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0화 (90/110)
  • 16.

    “차라리 외출하는 게 어때요?”

    리첼의 울적한 기분을 알아챘는지 비아가 단 디저트를 먹으러 갈 것을 제안했다.

    “그럴까?”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비아와 함께 카페로 향했다.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야외의 테이블에서 온갖 종류의 디저트를 시켜서 하나둘씩 먹어 치웠다.

    단 것이 속 안으로 들어가니 울적해진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리첼의 표정이 풀리자 비아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오자고 했지? 고마워.”

    리첼은 앞에 놓인 디저트를 모두 먹은 후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가씨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얼마든지 나올 수… 아얏.”

    말을 하다 멈춘 비아가 갑자기 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리첼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비아에게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아니요. 갑자기 무언가 제 어깨를 때려서요.”

    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집었다.

    “보석…?”

    갑자기 보석이 멀리서 날아오다니 이상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곧이어 얼른 지금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리첼과 비아를 집어삼켰다.

    “연기 마시지 마!”

    수상한 연기를 맡을 수 없기에 리첼은 손으로 코와 이마를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이대로 눈을 감아선 안 될 것만 같은데 정신을 차리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기사들이 연기를 보고 달려올 테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그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언뜻언뜻 들리며 리첼은 눈을 떴다.

    그녀는 어느 오두막집 안에 있었고 몸이 기둥에 묶여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평소 품 안에 가지고 다니던 예비용 단검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발로 이곳저곳 더듬어 봐도 칼이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미리 알고 빼앗은 것 같았다.

    “내가 카일의 약점을 가져오랬지 누가 여인을 데려오라 했어?”

    “일단 저 계집애부터 처리하면 될 거라고 했잖아요.”

    정신을 완전히 차리니 어떤 노인과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라 리첼은 흐릿한 눈으로 대화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힐…다?”

    놀란 눈으로 힐다의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리첼에게 옮겨졌다.

    “깨어났네? 어때? 지금 상황 파악되려나?”

    힐다가 비웃으며 말했다.

    “무슨 짓이야? 지금 봉사하고 있을 시간일 텐데 왜 나를 납치했지?”

    리첼은 묶은 끈을 풀려고 발버둥쳤지만 꽉 묶인 줄이 그녀의 살을 더욱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잘못은 네가 했는데 내가 벌을 받아서 말이야. 그걸 어떻게 갚아줄까 생각하다가 일단 널 네 주변 기사들에게서 떼어내겠다고 생각을 했어.”

    “기사라니? 이 여성 설마 귀족이야?”

    힐다의 말에 노인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노인은 리첼에게 다가와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목걸이에 유난히 더 길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뭐야. 옷도 액세서리도 고급이고 피부도 보아하니 관리받은 것 같고…. 귀족 영애 맞는 것 같은데? 힐다 미쳤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귀족을 납치한 거야?”

    “네. 저 귀족 맞아요. 몰랐어요? 당신 말대로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

    노인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리첼은 당당히 말했다. 잘만 구슬리면 자신을 풀어줄 것만 같았다.

    “입 닥쳐!”

    그러자 힐다가 리첼에게 소리쳤다. 그녀도 당황스러워하는 노인의 반응에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카일의 약점을 가져오랬지 누가 귀족을 데려오랬어?”

    노인은 갑자기 횡설수설했다.

    카일의 약점이라…. 리첼은 그제야 그 노인이 카일이 말하던 그의 스승이라는 걸 알았다. 카일의 약점을 잡으려고 힐다와 손을 잡은 모양이다.

    ‘돈만 밝히는 노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카일이 편지 한 장만 달랑 두고 스승의 곁을 떠나 괘씸해서 쫓아온 듯 보였다.

    비아에게 던진 보석은 아마도 저 노인이 만든 마법 도구가 분명했다. 연기와 함께 사람을 기절시키는 마법이 깃든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일에게 마법이 깃든 물건을 하나 받아두는 건데.’

    후회했다. 카일이라면 호신용 마법이 깃든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평소 호위 기사들만 믿으며 아무 탈 없이 살았기에 그녀는 위기의식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펠릭스의 입에서 힐다의 이름이 나왔을 때 경계했어야 했는데 펠릭스가 신경 쓰여 그러질 못했다. 게다가 평민으로 다시 돌아간 데다 리첼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기에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올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갑자기 마법사 한 명이 솔로이 제국까지 와서 힐다와 손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 돈은 많아요. 원하는 액수 부르면 드릴 테니 저를 지금 풀어주는 건 어때요?”

    그래서 일단 노인부터 꼬셔서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약점이니 잘만 꼬드기면 노인이 넘어올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한 편으론 경계도 해야 했다. 카일의 스승이라면 그도 마법사일 테니깐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 틈을 노려 빠져나가야만 했다.

    “돈을 준다고? 당신 그렇게 돈이 많은가요?”

    노인이 리첼의 말에 관심을 가지는 듯 보였다.

    “네. 얼마를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를 풀어준다면 원하는 만큼 드릴게요.”

    노인을 안심시켜야 했기에 리첼은 일부러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를 원할지 어떻게 알고 그리 말하는 게요?”

    그러자 그는 그녀의 말에 약간 의심을 가지는 듯 보였다.

    “솔로이 제국에 왔으면 들어봤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레녹스 공작가라고 들어봤어요? 전 레녹스 공작가의 장녀예요.”

    “공작가라고?”

    가문 이름은 모르는 눈치지만 공작가란 단어를 듣자마자 노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야?”

    리첼의 말을 믿을 수 없는지 노인은 힐다에게 확인차 물었다.

    “네. 공작가 영애 맞아요. 나도 가본 적 있는걸요.”

    힐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퍼레졌다.

    “히이익. 난 모르는 일일세. 힐다 저 계집이 다 저지른 일이야.”

    갑자기 노인은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기, 기다려요. 나는 풀어주고 가야 할 거 아니에요?”

    리첼이 노인에게 외쳤으나 이미 그의 귀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가득 찬 듯 보였다.

    결국 그는 리첼을 풀어주지도 않은 채 공작가란 말 한마디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내가 가만두나 봐라. 여기서 나가면 찾아내서 혼쭐을 내줄 거야!”

    리첼이 멀어지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네가 여기서 나갈 거라고 확신하나 보네?”

    그러자 힐다는 재밌다는 듯 노려보았다.

    겁이 없는 건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지.

    리첼은 힐다가 자신에게 저런 소리를 한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냈다간 레녹스 공작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곱게 죽는 건 포기해야만 했다.

    “날 왜 납치했는지 모르겠지만 후회하지 말고 빨리 풀어줘. 지금쯤 레녹스가에서 날 찾을 텐데 뒷감당할 수 있겠어?”

    “뭐래?”

    힐다는 리첼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었다.

    “저 노인을 봐봐. 내가 공작가 사람이라는 말만 듣고도 무서워서 도망쳤잖아.”

    현실 파악이 필요할 것 같아 힐다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내가 뭐가 무서워 도망을 가?”

    하지만 힐다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들이밀었다.

    한숨이 푹 나왔다. 힐다와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더니. 아니 그녀는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도 같았다. 눈빛을 보니 제정신은 아니었다.

    눈에 뵈는 것 없는 정신 이상자가 가장 무서운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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