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리첼의 생일 파티 무도회를 준비하는 날이었다.
초대한 손님들이 오기 전, 아버지 레녹스 공작이 리첼을 자신의 방으로 조심스레 불러 선물 하나를 건네주었다.
맑고 투명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어머! 예쁜데요? 감사해요.”
목걸이가 마음에 들자 리첼은 받자마자 바로 자신의 목에 걸었다. 지금 입고 있는 황금색 시폰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공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간직해야 할 게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데다가 마법도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곤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마법이라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리첼은 마법이 깃들었다는 공작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마법사의 존재 자체가 뜬소문인데 마법이라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이 농담이라 생각한 그녀의 입에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넌 날 누구라고 보느냐? 레녹스가의 공작인 내게 불가능은 없지. 룩스 대륙에서 실제로 마법사를 만났단다.”
“마법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요?”
“그래. 네 오라버니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룩스 대륙에서 겨우 마법사를 찾아냈단다.”
자랑스러웠는지 레녹스 공작의 어깨엔 힘이 들어갔다.
“오라버니를 위해서 찾아 나섰다고요? 대체 무슨 마법이길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어요?”
리첼의 생일 파티 준비하기 몇 개월 전 오라버니 루이스의 약혼식이 있었다. 상대는 체스터 백작가의 영애 비비안이었다.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가 한 여자에게 정착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 이유가 목걸이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이 나타날 때 안에 박힌 투명한 보석이 붉게 변한단다.”
“쿨럭.”
궁합이라니.
갑자기 웬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버지 입에서 나올 줄 몰랐기에 리첼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기침이 나왔다. 갑자기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거짓말이죠? 궁합이라니. 아버지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 몰랐어요.”
“아니. 사실이란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루이스가 실제로도 그 목걸이로 짝을 찾기도 했고, 한 여인에게 정착하기도 한 것을 말이야. 네 오라비의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그 목걸이를 네게 물려주는 게야. 아하하.”
공작은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실 알고 보니 네 어미와 나 사이에도 색이 변했더구나. 운명의 이끌림이 있던 게지. 그러니 그 목걸이가 네 짝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도 색이 변하다니…. 두 분의 사이가 좋긴 했으니 갑자기 공작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래서 오늘 네 생일 파티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단다. 색이 변하는 남자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으라고 말이야.”
“알았어요.”
레녹스 공작에게 말은 하진 않았지만 사실 리첼은 색이 변했으면 하는 남자가 있었다.
다만 아버지가 말하는 운명의 이끌림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오늘 무대의 주인공인 리첼은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원래 주인공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밖에선 레녹스 공작의 인사말이 들려왔다.
인사의 말을 마치고 리첼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가 그녀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리첼은 부디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리첼!”
이름이 불리자 리첼은 방에서 나와 2층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 끝에선 짝사랑 상대이자 소꿉친구 아드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후 손을 내밀자 아드리안이 그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그대로 무대의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과연 색이 변했을까?’
너무 떨리기도 했고, 바로 확인할 용기도 없었기에 리첼은 걸음을 멈출 때까지 목걸이를 쳐다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중앙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걸음이 멈추자 리첼은 힘껏 숨을 내쉰 후 고개를 숙여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
기대와는 달리 목걸이에 박힌 보석의 색은 여전히 투명한 색이었다….
“오늘 정말 아름다워요. 리첼 양.”
첫 춤을 아드리안과 추고 난 후 친한 영애들이 주변으로 모여 리첼에게 찬사를 보냈다.
평소라면 그들에게 둘러싸여 칭찬을 받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리첼의 기분은 울적했다.
‘왜 이 자리에서 급하게 확인하려 했을까? 차라리 다른 곳에서 확인할 것을….’
그녀는 성급한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고 있었다.
함께 춤춘 후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보자 오장육부가 문드러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야. 오늘도 언니가 아드리안 님을 독점하는 거야?”
아드리안이 멀어지자 동생 레이나가 다가와 눈치 없이 물었다.
원래는 생일을 핑계로 오늘 하루 아드리안을 독점할 예정이었지만, 이젠 모든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아드리안이 다른 여성들과 말하는 걸 원치 않아서 내가 방패막이 되어주는 거야.”
그래서 레이나의 물음에 리첼은 기운이 빠진 채로 대답했다.
‘이젠 내 짝도 아닌데….’
말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방패막이 아니라 옆에서 동반자가 되고 싶었건만 인생이란 사람 마음대로 쉽게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피- 언니 속 누가 모를 줄 알고? 요새 가장 인기 많은 남자를 옆에 두고 부러움의 시선을 즐기는 거지?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친구라는 핑계로 옆에 두고 있다니. 치사해.”
레이나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일방적인 짝사랑 중인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약을 올렸다.
“그런 거 아냐.”
리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얄미운 말만 하는 레이나가 원망스러웠다. 너도 목걸이를 받을 때 그때 실컷 약 올려주마, 라고 다짐하며 리첼은 자신의 동생을 흘겨보았다.
“그런데 왜 얼굴은 죽상이야? 특별히 아드리안 님이 언니 에스코트해줬으면 지금쯤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해.”
고까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려보는 눈빛 속에 속상한 마음을 애써 숨기려 했건만 표정에서 속마음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수상하다는 듯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레이나의 시선을 피하려던 찰나에 귓가에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들려왔다.
“그거 알아요? 요새 귀족 여인들 사이에 관심이 제일 많이 가는 남자가 누군지.”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 만큼 멋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파티의 흥을 돋우는 화젯거리였다. 요새 제국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하는 남자는 아드리안이었다.
그 순간 영애들의 시선은 일제히 아드리안을 향했다. 그러다 동시에 리첼에게 그 시선이 옮겨졌다.
오늘 에스코트를 하고 첫 춤까지 같이 췄기에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한지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단지 친구 사이일 뿐이지만 리첼은 그들의 시선을 부정하진 않았다.
대신 흠흠 헛기침을 하며 영애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눈치를 보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여성들의 시선을 빼앗아간 남자가 한 명 더 있잖아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드리안과 같이 언급될 정도로 멋진 남자가 있었던가?
“아, 누군지 알 것 같아요. 혹시 신전의….”