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리첼은 재빨리 비아에게 달려가 그 뒤로 몸을 숨기며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왜 카일 님께서 레녹스가에 온다는 얘기 전해 주지 않은 거야?”
“아가씨 손님이 아니라 레녹스 공작님의 손님인데요? 제가 공작님 손님까지 말씀드렸어야 했나요?”
평소에 레녹스 공작의 손님이 와도 리첼에게 따로 일러주지 않았기에 비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리첼은 슬쩍 카일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의 뒤를 따라오던 레녹스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 천방지축 같으니! 내가 조심하랬지? 또 혼자 술 마셨어? 작작 좀 마시라고 하지 않았느냐!”
레녹스 공작이 매서운 눈빛으로 리첼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순간부끄럼이 밀려왔다.
술에 덜 깬 모습을 카일에게 보인 것도 쪽팔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데, 공작에게 혼나는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게다가 또 술이라니. 아버지 말만 들으면 리첼을 알코올 중독자로 오인할 만한 말이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 같군요. 어제 힘든 일 있었나 봅니다.”
카일이 리첼을 짓궂은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큭큭거리며 웃는 카일을 바라본 후 레녹스 공작이 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끄럽게 뭐 하는 짓이냐, 리첼! 레녹스가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구나.”
‘누구 때문인데. 피― 다 알면서.’
리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면서도 놀리는 것 같았다. 어제 분명히 다음날 레녹스가로 올 거면서도 일부러 말 안 한 것이다.
‘상냥한 미소라고 생각했던 저 미소는 실은 악마의 미소야!’
리첼은 제게 심술궂은 행동을 한 카일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만 좀 노려보고 얼른 들어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너라. 앞으로도 계속 저택에 올 텐데. 그럴 때마다 이런 꼴을 보일 게냐?”
레녹스 공작의 말에 리첼은 그제야 자신이 잠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아의 몸 뒤로 완전히 몸을 숨기던 그녀는 방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 중에 의아한 점이 있단 걸 깨달았다.
‘계속 저택에 오다니?’
“누가요? 누가 계속 저택에 온다는 거죠?”
리첼은 제 귀를 의심했다. 마치 카일이 계속 레녹스가에 온다고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제 그는 그런 말 한마디 없었는데?’
“누구긴 누구야. 네 눈앞에 있는 카일 영식이지.”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리첼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했다.
“네?! 언제부터 정해진 건데요? 설마 지금요?”
믿을 수 없는 말에 리첼은 공작에게 연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그럴 리 없잖느냐. 사제 일 그만둘 때쯤이라고만 알고 있거라.”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자주 오는데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게다.”
리첼은 다시 카일을 노려보았다.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을 일부러 피했다.
‘어제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 그는 나를 놀리려고 어제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한 것이 분명해.’
카일은 일부러 이 사실을 리첼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와 언제 만날지 몰라 아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즐긴 게 틀림없었다.
‘치사해!’
선한 줄 알았던 카일은 작은 악마였다.
그는 일부러 리첼을 놀리는 행동만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리곤 그녀의 반응을 보면서 즐겼을 것이다.
“네가 카일 영식의 방문을 못 마땅해하는 걸 뭐라고 하진 않겠다만.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건 예의가 아니잖니. 내 손님이니깐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 있거라. 아니면 너와 마주칠 수 없는 시간에 그를 부르도록 하마.”
여전히 눈치 없는 레녹스 공작은 리첼이 카일을 싫어한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만나지 못하게 수업 시간에 그를 부르겠다니….
이번에도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레녹스 공작이 그녀를 방해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럴 필요 없어요.”
리첼은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며 소리쳤다.
달려가는 내내 그녀의 심장은 앞으로 카일과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자주 레녹스가를 방문한다니!’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곤 리첼은 신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몸을 한 바퀴 돌리기도 하고 잠시 왈츠 스텝도 밟기도 했다.
