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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89화 (89/110)
  • 15.

    카일에겐 미안했지만 펠릭스의 로켓 목걸이를 본 이후부터 리첼의 머릿속은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과거에 호감 있던 사람과의 마무리가 개운하지 않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리첼에겐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누군가의 대타로 여겼다는 걸 떠올리면 그는 이제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엮이지 않았으면 이런 감정도 들지 않았을 텐데.’

    목걸이 때문에 괜히 그와 엮인 것 같다가도 목걸이 덕분에 카일과 만났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마음이 괜히 심란했다.

    [똑똑]

    그때였다. 리첼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기사단장님께서 찾아오셨는데요.”

    뜻밖의 인물이 그녀를 찾아왔다.

    기사단장이라니? 가끔 그와 대화를 하곤 했지만 그녀의 방을 찾아올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오다니 무슨 볼일….

    ‘아!’

    리첼은 그제야 떠올랐다. 단장의 이름이 패트릭 메리오너스라는 것을 말이다.

    ‘동생이었나?’

    처음에 펠릭스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지만 생일 연회에 초대된 명단에서 봐서 익숙하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펠릭스의 동생이 레녹스 가문의 기사 단장이었다.

    워낙 실력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눈에 띄어 레녹스 기사단의 일원으로 데려왔고, 실력 하나만으로 최연소로 기사단장에 오른 자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자 하늘하늘한 머리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차가운 느낌이 나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남자였다.

    펠릭스가 붉은 머리색을 가진 따뜻한 느낌의 훈훈한 이미지였기에 얼핏 보면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다.

    그래서 리첼은 그들이 형제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특히나 성격도 두 사람이 완전 달랐기에 더더욱.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갑자기 패트릭이 리첼을 찾아온 것을 보니 펠릭스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펠릭스 형님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역시나 패트릭의 입에서 펠릭스의 이름이 나왔다.

    “들어오세요.”

    그는 리첼이 안내한 소파에 앉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오셨나요?”

    펠릭스와 패트릭은 전혀 다르게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색이 같은 걸 보니 리첼은 두 사람은 역시 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레녹스가에서 있던 일을 형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공녀님께서 오해하시곤 형님을 만나주지 않으실 거라고 걱정하시더군요.”

    “무슨 오해요? 펠릭스 님과의 대화는 이미 끝났고,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거 아니었나요?”

    리첼의 말을 듣자 패트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공녀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형님께서 걱정할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첼은 자신의 양 볼을 쓰다듬었다.

    ‘내 표정이 그렇게나 이상했나?’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갑자기 형님께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리첼의 생각을 읽었는지 패트릭이 말했다.

    “펠릭스 님이 사랑하셨던 분이 베스 언니라는 사실이요? 이미 맞다고 인정하셨잖아요?”

    “베스 님과 공녀님께서 닮아서 형님이 그분 대타로 공녀께 마음을 품었다고 오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패트릭이 왜 해명하러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끝난 사이인데 해명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단장님도 베스 언니 봤을 것 아녜요? 안 닮았나요?”

    리첼의 물음에 패트릭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비교한다면 닮으셨습니다.”

    패트릭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단장님이 봐도 닮았으면 오해라고 할 게 있나요?”

    리첼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베스 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어요.”

    리첼은 평소 몸이 약했던 베스가 가지고 있던 지병 때문에 사망했다고 들었다.

    “사실 형님께서 엘리자베스 님을 더욱 잊지 못하는 건 형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

    패트릭의 말에 리첼의 눈이 커졌다. 펠릭스 때문에 베스 언니가 죽다니.

    “베스 님께선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셨다는 걸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리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방지축이었던 그녀와 달리 베스는 몸이 약한 편이라 잦은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님과 저희 형제는 소꿉친구라 자주 어울렸고, 형님은 베스 님의 연약한 모습을 보며 늘 안타까워하셨죠. 베스 님을 챙겨주게 되면서 그 마음이 깊어지며 두 분은 자연스레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리첼도 베스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그 상대가 펠릭스라는 걸 몰랐을 뿐. 베스는 그녀에게 연인이 누군지 일러주지 않았기에 얼마 전에 알았다.

    “매번 기운이 없던 베스 님을 위해 형님께선 책에서 본 몸에 좋은 약초를 직접 캐서 달인 다음 베스 님께 드렸는데 하필이면 그분과 몸에 맞지 않은 약이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패트릭의 얼굴을 괴로웠는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혹시 그 약 때문에 언니의 건강이 악화되었나요?”

    “…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앓아누우셨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깨어나셨지만 그 사건이 형님의 마음속 깊이 트라우마로 남으셨습니다. 게다가 3년 전 엘리자베스 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형님께선 더욱 죄책감에 시달리셨죠. 잘못 먹은 약초 때문에 일찍 세상을 뜬 건 아닌가 홀로 괴로워하셨습니다.”

    패트릭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고, 그의 눈빛은 슬퍼 보였다.

    “사실 엘리자베스 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게 형님이 만든 약을 드셔서 그 명이 짧아진 건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첫사랑이 형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그분을 평생 잊을 수가 없으셨을 테지요.”

    패트릭 말에 따르면 펠릭스는 마음속에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 슬픔을 잊으려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셨나요?”

    “…네. 보다시피 잘 생기기도 하셨고, 다정한 성격이라 다가오는 여성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원래는 다른 여성분들에게 눈길조차 준 적 없지만 베스 님께서 돌아가신 후론 여성들과 어울리며 슬픔을 잊으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리첼은 처음 만날 때의 펠릭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 눈동자엔 허무함이 깃들여있었고, 그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던 것 같았다.

    “형님께선 잠시 방황하다가 공녀님을 만나고 바뀌었습니다. 베스 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다른 분께 마음을 내준 적 없는데 공녀님을 위해 다른 여인들을 모두 정리하셔서 놀랐습니다. 그만큼 진심이었을 겁니다.”

    리첼의 표정이 굳자 패트릭은 다급히 펠릭스의 진심을 이야기했다.

    “공녀님을 보면 베스 님이 떠올라 형님께선 오히려 괴로우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공녀님에게 마음이 갔다고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처음에 펠릭스가 리첼을 보고 잠시 놀란 후 무시했던 건 그 때문에 일찍 사망한 베스를 떠올라서 괴로웠던 모양이다.

    “이미 정리한 관계니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공녀님의 추억 속에 남은 제 형님이 나쁜 이미지로 남아있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

    “한때나마 마음을 품었던 이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괴롭지 않을까요?”

    리첼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패트릭은 계속 펠릭스에 대해 해명했다. 어떠한 대답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지만 지금 당장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에 저희 형님을 마주치더라도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셨으면 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끝났으니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할 말을 마친 패트릭은 정중히 몸을 숙여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펠릭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으니 리첼의 마음도 좋진 않았다. 오해가 풀린 것 같지만 여전히 마음속 찜찜함은 그대로였다.

    사람의 감정이 말 한마디에 확 바뀌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았다.

    ‘다음에 펠릭스를 우연히 마주친다면 난 웃으면서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리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할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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