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01화 (101/110)

18.

의기양양한 클라라의 표정을 보니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리첼에게 보란 듯이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거만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같이 춤출 사람 많다고!’

리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만 무도회장에 늦게 오는 바람에 대부분 첫 춤의 상대는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춤은 추지 않더라도 첫 춤은 카일을 자극할 만한 남자와 추고 싶었다. 그러다 그녀가 원하는 조건에 적합한 남자를 발견했다.

리첼은 레녹스 공작 옆에 서 있는 패트릭에게 다가갔다.

“나랑 춤출래요?”

리첼이 제안하자 패트릭이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래 남성이 여성에게 먼저 제안하는 게 일반적인 규칙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 호위를 위해 참석했을 뿐 춤출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이다.

“오늘은 메리오너스 가문의 차남에게 춤 신청하는 거예요.”

하지만 리첼의 말을 듣자 패트릭은 미소를 보이며 몸을 숙였다.

“영광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리첼의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리첼이 카일을 힐끔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걸 확인했다.

평소 곧은 모습만 봐서 몰랐지만 의외로 패트릭의 춤사위는 정말 부드러웠다.

“춤 잘 추시네요?”

“공녀님에 비해선 아직 부족합니다.”

“겸손하시기는요.”

리첼의 말에 패트릭은 온화한 미소로 대답했다.

“신경 쓰이십니까?”

리첼이 춤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자꾸 카일 쪽을 힐끔힐끔 바라보자 패트릭이 물었다.

외부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녹스가에선 리첼과 카일이 연인 사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다만 카일이 궁정 마법사로 인정받기 전까지 입조심 하라는 공작의 명령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 너무 티 났나요?”

리첼의 말에 패트릭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상심하진 마십시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마법사님께서는 공녀님을 두고 다른 여인들에게 눈길을 주실 분이 아닙니다.”

알고는 있었으나 패트릭에게서 확신에 찬 말을 들으니 그녀의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리첼은 그제야 믿음직스러운 자신의 파트너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 강건하고 강직한 성품이었기에 리첼은 그를 딱딱한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패트릭의 얼굴선은 고운 편이었다.

그동안 관심 없어 몰랐을 뿐이지 그도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훔칠 것도 같았다.

최연소 기사단장에, 자작 가문의 차남에다, 얼굴도 훤칠하고, 올곧은 성격에….

설마? 그중 한 사람이 레이나였나?

패트릭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리첼은 얼마 전 그녀가 겪었던 묘한 장면이 갑자기 떠올렸다.

“얼마 전 레이나와 무슨 일 있었어요?”

리첼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 나오자 패트릭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무슨 일 있었네. 있었어.’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어떤 일을 말하냐고 물어볼 만도 했건만 바로 별일이 없다고 하다니….

리첼은 얼마 전 레녹스 공작을 뵙기 위해 서재에 갔다가 그 방에서 황급히 달려 나오는 패트릭과 서재에서 얼굴이 벌게진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레이나의 모습을 목격했었다.

레이나 말로는 넘어질 뻔한 걸 패트릭이 잡아줬다곤 했으나 분위기가 괴상야릇했다.

‘수상해.’

리첼이 가는 눈으로 패트릭을 바라보자 그는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패트릭이 먼저 이상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했다면 레이나가 벌였겠지만.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봤을 뿐인데 패트릭의 난감한 표정을 보니 사고뭉치 레이나가 뭔 짓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쓸데없는 말은 별로 하지 않는 단장의 성격을 알고 있는 리첼은 이 이상 물어봤자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추궁하는 걸 그만두었다.

‘설마. 아니겠지. 레이나가 혼자 사고 친 거겠지?’

궁합을 알려주는 목걸이는 이미 레이나에게 건네주었다. 건네줄 땐 아무 반응이 없더니 요즘 그녀에게 남자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말한 남자가 설마 패트릭은 아니겠지?’

하지만 리첼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괄량이 레이나와 우직한 기사단장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았다.

“형님 일에 대해선 감사 인사드립니다.”

의심하는 리첼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는지 패트릭이 그녀의 시선을 돌리려고 갑자기 펠릭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감사 인사라뇨? 그때 생각만 하면 미안하게 생각해요. 저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요.”

그 행동이 더 수상했지만 리첼은 일단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형님에 대한 생각은 바뀌셨습니까?”

“당연하죠. 펠릭스 님은 제게 누구보다도 멋진 분인걸요.”

리첼의 말에 패트릭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입니다. 형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직접 찾아뵌 후 말씀드리는 건 어떨지요?”

“그래도 돼요? 얼굴 보기 미안해서 찾아뵙질 못하고 있어요.”

“공녀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조만간 찾아뵙기로 하죠.”

리첼과 패트릭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첫 곡이 끝나자 카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첼에게 다가왔다.

“다음 춤은 저와 어떠십니까?”

“아니요. 난 오늘 한 곡만 추려고요. 거절할게요.”

하지만 리첼은 그의 춤 신청을 거절했다.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거절당하자 카일의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며 표정 없이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왜요? 클라라 양과 잘 어울리던데요?”

“진심입니까?”

“….”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기에 카일의 말에 반박할 순 없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을게요. 스펜서 후작님께선 클라라 양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요?”

리첼의 질문에 카일이 잠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이리 쉽게 볼 줄이야.

“…맞습니다.”

카일의 입에선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나왔다.

역시나. 예전에 클라라가 후작과 친해졌다고 하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클라라가 스펜서 후작의 마음을 훔쳤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카일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첼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알겠어요. 궁금한 건 그게 다예요.”

리첼이 싸늘한 시선으로 카일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방금 같이 춤추신 분. 제가 알기로는 메리오너스 가문의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오늘 펠릭스 님께서 참석하지 못하셔서 그분 대신에 패트릭 경께서 대신해서 저와 춤을 추셨죠.”

리첼은 카일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패트릭을 춤 상대로 택했다,

펠릭스와 패트릭에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들에게 해가 가는 건 아니니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해서였다.

“펠릭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역시나 펠릭스의 이름을 듣자 카일의 이마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공녀….”

카일이 리첼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스펜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카일은 리첼에게 인사를 한 후 황급히 스펜서 후작에게로 갔다.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리첼은 후작과 클라라 곁으로 가는 카일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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