    리리스의 말에 리첼은 그제야 그녀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적한 기분 풀러 왔다가 괜히 화만 날 것만 같았다.

    특히나 후작과 카일 옆에서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클라라의 모습을 보니 속이 더욱 뒤틀렸다.

    ‘나도 후작님을 공략했어야 했나.’

    클라라가 후작님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을 때 우습게 넘어간 게 잘못이었다.

    그땐 카일과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어서 잊고 있었다.

    ‘그의 연인은 난데. 왜 밝히지 못하는 거야!’

    카일이 마법사로 인정될 때까지 참아야 했지만 리첼의 인내심은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클라라의 미소만 보지 않는다면 그나마 참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

    리첼은 음흉한 미소로 옆에서 디저트를 먹고 있는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리리스!”

    “왜?”

    리첼이 부르자 리리스가 케이크를 오물거리며 물었다. 볼엔 크림이 살짝 묻어있었다. 평소라면 얼굴에 묻은 걸 닦아줬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카일 선생님 요새 바쁘셔서 얼굴 자주 보지 못해서 아쉬워했잖아. 그러니 지금이 기회야. 궁정 마법사로 인정받으면 바빠져서 얼굴 보기 더 힘들어질 걸?”

    “앗! 정말이야?”

    리리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리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늘 선생님 옆에 붙어 있어도 돼? 리리스를 귀찮아하지 않으실까?”

    리리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리첼에게 물었다.

    “아냐. 그럴 분 아니란 거 잘 알잖아. 리리스를 예뻐하니깐 네가 가면 오히려 좋아하실 거야.”

    “진짜야?”

    “물론이지.”

    리첼의 말을 듣자마자 리리스는 먹던 디저트를 다 먹은 후 접시를 내려놓고 카일에게로 달려갔다.

    “선생님!”

    리리스가 부르자 카일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반겼다.

    ‘아까 나한텐 저런 눈빛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리첼은 리리스에게도 질투심을 느꼈다.

    카일은 손수건을 꺼내 리리스의 볼에 묻은 크림을 닦아준 다음 손을 잡았다. 해맑게 웃는 리리스와는 대조적으로 클라라의 얼굴은 굳어버렸다.

    “어머. 리리스 양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클라라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리리스에서 인사를 하자 리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레녹스 가문의 영애신가?”

    스펜서 후작은 리리스의 분홍빛 머리와 공작에게 물려받은 붉은 눈동자를 보며 레녹스 가문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리리스 레녹스 양입니다.”

    카일의 소개를 듣자 후작은 당황했지만 애써 아닌 척했다.

    “안녕하세요. 리리스 레녹스예요.”

    후작에게도 인사를 한 리리스는 카일에게 원하는 디저트를 몇 가지 가리켰다.

    “저거 저거 저거 먹고 싶어요.”

    레녹스가에서 하던 행동 그대로였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카일은 손을 잠시 놓은 후 리리스가 말한 디저트들을 가지러 갔다.

    그 사이 클라라가 리리스에게 말했다.

    “리첼 양은 어디가고 리리스 양 혼자 여기 있어요?”

    “언니는 저기 있어요.”

    리리스의 손가락이 리첼의 방향을 가리켰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 언니에게 붙어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클라라는 리첼에게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리리스를 회유하려 했다.

    “혼자 아닌데요? 선생님과 함께 있는데요?”

    그러자 리리스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무도회에 올 땐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있는 법이에요. 아니면 또래 친구들과. 어른들의 대화를 방해하면 나쁜 어린이라는 거 알죠?”

    에둘러 말해봤자 리리스에게 통하지 않자 클라라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카일 선생님께서 제가 곁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하시면 되는 거 아니에요? 리리스가 잘못한 거예요?”

    하지만 리리스도 고집을 부렸다.

    카일에게 가기 전 리첼은 리리스에게 자신이 시켰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두었더니 다행히 리리스의 입에서 리첼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리…. 아니다. 저기 리첼 양이 리리스 양을 찾는 것 같은데요?”

    클라라가 리첼이 시켰냐고 물어보려다 옆에 후작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혹시라도 리첼의 이름을 듣고 후작이 카일과 리첼의 사이를 오해할까 봐 걱정해서 말을 꺼내다 만 것 같았다. 대신 다른 핑계로 리리스를 보내려 했다.

    클라라의 말을 들은 리리스가 리첼을 바라보자, 리첼은 손을 저으며 계속 그곳에서 놀고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닌데요? 혹시 리리스가 싫어서 보내려는 거예요?”

    리첼의 신호의 의미를 이해한 리리스의 얼굴엔 갑자기 눈물이 맺히려 했다.

    “아, 아니. 그, 그럴 리가요.”

    “리리스 양. 우리가 왜 리리스 양을 싫어합니까?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꼬마 숙녀분을 누가 싫어한다고.”

    클라라 옆에 있던 후작도 당황했는지 급하게 리리스를 달래려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리리스가 원하는 디저트와 음료를 가져온 카일이 세 사람을 보며 묘한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

    리리스는 카일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더욱 깊이 안겼고, 클라라와 후작은 난감한 미소만 지었다.

    어린 아이다 보니 다들 리리스 앞에서 쩔쩔매는 것 같았다.

    적일 때는 그렇게나 신경에 거슬리더니 아군이 되니깐 리리스는 든든했다. 그제야 리첼은 화가 조금은 풀린 기분이었다.

    리첼은 술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넓은 트인 정원을 보니 갑갑한 속이 풀리는 듯했다.

    형형색색 꽃들에 둘러싸인 그곳은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술이 왜 이리 달아?’

    다시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녀였지만 오늘은 달빛에 취하듯 술에도 취하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안주 삼아 리첼은 술 마시며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달랬다.

    * * *

    “리리스 졸려요.”

    카일의 곁에서 무도회를 즐기던 리리스가 눈을 비볐다. 저녁 무도회다 보니 아무래도 일찍 지친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리첼이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무도회장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리리스 님을 두고 먼저 돌아가셨을 리는 없을 텐데?’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레녹스가에서 일하는 하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혼자 열심히 디저트를 먹는 중이었다.

    “리리스 님께서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리첼 님 어디 가셨습니까? 보이지 않군요.”

    카일은 리리스를 품에 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앗, 아까 테라스로 나가신다고 하셨는데요? 아직 안 들어오셨나 봐요. 리리스 님 잠이 쏟아지는 것 같으니 얼른 돌아가야겠네요.”

    비아는 카일에게서 리리스를 받아 등에 업었다.

    “리첼 님은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제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리리스 님 모시고 먼저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정말 감사하죠. 그럼 저는 카일 님만 믿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비아는 카일에게 인사하며 무도회장을 나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자는 리리스의 귀여운 뒷모습을 보니 카일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멀어진 후 그는 리첼을 찾기 위해 테라스로 향했다.

    스펜서 후작의 등쌀에 못 이겨 무도회장에 끌려와 억지로 클라라의 파트너로 참석해야만 해서 난감했지만, 다행히 리리스 덕분에 난처한 상황은 벗어날 수 있었다.

    혹시라도 클라라가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라도 했다간 큰일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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