흥분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혼자서 한참을 신나게 뛰던 리첼은 움직임을 멈추고 갑자기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그럼 어젯밤 난 왜 술을 먹은 거야?’
한숨을 쉬며 리첼은 앞으로 술을 줄이겠다고 결심했다.
* * *
카일이 레녹스가에 드나들게 되면서 리첼이 그의 얼굴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왜 드나드는지 여전히 알진 못했지만, 볼일이 끝나면 그는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리첼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만약 오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며칠만 기다리면 다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선생님!”
카일이 볼일을 마치고 차를 마시면 리리스가 제일 먼저 달려와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 바람에 리첼은 언제나 리리스를 포함해서 세 명이서 차를 마셔야 했다.
물론 레이나도 가끔 와서 같이 차를 마시곤 했지만, 훼방꾼은 레이나가 아닌 리리스였다.
“이번엔 이것 주세요.”
리리스는 굳이 카일에게 쿠키를 먹여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카일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리리스 입 크기에 맞게 잘라 먹여주었다.
리리스를 돌보러 오는 건지 리첼을 만나러 오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리리스는 카일이 돌아갈 때까지 졸린 눈을 참으며 그의 옆자리를 버텼다. 그 바람에 리첼은 카일과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리리스가 외출하고 없을 때 카일이 갑자기 일이 생겨 찾아오는 날에나 겨우 둘이서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기로 한 날을 어떻게 알았는지 리리스는 그 시간은 항상 비워두었다.
리첼은 엘시아에게 부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녀의 동생 엘리엇이 리리스와 가장 친했기에 카일이 레녹스가를 방문하는 날 하루만 리리스와 놀아달라고 말이다.
“리리스!”
엘리엇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레녹스가를 방문했지만 리리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따가 카일 선생님 오시는데….”
그래도 일단 엘리엇이 놀러 왔으니 리리스는 그와 재밌게 놀았지만 카일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엘리엇에게 집에 가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왜? 엘리엇이랑 노는 게 재미없어? 제일 친한 친구잖아.”
리첼은 리리스에게 물었다. 또래 친구와 놀 때가 제일 재밌는 거 아닌가?
“재밌긴 한데. 난 선생님이랑 노는 게 더 좋아. 또 언제 우리 집에 못 올지 모르잖아.”
리리스의 말에 리첼은 ‘그건 그러네.’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가끔은 네가 리리스를 데리고 외출하는 건 어때?”
참다못해 리첼이 레이나에게 부탁했다.
“왜? 카일 님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래?”
레이나가 리첼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짓궂은 미소와 함께 물어보았다.
눈빛이 얄미웠지만 원하는 말이 나왔기에 리첼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두 사람 어떤 사이야? 내게 애인이라고 소개할 수 있어?”
“….”
레이나의 입에선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 나왔기에 리첼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사이일까?’
레이나의 말 한마디에 리첼은 잠시 고민했다.
“또, 또. 애매한 관계는 아니겠지? 지난번에 펠릭스 님과도 애매하게 굴더니. 이번에도 그래? 아니면 언니 혼자 짝사랑이야?”
리첼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레이나는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짝사랑은 아닌데….”
리첼은 레이나의 물음에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카일이 가끔 리첼의 마음을 흔드는 말을 할 때면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말은 회피하며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기에 리첼은 어떤 관계라고 확정 지어 말할 수 없었다.
“여전히 펠릭스 님께도 편지가 오던데. 설마 언니가 양다리 아니지?”
레이나가 가는 눈으로 리첼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다리라니! 아니야. 카일 님과는 잘되는 중이야.”
“잘되는 거 맞긴 해? 언니 혼자 매달리는 거 아니고?”
레이나가 리첼에게 이상한 오해를 할까 봐 특별한 관계라고 말은 해뒀지만 레이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대론 너무 애매한가?’
지금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어떤 관계냐는 레이나의 질문에 리첼은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