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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64화 (64/110)
  • 11.

    카일의 말에 하늘을 향해 있던 리첼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고, 그녀의 시선은 카일에게로 옮겨졌다.

    “아…. 그만두신다더니 오늘이에요? 벌써 시간이 흘렀나 봐요. 막상 그만두려니 아쉽지 않으세요? 원래 사제를 꿈꾸며 견습으로 들어갔을 텐데요.”

    괜히 저 때문에 그만두는 것 같아 리첼은 미안했다.

    “하하. 다들 저를 그렇게 오해하더군요. 아쉬운 건 없습니다. 처음부터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카일은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네?”

    카일의 뜻밖의 말에 리첼은 놀랐다.

    견습 사제로 있었으면서 사제가 될 생각이 없다니….

    알 수 없는 말에 대체 왜냐고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전에 카일의 손이 그녀의 턱에 닿았고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기 때문이다.

    거친 밤공기와 대조적으로 카일의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감미롭고도 촉촉한 감촉이 입안으로 전해지며 목 안 깊은 곳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일은 대답하기 싫어서 리첼의 입을 막은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서 그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을 때 거부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입안에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리첼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호흡이 점차 가빠지면서 두 사람의 키스는 점점 격렬해졌다.

    달콤한 감촉에 야릇한 황홀감을 느끼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한 후, 카일과 리첼은 함께 손잡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수히도 쏟아지는 별들은 여전히 하늘을 빽빽이 채워져 있지만 혼자서 서서 볼 때보다 그와 나란히 서서 보니 리첼이 바라보는 하늘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지만 리첼의 바람과는 달리 날은 점점 더 어둑해졌다. 어느덧 그녀가 레녹스가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신전에서 나오면 스펜서가로 돌아가시나요?”

    리첼은 아쉬운 마음에 카일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물었다.

    ‘앞으로 당신의 얼굴을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하나요?’란 말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보내진 않았다.

    “글쎄요.”

    하지만 그의 입에선 애매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뭐 할 건지 정해지지 않았나요?”

    “그건 아니지만….”

    또다시 카일의 입에선 애매한 답변만이 들려왔다.

    ‘스펜서가가 아니라면 그가 또다시 갈 곳이 있는 건가?’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뚜렷한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하고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 정돈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이 아니었던가? 내게 마음이 있으니 견습 사제로서의 마지막 날에 나를 부른 거 아니었던가?’

    내심 기대하고 왔건만 리첼의 마음은 실망감만 가득했다. 앞으로 그와 자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아쉬움만 가득했다.

    “많이 섭섭한 표정이군요. 아예 얼굴 안 볼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카일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리첼의 굳은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그동안은 그가 보고 싶을 때마다 신전을 찾아왔지만 이젠 그럴 수 없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앞으로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때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딜 가서 만나야 하나. 리첼의 마음은 복잡했다.

    “신전이 아니라도 언제든 볼 순 있겠죠.”

    그녀의 속마음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카일이 대답했다.

    그의 손이 리첼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뺨에 닿는 카일의 손길은 밤공기만큼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다음에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기에 리첼은 자꾸 보채듯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아직은….”

    하지만 카일의 대답은 똑같았다.

    게다가 그녀와 달리 무덤덤한 그의 표정을 보니 리첼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방금 전까지 행복했던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불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꼭 리첼 그녀 혼자만 안달 난 것 같았다. 왜 이리 불안감을 안겨주는지.

    리첼은 카일이 원망스러웠다.

    카일과 헤어지고 나서 리첼은 혼자 앉아있는 마차 안에서 그의 앞에서 차마 할 수 없던 말을 내뱉었다.

    “이럴 거면 왜 기대하게 한 거야? 사제로서의 마지막 날을 나와 보내고 싶다고 불러놓곤 정작 다음 만남엔 애매하게 말을 하냐고! 앞으로 뭐할지도 정해놨다면서 왜? 왜 말을 못 해? 이럴 거면 왜 나한테 그런 다정한 입맞춤을 했어? 대답하기 곤란해서 입막음한 거야 뭐야! 내 입술은 말 돌리기용이냐고? 그동안 나와 한 짓들이 있는데 대체 뭐냐고. 그 자식!”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리첼의 속마음이 술술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나니 그의 앞에서 이렇게 외쳤어야 한다는 후회도 밀려들었다.

    저택에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리첼은 응접실에 있는 장식장을 열었고, 눈에 제일 먼저 띄는 술병 하나를 꺼냈다.

    “잔은 내 방으로 가져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 아가씨! 통째로 가져오다뇨! 설마 다 마실 건 아니죠?”

    비아가 방 안으로 술잔을 들고 들어오다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보며 놀란 눈치였다.

    “글쎄. 마셔보면 알겠지?”

    “안 되겠어요. 이러다 큰일 나요.”

    비아는 가져온 술잔을 그대로 들고 나가려 했다. 얼른 달려가 억지로 술잔을 뺏으려 했지만 비아는 내주지 않으려 몸을 있는 힘껏 숙였다.

    아무리 흔들고, 간지럼을 태워도 비아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리첼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소파에 걸어가 앉았다.

    “술 안 마실 거죠? 포기한 거 맞죠?”

    비아가 안심한 듯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리첼은 술병을 들은 후 그대로 뚜껑을 땄다.

    “잔이 없다면 입 대고 직접 마셔야지 뭐. 별수 있나?”

    병을 그대로 잡고 마시려 했다.

    그러자 비아가 황급히 달려와 한 손으론 술병을 잡았고, 다른 손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잔에다 마셔요. 제가 졌으니깐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세요. 다만 적당히 마셔야 해요!”

    비아는 결국 항복하곤 잔을 두고 방을 나갔다.

    눈치 주는 사람이 없어지자 리첼은 잔에 술을 가득 담고 입안으로 조금씩 넘겼다. 이럴 때만 왜 이리 술이 단지. 술이 쭉쭉 들어갔다.

    ‘어?’

    리첼은 이마를 찌푸리며 눈을 떴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완전히 술에 깨지 않았는지 그녀는 여전히 비몽사몽 중이었다.

    “아이고. 술 냄새. 아가씨 설마 새벽까지 술 드셨어요?”

    때마침 비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리첼은 흐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야 일어나시다니…. 아까부터 계속 깨웠는데 일어나지도 않으시고. 쯧.”

    ‘때마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수시로 리첼의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속이 갑갑했다.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비아에게 시켜서 물을 가져오라고 하려다 직접 부엌으로 걸어가 물을 마시는 편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그 상태로 어딜 가셔요? 멈춰요. 아이참. 멈추라고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비아를 무시한 채 리첼은 1층 부엌으로 향했다.

    여전히 술기운이 남았기에 또렷하지 않은 정신 상태에서 그녀는 계단을 어찌어찌 내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리첼은 그만 다리가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러게 제가 멈추라고 했잖아요.”

    뒤에서 허겁지겁 쫓아온 비아가 리첼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빨갛게 익은 코를 손으로 비비며 일어나려는 순간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걸어오다 리첼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응…?”

    리첼은 넘어진 상태에서 고개만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남자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제 그를 생각하며 술을 퍼마셨기에 환상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아직 술이 덜 깼나?’

    리첼은 자신의 눈을 비비며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가 맞는 것 같은데?’

    리첼은 손을 뻗었고 그녀의 손가락이 상대방의 구두에 닿았다.

    “!”

    갑자기 정신이 확 깬 리첼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위를 힐끔 바라보자 카일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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